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방어진은 현대의 왕국, 술집을 가도 양복 입은 사람한테는 외상을 안준다,뜨내기이기 때문이다. 현대복장에 이름표를 부착하면 외상도 아낌없이 해 준다. 이름표에는 짝대기까지 동원 해 직급을 표시하고 있다. 짝대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대우가 좋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당시 81년 때의 이야기다. 출퇴근 길 오토바이와 자전거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5만명이 사는 울타리 안에는 중공업 엔진 중전기 선박수리를 하는 미포조선 한국프렌지등이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벽촌마을이 먹고살고를 자급자족하듯 현대 왕국 또한 쇠붙이만 들여오면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뚱땅뚱땅 배 철구조물 등등 못 만들게 없었다. 당시 정문 앞 전하동에는 목욕탕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곳 또한 현대가 직영하는 터라 현대 가족이 아니면 천만냥을 줘도 입장이 불가했다. 그 바람에 술집여자들은 티켓을 얻으려고 온갖 교태를 다 부렸다. 그렇지 않으면 버스타고 시내까지 30분쯤 나가야 했다. 어린 생각에 그곳에 목욕탕을 차리면 잘될 것이라 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15년 쯤 지나 그곳을 다시 찾아 간 적이 있는데 영화관, 수영장, 공원, 호수, 호텔까지 없는 게 없는 곳으로 변하였고 영화관이나 수영장은 입장료가 백원 밖에 안했다. 정몽준이 내리 그곳에서 당선이 된 데는 다 그만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당시의 그곳은 여느 직장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대졸 초임이 2십4만5천원인데 그곳에서는 벽지수당이라는 게 있어서 345,000원이었다. 10만원의 차이를 우습게 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큰 돈의 차이였다.
봉급이 많으면 자연 일도 많은 법이다. 아침 6시 기상, 6시30분 민병철 영어 방송, 6시 40분 아침 식사, 7시30분 출근, 점검후 아침 체조, 8시 업무 시작, 퇴근 시간은 정해진 바가 없었다. 토요일도 5시 까지 근무하고 일년 통털어 휴일이라곤 일요일 구정 신정 추석 빼곤 삼일절 제헌절 개천절 광복절에만 노는 직장.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나날들이다. 5만명이 한울타리에 같이 있다보니 통제 또한 대단했다. 씨름 선수 출신들이 정문을 지키고 위력이 막강했다. 그냥 경비가 아니다. 직급이 차장급이니 대단한 철통방위이고 위엄인데 한 번 외출을 하려면 부서장 날인이 찍힌 종지쪽지가 필요 했다. 당시 정몽준의 직급이 차장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통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비가 확인 전화를 해 완전무결해야 가능 했다. 그러다 보니 외출한 번 나간다하면 온 부서에서 바깥 일 대행을 시키는 터라 아예 안나가는 것이 속 편했다. 일벌레가 되고 말 조건이 자연 갖추어진 내 직장, 당시는 공학에 관한 책들은 영문이나 일본 판을 한국판으로 번역하여 터득하던 때였다. 원서를 본다해도 값이 엄청나 살 엄두를 못 내던 때이다. 그러기에 이를 무단복사하여 싼 값에 넘겨주는 떠돌이 책장사가 있었다. 무단이다보니 쫓기는 신세인 그였지만 나는 그가 우리 중공업의 발전에 일조를 담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를 출근 길에 정문 앞에서 보면 퇴근 시간 다 될쯤 우리 회사쪽으로 건너왔다. 얼마나 넓은 땅 덩어리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누군가 정주영 회장을 천년에 한 번 나올만한 인물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이 말에 부정을 하지 않는다. 배를 만드는 단일 공장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공장을 만든 사람이 바로 정회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왕회장이다. 배는 바닷가 가까이 큰 터에 무거운 것을 들 기중기 용접기술자 설계기술자 일조량 등등이 모두 구비되어야 원가가 싸게 먹히고 타산이 맞아 떨어진다.
아무리 전 세계를 뒤져도 이 요건을 다 갖춘 장소는 대한민국 그것도 남해나 울산 밖에는 없다. 배에 방수나 색칠하는 도장공사는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 일조량은 말도 못하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적도 근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문제다. 기상조건만 따져봐도 한국이 안성맞춤이다. 정문안에서 우리 회사 까지 가는 버스가 따로 있었는데 신출인 나는 지름길로 출근하기 위해 배조립 도크를 4개 건너 다녔다. 배를 다 만들면 물을 채우는 도크는 10층 높이로 매일 80층 높이를 오르락 내리락 한 셈이다.
어떤 때는 배를 띄우기 위해 도크에 무릎 정도 찰 만큼 물을 채웠는데 지각하면 문을 닫아버리니까 양말을 벗고 구두를 들고 첨벙첨벙 대며 그 길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런 때는 일요일이 즐거웠다. 도크 안에 들어온 물고기를 바가지로 퍼 담는 재미가 솔솔했다. 72년도 무작정시작햇다는 왕회장이지만 앞날을 내다본 그의 예지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며칠 전 유시민의 글 잘 쓰는 법이란 문구가 인터넷에 나돌아 혹시 그가 쓴 책대로 하면 나도 잘 쓸 수 있을까 해서 서점을 기웃했었다. 그를 따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싶어 발길을 돌리던 차에 그가 집필한 '후불제 민주주의'(2009)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문득 그 제목을 보자니 떠오른 그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 우리는 후불제 자본주의라 할 경로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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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부패로 국민의 원성을 사다 4·19혁명으로 실각한 뒤 하와이로 쫓겨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고 민주화가 진행되자 美행정부가 유럽의 서독처럼 공산권과 대립중인 한국을 선전용으로 활용하려고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정유공장(유공), 제철소(포항제철)를 美건설기업인 백텔社를 앞세워 수주했다. 이것이 바로 1962년부터 박정희 정권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골자다. 물론 투자금은 당시 일본정부가 전쟁배상금으로 미국 측에 주기로 한 금액의 일부를 떼서 활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1960년 5월 16일 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뒤 문제가 생겼다. 미국이 한국을 장악한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고, 일본 정부도 한국의 군사정부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의사를 미국측에 전달하였다. 이 때 일본의 오히라 외무상이 "박정희 군사평의회 의장을 잘안다"며 한일회담을 전격 추진한다. 물론 미국은 뒤로 물러선 채 사태를 관망했다. 그 때부터 한국은 차관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후 복구를 위해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던 것과 다르게 말이다. 요즘 독일 여수상이 일본 아이들한테 사죄를 하려면 똑바로 하라고 하는 말이 허투루한 말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아두어야 한다.
어쩌든 돈을 빌려 경제건설에 나설 수밖에 없던 시기. '후불제 자본주의'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후불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아마 정주영을 따를 자가 이 세상에 없으며 두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몇년 전 현대차 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려 할 때 현대家의 광고대전이 온 매스컴에 넘쳐났었다. 그 중 눈에 띈 TV광고가 현대중공업 광고인데, 과거 故 정주영 회장이 한창 때 회사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5만분의 1지도, 조선소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그걸 들고가서 당신이 배를 사주면 사줬다는 증명을 가지고 영국정부 승인을 받아서 영국정부에서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모두 사들이고 해서, 여기 조선소를 만들고 네 배를 만들테니까 여기서 사라"는 내용이다. 이는 봉이 김선달보다도 더한 똥 배짱이다. 하지만 왕회장은 사기를 친 봉이와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멀다. 왕회장은 박통의 특명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영국 제일의 버클레이즈 은행을 움직일 만큼 영향력이 큰 A&P 애플도어사 롱바롬 회장을 찾아 간 것이다. 요즘 우리가 잘 아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의 공식후원 은행이 바로 바클레이즈다. 그러나 일언지하애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왕회장은 5백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거북선을 만들만큼 우수한 민족이라며 설득을 한다. 그는 배 건조 수주를 받아야 차관을 승인한다는 영국정부의 요구에 보란듯이 그리스 리바노스에게서 두 척을 의뢰받는다. 조선소 없이도 배를 판 정회장은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배 진수 세계최초의 무도크 선박건조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조선소 건설과 당초 목표 6천 3백만 달러중 4천 3백만달러를 외자 조달하는 성과를 동시에 이루는 쾌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성공전략은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카리스마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만드는 탁월한 수완에 있었다. 그는 죽기살기로 배수의 진을 치고 돌진하는 추진력과 남들보다 큰 계획과 대담한 아이디어를 창출한 시대의 거인이었다. 무중생유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라 . 그 말은 어딘가 성웅 이순신 말과도 매칭이 되는 것도 같다. 나는 거의 군대와 다름 없는 그곳에서 시대의 암울함을 서서히 지워나갔으며 현대의 당시 표어'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을 내 좌우명으로 삼고 믿고 따랐다. 나는 지금도 그곳에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름에 쩌든 그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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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