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를 찾다
당진에서 중학교룰 졸업한 나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공고 토목과에 들어갔다. 집안 사정도 어려운데 공고를 졸업하고 일찍 직장을 가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공고에는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진학했다. 정부의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공고를 우대할 때이기도 했다. 처음 경부고속도로를 시공할 때가 고3 때였는데 동창들이 천안, 청주, 양산 인터체인지 공사 현장에 견습생으로 나갔다. 입학 때는 운이 좋았는지 그런대로 좋은 성적으로 들어갔지만 졸업할 때는 59명 가운데 58등이었다. 공부에 관심도 없었고 더군다나 토목과는 내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집에 신세 지기가 싫어서 신문배달을 했다. 방과 후 동아일보 남영동 지국에서 후암동 지역을 맡아 200여 부를 돌렸더니 꽤 많은 수입이 생겼다. 마음이 안정을 찾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해 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패싸움도 하고 선생님들에게 대들기도 했다. 공부는 하지도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꿈도 없었고 무엇이 될지 막막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엔 끝이 있는 법이다.
‘나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까,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까’ 하는 질문을 어려서부터 끈질기게 물었던 내게 드디어 답을 얻을 기회가 왔다.
고3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오랫동안 방황하는 내가 절집과 인연이 있는 사촌 형님이 “내가 대학을 보내줄 테니까 여름방학 동안 조용히 절에 가서 공부해 봐라”라고 했다. 나는 무주구천동 설천면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불교는 전혀 몰랐다. 그저 할머니들이 불상 앞에 쌀이나 초를 올려놓고 자식 잘되라고 비는 그런 건 줄만 알았다. 법당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보고 ‘아이고, 노란 할배가 앉아 가지고 할매들 쌀이나 받아먹으려 하는구나’ 할 정도였다.
절에서 주는 밥 먹고 하숙생처럼 지내던 어느 날 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왜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괴롭게 사는 걸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물었던 질문이다.
교회에 다니며 성경도 열심히 읽어 보았지만 그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전생에 자기가 지은 업을 지금 자기가 받는 거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자기가 지은 대로 자기가 받는다는 것이었다. 자업자득 자작자수의 인과 법칙은 너무나 분명해서 내가 한 행동의 과보는 필연코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설명이었다. 불교의 인과설을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들려 왠지 마음이 끌렸다.
‘하나님이 시험에 들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다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해인사에서 젊은 스님 한분이 오셨다. 하안거결제를 끝내고 지나던 길에 들른 것 같았다. 방이 넉넉하지 않아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지금도 그 스님을 생각하면 수행자의 위의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젊은 스님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잘 다듬어진 언행이 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스님은 깨끗한 광목옷에 밀짚모자를 쓰고 걸망을 진 차림이었다. 삼 개월 동안 안거를 나고 왔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깨끗하고 청아했겠는가, 우물가에 가서 손을 씻은 후 공양을 드시는데 그 모습도 어딘지 품위가 있어 보였다. 밥을 먹고 난 다음 물을 부어 깍두기 한 쪽으로 밥그릇을 닦고 또 국그릇에 부어 헹궈서 마시는데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슬쩍슬쩍 곁눈질로 보는데 왠지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이 되었다. 7월 보름이라 달빛이 밝았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가 뒤를 슬쩍 돌아보니 스님이 벽을 쳐다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스님 도대체 뭐하고 앉아 있는 거야, 왜 저러고 있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스님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묵은 벚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마당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 십 분쯤 마당을 거닐던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다시 벽을 보고 앉았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그 기운에 밀리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누구에게 기로 밀려 보거나 져 본 적이 없는 내게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아홉시가 되자 스님이 일어섰다. 내가 이부자리를 깔자 스님은 목침 하나를 놓더니 이불 대신 입고 다니던 두루마기를 배에 덮고 누웠다.
궁금해서 도저히 그냥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고요함,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의와 침묵이 궁금하고 흥미로웠다.
“스님, 뭐 좀 여쭤 보겠습니다.”
“자기 할 일 하면 되지 남한테 뭐 물어볼 일이 있소?”
속으로는 ‘아니 이 사람이, 남은 힘들게 말을 걸었더니’ 싶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그 기운에 눌렸다.
힘좀 써 본 사람은 안다. 상대방의 기운에 눌리는 것만큼 언짢은 게 없다. 나는 열아홉의 고등학생이었지만 그때 이미 그걸 어느 정도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도 머 좀 하나 여쭤보려고요.”
아, 그리고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는데 맑은 기운이 훅 스쳐 지나갔다.
내가 좀 진지해 보였나 보다. 스님이 이부자리를 옆으로 치워 놓고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나보고도 똑같이 앉으라고 했다.
“그래, 무얼 물어보려고 그럽니까?”
“스님은 어떻게 해서 출가를 하셨나요?”
출가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버스나 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묻는다.
스님이 나를 한참 건너다보더니 물었다.
“학생은 뭐 때문에 절에 와 있소?”
“저는 대학 입시 준비하려고 와 있습니다.”
“대학은 왜 가려고 합니까?”
“좋은 데 취직하려고 가는 거죠.”
“좋은 데 취직해서 그 다음에는?”
“뭐, 장가가서 자식 낳고 그렇게 사는 거죠.”
조금 짜증이 나려고 했다. 다 알고 있는 걸 왜 묻는단 말인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죠, 뭐.”
“그러면 그렇게 살다가 죽으려고 여기 와서 공부하는 겁니까?”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말이 좀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고 딱히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찜찜해서 앉아 있는데 스님이 불렀다.
“학생?”
“예.”
“무엇이 ‘예’라고 대답했소? ‘예’라고 대답한 놈이 뭐요?”
누가 이 물음에 쉬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 이어져 내려온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소크라테스 같은 대철학자도 노년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정말 내가 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다’ 라고 했다.
남악회양 스님이 선종의 육대 조사인 혜능 스님을 찾아갔다. 그가 엎드려 절을 하고 법을 물으려고 하는 순간 혜능 선사가 먼저 물었다.
“어떠한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너는 누구인가를 물은 것이다. 남악 스님은 그 물음에 앞뒤가 꽉 막혔다. 물어보려던 질문도 잊은채 돌아갔다. 그리고 팔 년 동안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어야 할까’를 화두로 삼아 공부 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이게 어떤 물건인가?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있다고 하자니 뭔가 확실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없다고 하자니 이렇게 분명하게 보고 듣고 느끼고 작용하는 게 있다. 그러니 이게 도대체 뭔가?
팔 년 후 혜능 스님을 찾아가 이렇게 답을 했다.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시공을 초월한 이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열아홉 살의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스님께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네가 누구냐고 물었는데 모른다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영어를 공부하고 수학을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말에 벼락을 맞는 느낌이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영어 문장을 줄줄 외우고 수학 방정식을 풀고 세상사를 모두 안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을 후려쳤다.
그때 스님의 나이가 스물 셋 정도였다. 나는 그 이후로 여태껏 선방에 다니면서 그 스님처럼 사람을 바로 다루면서 알 수 없는 의문의 세계로 몰아가는 사람은 몇 사람 만나지 못했다.
나는 스님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이야기,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것,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 없이 했다는 이야기도 털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겁니까?”
“내가 나를 알아야 돼. 다른 일은 전부 다 그 다음 일이지.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가는 공부를 하는 게 바로 불교야.”
내 인생을 바꿔 놓는 말씀이었다.
그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조용히 잠든 스님 곁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생각했다.
‘도대체 나라는 게 뭔가? 내가 뭔지를 알아야 잘 살 수 있다고?’
십구년 동안 죽음이란 뭔지, 사람은 왜 사는지를 고민하며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온 게 결국 ’나’ 라는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인가?
출처 ; 명진 스님 / 스님은 사춘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