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기 – 계율은 제동장치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얼마 전 법사님의 법문을 듣고 궁금증이 생겨서 질문 드립니다. 계율을 잘 지켜서 집중을 하고 그 결과로 지혜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계율이란 행동강령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궁극적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다스리는 게 계율인가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삼일동안 딴 짓 하다가 내가 뭐하고 있나 이게 정말 도둑이 들었구나 하다가도 또 딴 짓하는 제가 좀 우습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계율 지키기도 참 힘들다, 라는 생각으로 질문 드립니다.
김진아 올림.
< 답변 >
위빠사나 수행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울러 질문할 때도 자신이 체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말할 때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기회가 생깁니다. 진아님이 계율을 지키기 힘들다는 말은 평소에 계율에 대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진실이라서 실감이 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도 진아님과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을 위해서 계율을 말씀하실 때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셨습니다.
누구나 자유로운 마음을 갖기를 바라기 때문에 계율은 나를 구속하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리석음과 탐욕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지혜가 있었다면 괴로움뿐인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때 사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아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탐욕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선입관을 바로잡기 위해서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사람들이 계율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교학을 말할 때는 계율과 집중과 지혜로 말씀하십니다. 사성제의 도성제가 팔정도인데 이것을 계정혜(戒定慧)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율이라는 뜻의 실라(sīla)와 집중이라는 뜻의 사마디(samādhi)와 지혜라는 뜻의 빤냐(paññā)입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을 실천할 때는 계율이라는 뜻의 실라(sīla)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알아차림이라는 뜻의 사띠(sati)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는 팔정도인 계정혜(戒定慧)를 사띠(sati), 사마디(samādhi), 빤냐(paññā)라고 합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계율이 나를 속박하는 것이라는 선입관을 갖기 마련이라서 계율 대신에 알아차림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알아차림이란 말과 계율이라는 말의 뜻은 같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마음이 청정한 상태라서 이 순간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가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사실 계율이라는 단어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열반도 교학에서는 사용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수행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열반은 깨달음을 얻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상태라서 아직 지혜가 나지 않은 사람은 열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대신 해탈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수행할 때 열반이라는 뜻의 닙바나(nibbāna)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만약 내가 열반에 들었다고 하면 천박하게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내가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율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계율이라는 뜻의 빨리어 실라(sīla)가 어떤 내용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실라(sīla)는 본성, 습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를 지키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이 나쁘고 습관이 나쁜 것입니다. 나의 본성과 습관은 나의 잠재의식이고 고정관념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나의 가치관을 결정하고 나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인간이라면 계행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실라(sīla)는 도덕, 도덕적 의무, 도덕적 실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뜻으로 그치면 안 되고 의무적으로 실천할 때 도덕입니다.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기 위해 알아차림을 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가 침투하지 못해 청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조건은 반드시 오계를 지킨 과보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때의 계율이라는 뜻의 도덕은 나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를 위험으로부터 막아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내가 계행을 지키면 남이 나를 해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나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받지만 남이 나를 부단히 해칠 수 있습니다. 만약 도덕이 없다는 나는 한순간도 편안하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이 계행이라는 뜻의 도덕이 있어서 그나마 위험에 처하지 않고 숨 쉬고 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실라(sīla)는 계(戒), 계행(戒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의 계(戒)는 도덕적인 덕목을 말하고 계행(戒行)은 도덕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계(戒)와 계율(戒律)은 다릅니다. 계(戒)는 도덕적인 덕목을 말하고 계율(戒律)은 규칙, 규범을 말합니다. 가령 일반 불교도는 오계나 팔계를 지키지만 비구는 비구 227계를 지켜야 합니다. 승가의 비구가 되면 비구로서 지켜야 하는 규칙이 바로 계율입니다.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면 이 순간 마음이 청정해져서 현 법의 이익을 얻습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 두 번째 통찰지혜의 이익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이런 결과는 반드시 계행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지키기 싫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계행이 오히려 나를 지고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출발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위빠사나의 수행의 시작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계청정으로 시작해서 마음이 고요해져 집중이 되는 심청정에 이르고 다음에 지혜가 난 상태의 견청정에 이릅니다. 도과에 이르러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려면 누구나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계율로 먹으라는 말을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 무슨 계율이 필요한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선하지 못한 마음을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번뇌라고도 합니다. 사실 나도 모르게 탐욕으로 먹고, 성냄으로 먹고, 어리석음으로 먹습니다. 먹을 것을 탐하고, 입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배불리 마음껏 먹는 것이 모두 계율을 어기면서 먹는 것입니다. 인간을 먹을 때 탐진치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비구 계율에 먹는 것에 대한 조항이 매우 많습니다.
저도 비구생활을 하면서 먹는 것에 대한 지적을 받고 계율로 먹는 것이 수행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사실 먹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서도 탐욕으로 하고 성냄으로 하고 어리석음으로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좌선을 하다 자세 하나를 바꾸는 것도 탐진치로 합니다. 이때는 미세한 탐진치라서 모르지만 사실은 매 순간 탐진치로 수행하는 것을 알 때가 옵니다.
그래서 계율은 매우 유익한 것이며 청정한 것이고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계율 안에 있을 때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계율을 지키는 토대 위에서만이 지혜가 성숙하면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이런 과정의 시작이 바로 계율이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동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제동장치인 브레이크입니다. 바로 이 제동장치가 나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래서 내가 계율을 지키는 행위가 나의 목숨을 살리는 브레이크라고 아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는 나아감과 적절한 제어가 함께 작용해야 안전합니다.
묘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