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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귤(紫橘)
명나라말기의 소설을 보거나 TV드라마를 보면, 명나라말기에 위소병(衛所兵)은 이미 완전한 거지군대(乞丐軍)가 되어 버렸고, 변군(邊軍)도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유일한 역량은 각 장군들의 개인무장세력인 가정병(家丁兵)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가정군을 기르는 돈은 부정부패로 얻은 군비였다. 그렇게 하여 악순환이 이어진다. 군대의 전투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가정의 전투력은 갈수록 강해진다. 그렇다면, 가정병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명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을까, 아니면 늦춰주었을까?
- 명나라 가정의 탄생
가정제(嘉靖帝)때의 신하인 전미(錢薇)가 쓴 <논급견무신안변정로소(論急遣撫臣安邊靖虜疏)>에 따르면, 가정의 기원은 정통제(正統帝)때부터이다. 정통시기 선대순무(宣大巡撫) 나형신(羅亨信)은 가장 먼저 가정군을 두자고 건의한 인물이다. "장교(將校)들은 모두 변방에서 스스로 경작을 해야 한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가정을 데리고 함께 농사를 짓는다. 이는 병즉농(兵卽農)이다. 일이 생기면 가정을 데리고 싸운다. 이는 농즉병(農卽兵)이다." 이들 가정병은 위소병에서 나왔다. 이 조치는 장군들이 위소병과 위소의 둔전을 침범하기 편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우겸(于謙)등은 반대했던 것이다.
전미가 말한 장교중 두 사람이 주목할 만하다. 즉 양홍(楊洪), 석형(石亨)이다. 사료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확실히 가정병을 기른 흔적이 있다. 예를 들어, 경태3년, 창평후 양홍의 아들 양걸(楊傑)은 이렇게 말한다: "가인(家人) 양웅(楊雄)등 16명이 부친(양홍)을 따라 정벌에 나서 공을 세웠고, 모두 백호소총기의 직역을 받았다." <명실록>에 따르면 천순시기, 조정은 총병관 석형의 가인을 승진시켰다. 여기의 가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정병이다.
천순8년부터, 감숙순무(甘肅巡撫) 오침(吳琛)은 상소를 올려, 위소병들들이 장군에게 의탁하거나 혹은 장군들이 받아들여 가인, 의남(義男)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후 성화제때이건 홍치제때이건 구변의 관병들중 장군들의 집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정의 육부는 상의하여 "각처의 군관을 조사하여, 기간이 얼마나 오래되었건 모조리 원래대로 복귀시켜, 군역을 계속하게 한다" 요동순무는 상소를 올려, "군정을 위소로 돌려보낸다. 이를 어기는 자는 5명마다 1급씩 강등시키고, 심한 자는 파면하고 일반병사로 근무하게 한다." 이렇게 각지의 장군들에게 가정을 석방하도록 명했고, 징계조치까지 내렸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정덕제때까지 조정이 가정의 존재를 금지했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구변의 여러 진에서는 위로는 총병(總兵)부터 아래로는 천호(千戶)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인'을 거둔 상황이 있었다. 이들 가인은 바로 나중의 가정의 원형이다.
2. 가정(嘉靖)조에 가정(家丁)이 흥성하다.
가정이전에 가정이 전투역량으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가정조이후 가정이 전쟁터에 나타나는 상황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가정전기의 명장인 마영(馬永), 양진(梁震)등은 <명사>에서는 그들이 "기발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사졸(士卒)이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다." 여기의 사졸은 분명 위소병이 아니고, 아마도 가정일 것이다. 마영의 가정은 그가 계주총병(薊州總兵)으로 있을 때 고른 자들이다. 사료에 따르면, "군대를 간소화하고, 노약자는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급여를 건장한 자들에게 배로 나눠주었다." 1535년, 요동에서 병변이 발생한다. 가정제는 반란을 평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학사 비굉(費宏), 이시(李時)와 연구를 했다. 비굉은 이렇게 말한다: "듣기로 마영(馬永)은 가정이 팔십여명인데 모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용맹하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이때 가정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었다. 설사 수보(首輔, 재상)라 하더라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36년, 역시 예과급사중인 전미가 이런 말을 한다: "오늘날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은 가병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해, 호과도급사중 상서(常序)는 이렇게 말한다: "변방에 경계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각진에서 가정을 뽑았다." 1539년, 요동의 광녕에서 병변이 발생한다. 여전히 마영이 가정을 이끌고 진압했다. 양진, 주상문(周尙文)의 상황도 유사하다. 양진은 대동(大同)에서 활약했고, 대동은 더더욱 병변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었다. 양진은 "건아 오백명을 평소에 길렀다" 그리하여 대동진의 병사들은 조금 위축된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가정제때 가정은 이미 보편화되었다는 걳을. 특히 1550년 경술지변(庚戌之變)이후, 가정은 구변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주요역량이 된다. 1558년 병부랑중 당순지(唐順之)는 이렇게 말한다: "각 변방의 장수들이 전투에 참가할 때는 모두 가정에 의존한다."
3. 가정의 범람
가정중기, 가정은 각 변방의 장군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정은 더욱 확대된다. 즉, 문관의 수하병들이 가정화된다. 경군의 장군들에게도 가정이 나타난다. 심지어 감군인 태감도 가정을 두고 부린다.
문관의 소속 부아병(府衙兵)의 가정화는 그 시작이 가정중후기의 북로(北虜)의 환이 엄중해지면서이다. 변방의 총독, 순무는 자신에게 완전히 충성하는 '표병(標兵)'를 만들기 시작한다. 가정은 바로 그 독무표병(督撫標兵, 독무는 총독, 순무를 가리킴)이었다. 명사전문가 초립군(肖立軍)에 따르면, 명나라때 선대총독 옹만달(翁萬達)은 1546년 '표병'을 만든다. 이해에 옹만달은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관이 부대를 지휘하는 원칙하에서, 자신은 최고총사령관인데, 그저 병력통수권만 있고, 직접 병사를 거느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부대도 없다. 선대의 장수들은 서로 미루기만 하고, 지휘를 듣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업무를 제대로 전개하기 어렵다." 그리고, 다음 해 옹만달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자신은 이미 '군문표하 관군, 통사, 가정, 의용 2천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해에 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1546년에 이미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독무표병은 성립때부너 바로 가정병이라는 명목이었다. 만력시기의 요동순무 주영춘(周永春)은 자신의 휘하에 새로 가정 3천을 뽑는다. 이렇게 대규모로 모집하는 것은 이미 가정의 의미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력중후기에 이르러, 구변의 각 문신들은 모두 가정을 가진다. 가정은 독무(총독, 순무)의 특례가 아니다. 예를 들어, 1601년, 병과급사중 계유근(桂有根)의 상소에서는 "요동사도문신은 각 영의 정예병을 뽑아서 가정으로 삼았다." 이를 보면, 가정은 이미 변방의 중하급문관에게도 보급되고 있었다.
경사(京師)에도 가정이 출현한다. 이는 1550년 경술지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술지변은 엄답칸(俺答汗)이 경사를 포위하고, 십여만의 경군은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성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경군을 정돈하는 것은 급선무였고, 그 방법은 변방의 군인을 데려와서 경군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당시 변방의 군사모집을 책임진 구란(仇鸞)이 내놓은 방안은 장군들로 하여금 가정을 이끌고 입경하게 하고, 조정이 그들의 군량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변방군의 장수들이 가정을 이끄는 기풍이 경성까지 흘러들어오게 된다. 주목할 점은, 제도적으로 볼 때, 경영의 군대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정은 현실적으로 존재했고,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황은 매우 난감해진다.
마지막으로 태감의 가정을 보자. 태감이 가정을 두기 시작한 것은 숭정제때부터이다. 가정제이전에 태감이 변방에 나가서 군대를 감독할 때는 그저 시종만 데리고 갔다. 숭정말기, 숭정제는 문관이 무능하다고 여겨, 감군인 태감을 대거 외지로 파견한다. 현재 자료에 나오는 것으로 최초의 태감의 가정은 1631년 어마감태감(御馬監太監) 장국원(張國原)이 계조의 군량을 감군할 때, 숭정제가 그에게 가정의 모집을 허락하고, 조정에서 군량을 제공했다. "가정 팔십명을 뽑도록 허가했고, 월급여는 관례대로 지급했다." 그후 태감 마운정(馬雲程)이 관녕의 감군으로 나갔을 때 역시 가정 백명을 선발한다. 선부, 대동, 산서 3진의 감군인 왕곤(王坤)은 가정 육십명을 선발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 태감의 가정은 모두 부임하기 전에 임시로 뽑은 것이어서, 성분이 복잡했고, 거의 전투력은 없었다. 그래서 이들 가정은 그저 시종에 유사했고, 그저 가정이라는 이름만 붙였을 뿐이다.
4. 가정의 작용
청나라때의 조익(趙翼)은 명나라때 가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양군이 만나 전투를 벌일 때 용맹하게 싸웠다. 이것이 장수들이 가정, 친병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조익은 전투는 사기와 용맹함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가정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가정은 위소가 붕괴되고, 변방군이 해이해진 상황하에서 굴기한 새로운 군대였다. 그들은 장군들이 지휘했고, 대우도 좋았으며, 사기도 높았다. 만력제때 요동독사 양몽룡(梁夢龍)은 이렇게 말한다: "적진을 돌파하는 것은 오직 정병영의 가정에 의존한다." 그들의 존재는 한동안 일정한 정도에서 대명의 퇴락을 막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555년 몽골기병이 선부를 침범해들어왔을 때, 참장 마방(馬芳)이 가정을 이끌고 야간에 기습하여, 몽골을 대파했고, 몽골은 어쩔 수 없이 장가구(張家口)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비록 가정이 변방의 방어에 큰 역할을 했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마찬가지로 분명했다. 최대의 폐단은 바로 수급기공제(首級記功制)였다. 가정은 수급을 얻기 위하여 자주 양민을 죽여서 전공으로 위장했다. 그리고 장군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가정들을 지나치게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 그리하여 명나라말기에 백성들은 관군을 도적보다 더욱 무서워하게 된다. 그외에 명나라말기 가정의 군량은 조정에서 지급했다. 그리하여 가정의 명의를 빌어 군량미를 받아가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모두 사칭하여 군량을 받아갔다. 가정의 절반은 모두 받고, 절반은 자신이 가졌다." 다음으로 장군들이 가정을 마음대로 하게 놔두는 바람에 1565년, 산서순무 왕계락(王繼洛)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본진의 부총(관), 참(장), 유(격)이 이끄는 가정은 사방에서 나쁜 짓을 벌이고, 세력을 믿고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은 명나라말기에 이를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결론
가정의 존재는 폐해가 이익보다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가정은 병력을 장군이 가지고, 조정에 충성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당나라때의 절도사의 아병(牙兵)에 유사했다. 조정이 가진 관군은 장군이 가진 가정보다 못했다. 가정의 존재는 장군이 중앙에 대항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황제도 감히 그들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명나라말기에 아주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문관이 무관을 통제하고, 문관이 무관보다 상급인데, 문관은 자주 황제에게 피살당하지만, 무장은 명령을 듣지 않아도 황제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기형적인 군사관계는 결국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