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청라
나는 인간의 눈을 우주에 비유하고 싶다.
작은 동공에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으니 우주와 내 작은 반구가
고스란히 담지 않으랴.
그 속의 또 하나인 지구별,
그 한쪽 귀퉁이에 점처럼 자리한 고향,
우리는 애당초 이승의 고향보다는
어느 별 어느 은하계를 떠나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고향이라면 늘 아련하게
아려오는 물빛 그리움이 되는 것임을...
나의 눈에 담긴 어린 날 고향에 대한 영상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선명히 담겨
빛 바래지 않고 있다.
세월의 나이가 켜켜이 쌓이고 그 위에
또 다른 고향이 자리해 가도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기억은 쉬이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고향이라면 마음이 허허로울 때
쉼터처럼 찾는 게 아닐까 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을 찾듯이.
살다보면 아련한 기억과 함께 쓸쓸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밤이 더러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달이 있는 저녁이면 더 없이 좋다.
어느새 마음은 고향을 향해 달려가고
그런 마음뒤를 선 듯 따라 나서지 못하는 내가 있다.
내게 있어 고향을 떠올릴 때면 동구 밖 어귀 저만큼에서
지난 시절의 아픔이 먼저 달려오기 때문이다.
내 고향의 봄은 우리 집 돌 담 언덕에
비스듬히 자리한 살구꽃과 뒷동산 군데군데 피어있던
복사꽃이 제일 먼저 알렸다.
살구와 복사꽃이 많은 마을이라서 봄이 오면
온 동네는 붉으레 물들어 연분홍 빛 마을을 만들곤 했다.
살랑대는 봄바람에 복사꽃잎이 스러지고
풋과일이 수줍은 얼굴을 내미는 여름이 오면
온돌방 때문에 마당에 이동식 부엌이 만들어졌다.
멍석 깔고 앉아 때 이른 저녁밥을 먹고나면
하늘을 천장삼아 모기불에 취해 누웠다.
한 여름밤의 긴긴 달 그림자를 따르자면
멍석 위에 떨어지던 살구 열매로
여름밤의 설익은 잠을 좇았다.
하늘에선 별이 한아름 쏟아지고
나는 나의 별을 찾아 헤매다 꿈을 엮는 아이처럼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머 언 먼
우주의 얘기를 꿈속에 품었다.
자연의 순리가 태양의 이글거림과
비바람 치는 폭풍우에도 굴하지 않는
알찬 열매의 영금으로 익는 가을엔
감나무에 종일을 매달렸다.
감 홍시를 따먹은 댓가는 풀 쇄기에 치루고
단풍잎에 물든 마음을 감잎에 곱게 접어 여문 볕에 말렸다.
뒤란에 섯는 대나무의 서걱인 울음이
늦가을의 스산함을 더해주고 비워져간
빈들에서 달빛을 동무 삼아 노닐 땐
내 푸른 정서에도 달이 가득 찼다.
아마도 베틀에 기댄 어머니 가슴에 내려앉은
적막한 서정마저도 세상물정 모르는 동심은
내 몰라라 갈라놓았으리라.
고독한 여인네의 긴긴 한숨이
밤새 몰래 내린 눈으로 와서
세상에 덮일 때도 나는 시원찮은
신발로 강아지처럼 뛰어 다니며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으로 허기를 채웠었다.
이렇듯 어린 날의 동심을 안고 찾아드는 고향을
나는 잃어 버렸다는 표현이 나을 게다.
한 가정의 단란하던 행복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이 불구가 됨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와야만 했다.
가장의 뿌리깊은 흔들림은
나뭇가지에 쉼 없이 부는 겨울바람과도 같이
황량하고 매서웠다.
한 번 둥지를 떠나버린 포근하던 안식은
봄이 오고 겨울이 가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동구 밖 어귀에서 시장간 어머니를
저녁 늦게까지 기다리던 애달픔도,
배고픔도, 새털 같던 많은 날의 우정도,
배움 앞의 초라함도,
나는 모두 두고 고향을 떠나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떠나오는 날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해 보았지만 끝내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돌아보고야 말았다.
적막감에 쌓여있던 고향의 모습과
그 위로 겹쳐지던 내 아픈 상흔들,
영원한 아픔도 영원한 슬픔도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라서 일까.
인간의 심성은 지난것을 그리워하는
회귀본능 때문일까.
고향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던
옛 맹세는 세월의 뒤란에 섧은 그리움으로
남은지 오래다.
아마도 나는 고향을 떠나오던 날
내 마음은 복사꽃 피는 언덕에 걸어두고 왔나보다.
옛 시절을 회상하면
어느 듯 입가엔 엷은 미소가 번지고
일상의 찌든 생각들은 한 순간이나 잊어버리는
고향을 슬프게 회상하기보다는,
인생사 양분 많은 거름으로 남겨짐을 감사
하게 받아들여야겠다.
자꾸만 마음의 고향이 날 꼬드긴다.
이쯤에서 아픈 가족사는 내려놓으라고,
복사꽃에 묻어둔 마음 따라
연분홍 빛 시절의 푸른 언덕에
걸어둔 마음을 추억하며 살라고.
인생은 그다지 슬프지만은 않은 거라고.
동공 가득한 사연들은 우주의 티끌처럼
빗물로 흘러 내릴지언정 고향은 진정
사무친 물빛 그리움이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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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젠가 청라님의 글에 감동 받고 한참을 머물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 비슷하게 살아온 동심과 감성이 좋으네요 ~~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한참을 앉았다 갑니다 ~~ 명절 잘 보내세요 ~~
꿈꾸는 파랑새님, 문학은 상처 위에 피는 꽃이라했나요. 곱게 승화시켜 아름다운 열매 맺으면 추억의 옛노래 카페에 간혹 올리겠습니다. 노래로 마음의 즐거움을 주는 옛노래 카페에 부족한 글로나마 보답하려는 마음으로...새해 복 많이 받으셨지요. 감사합니다.
장문에 고향 에 대한 그리움 에 글 가슴깊게 스며 옵니다..감사합니다.잠시나마 짧은 고향생각에 젓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