지구 상에서 우리나라처럼 입시제도가 자주 바뀌는 나라가 또 있을까. 아마 누구든 이를 수긍 할 것이다.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입시 제도는 변할 것이다. 쉽게 출제를 하면 변별력이 떨어져서 문제고 문제가 어려우면 변별력은 높지만 과외열풍이 몰아칠 것이라 참 난제중 난제가 입시제도고 시험 문제다. 이에는 학구열이 높아서라기 보다는 일류병이 주 원인이 아닌가 싶다. 입시제도가 아무리 변한다해도 결국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을 갖는 다는데 주 목적이 있다. 우리 때만 그럴 줄 알았는데 갈수록 처한 현실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만 하다.
취직은 서류심사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이력서, 자기소개서, 학점, 소지한 자격증등을 첨부해 내면 서류심사를 하고 시험을 치루고 최종으로 면접시험을 치룬다. 공채 몇 기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특채와 공채는 순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 80년 정국의 혼탁한 상황에서의 취직공고는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그 이듬해 봄 현대그룹이 처음으로 공채 모집공고를 냈다.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77년 78년에는 건설사들이 앞다투어 많은 인원을 채용했었다.
율산그룹, 제세그릅등등 신흥재벌들이 등장하고 기존 건설사말고도 전엔지니어링, 라이프건설, 한일건설등등 이름으로는 생소 한데 유명세를 탄 건설사들이 속속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78년 오일쇼크가 다시 생기고 나 앞날이 불투명하다보니 모두들 사람 뽑는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전두환이 또 누구인가. 그의 평소 소행으로 보아 아마 반강제적으로 재벌들을 윽박질렀을 것이다. 느닷없는 사람 뽑는 광고였다.
신문에 난 000명 현대그룹, 서류를 내고 시험통보를 기다렸다. 나는 롯데를 다닐 때인데 졸업을 하고 집에서 노는 사람들이 많았다. 2월 말 쯤으로 기억하는데 건국대 필기 시험장은 아수라장 그 자체, 그런 북새통이 없었다. 경쟁율도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같이 시험을 보러 간 안양선배도 그러했지만 애인들까지 따라 나서는 바람에 시험장이나 바깥은 만원 사례였다. 김밥을 싸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애인들 마음이 보다 더 급했다.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결혼 적령 나이가 여자는 24살부터 27살 정도, 남자는 27살에서 32살정도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바로 결혼들을 했다. 안양 선배는 애인이 임신까지 하는 바람에 남 모를 고초는 더했다. 나는 형 애인 덕분에 차디찬 잔디밭에 앉아 김밥을 갈라 먹었다. 그런데 운이 따르는 것인지 유체역학이라는 과목의 문제는 그 전날 밤 본 내용이 쪼로록 나왔다. 옆을 보니 반도 메꾸지를 못했는데 나는 꽉 채우고 검산까지 할 정도 였다.
내 공부 역사상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감이 좋았다. 시험도 운대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도 주장한다. 아쉽게도 안양선배는 필기시험에서 낙오가 되고 말았는데 나는 영어 회화 시험을 보러 당시 국제극장 맞은 편에 있는 현대사옥에 갔다. 거기서도 행운은 통했다. 나이가 어리니 군대면제에 대해 물어볼 것 같았다. 면제란 말이 영어로 뭔지 나는 사실 그때까지 몰랐다. 사전을 들춘 김에 ROTC가 뭐가 준 약자인지도 같이 살펴보았다.
내 예상대로 미국여성 시험관은 군대문제는 해결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들은 ROTC로 간 친구들이 많은데 나는 아쉽게도 면제가 되어 사회에 일찍 나오게 되었노라고 말을 했다. 정말 아쉽냐고 웃으며 시험관이 물었다. 솔직히 말해 동생들이 대학을 다니는데 돈 버는 사람이 없어 취직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ROTC가 뭐냐고 또 물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여유있게 대답을 했다.
나는 회화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 당연 합격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그 장소에서 최종 면접 시험을 보았다. 당시 각 회사의 임원들 10명 정도가 나와 앉아 있었는데 관심이 있는 회사 임원이 집중 문답을 했다. 나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훗날 BUY KOREA라는 광고로 유명세를 탔던 현대증권회장을 한 이익치 상무였다. 그가 물었다. " 자네 아버지는 무직으로 써 있는데 그전에는 뭐를 하셨나."
나는 대답을 했다." 공무원이셨는데 저번 공직자 숙정 때 그만두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그렇다면 부정을 했다는 이야기군." 다시 서류를 보는 것으로 보아 굳이 대꾸를 안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정치상황에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겁니다." 그러자 면접관 10명이 일제히 나를 쳐다 보았다.
나도 질세라 고개를 바짝 들고 그들을 응시했다. 문을 나오면서 직감적으로 떨어졌다고 생각을 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처지에 3배수를 뽑았다는 면접에서 항변하듯 말을 했으니 차례가 돌아 올 리가 없다싶었다. 나는 그날 북아현동에 사는 친구집 동네서 꽁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가 결국 옆자리와 싸움이 붙어 파출소까지 끌려 갔다. 술에 취해서 나는 험하게 말을 했던 것 같다. "씨팔 놈, 지가 대기업 상무면 상무지 말 함부로 해도 되는거야.그냥 롯데서 껌이나 팔지 뭐."
그리고 그 상무를 정확히 81년 4월 2일 울산에서 다시 만났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마 내 시험점수가 꽤 높았던 모양이다.나중 그룹 연수교육 때 호명을 하는데 5번째 안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엉겁결 그 바람 나는 그룹 연수때 반장을 했다. 그 상무는 당연 서울에 근무할 것으로 알고 기술영업부에 발령까지 냈는데 나는 굳이 울산을 고집했다. 아마 그를 따라 갔으면 내 영어 실력이 바로 들통이 났을 것이다. 군대를 간 셈 치자 하며 울산을 자청했지만 우울한 집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로부터 나는 거의 2년 가까이 울산 큰애기로 울산에서 살았다. 당시 영어 단어 exempt, patriotism.. '나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를 사랑하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다. 나는 현대라는 조직에서 애국심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싶다. ' 이 말은 당시 내가 영어로 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잘 꾸며 낸 말인데 시험 치기 전 준비한 말로 속된 표현으로 통밥을 잘 굴린 셈이다. 어찌 그 말이 나올 줄 예견을 한 것인지 신통방통한 노릇이다. 정말 그 말대로 국가를 위해 내가 한 일이 무엇일까 퇴직을 앞둔 이 나이 되씹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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