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야마구치) 여행8 - 하기시에 히로부미등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생가를 보다!

동해(일본해) 바다 야마구치현 서북쪽에 자리한 엣 조슈번의 수도 하기 (秋)시는
언덕 위에 하기성 이 자리하고 그 아래는
무사촌이 형성되었는데 강 건너에는 요시다 쇼인이 태어난 마쓰모토촌이 있다.


오늘날 천수각은 물론이고 성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은 조슈번의 주도로 260여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느뜨리고 천황을 옹립하는 메이지유신 을 이룬후...

3년후인 1,871년에 260여개 번들이 나라를 천황에게 바치는 폐번치현 을 단행할 때....
메이지 유신의 주역 조슈번이 솔선수범해 성을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기차가 하기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외곽에
서는 것은 하기 시내가 모두 조상의 유적지 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모노세키에서 특급기차를 타고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북상하면 장문시를 거쳐
두시간만에 하기시 외곽인 히가시하기 (東秋 동하기) 역에 내려야하는 것이다.

혹은 돗토리현 요나꼬 에서 마쓰에와 이즈모를 거쳐 야마구치시로 가는 삼거리인 마스다
ますだ 益田(익전) 역을 지나 오른쪽으로 동해 바다를 끼고 계속 내려가도 된다.

하기(秋) 시내에 "무사촌 거리" 는 100여년 전에 발간된 지도를 들고도 집들을 찾을수
있을 정도로 개발을 철저히 금지하고 "옛 집들을 보존" 하는데 공을 들여왔다.


여기 하기시 출신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 은 전국을 주유하다가 에도만에 나타난
미국 페리 제독의 구로후네를 목격하고 놀란후에는 존왕양이파 로 뜻을 세우게 된다.


그러고는 고향 하기시로 돌아와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라는
학숙을 세워 2년도 안되는 기간에 90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모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그러니 메이지유신을 이룩하는 여기 하기시의 사무라이들은 대개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 로
그 중에서도 80명으로 거병해 3천명의 조슈번 사무라이 부대를 물리치고 1천명으로
2만명이 지키는 막부의 규슈 고쿠라성을 함락시킨 다카스키 신사쿠 의 집이 먼저 눈에 뛴다.

다카스키 신사쿠 (高杉晋作) 는 사실상 메이지 유신의 행동대장으로
그 천성의 강기가 돋보이는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과감무쌍한 인물이었다.

해서 현재 일본 총리 아베신조 安倍晋三 는 할아버지가 신사쿠를 마음속으로 부터
숭앙하는지라 그 이름자에서 신晋(진) 자를 따와서 지었다고 한다.

신사쿠가 막부 10만대군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후 전사자들을 신으로 모
시기위해 초혼사를 발의해 지은게 사쿠라야마 신사 이고.....

그 신사에서 존왕양이론자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 를 모셔가서는
에도(도쿄)에 지은게 "야스쿠니 신사" 로 초대 신관도 여기 조슈번 출신이다.

요시다 쇼인을 존경하고 신사쿠를 흠모하는 아베 신조 가 어찌 참배를 강행하지 않으리요?
그가 참배를 중지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니 식물인간 이라....

그 옆에는 사쓰마(가고시마) 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더불어
메이지 유신 3걸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옛 이름 가쓰라 고고로) 의 집이 붙어 있다.

그는 쇼인의 제자 신사쿠나 겐즈이 보다 나이가 몇 살 위로 조슈 존왕양이파 무사들의
대표로 메이지 유신을 설계 하고 에도(도쿄) 천도를 단행한 인물이다.

이웃집은 메이지유신에 활약하고 외무대신을 거쳐 총리일때 미국의 태프트 육군장관과
비밀협상을 통해 필리핀과 조선 을 서로 갈라먹은 가쓰라 다로 의 집이네?

가쓰라 다로는 독일에 유학한후 청일전쟁시 요녕성 영구를 점령하고 대만총독을 역임했으며
육군대신을 거쳐 총리가 되자 미국으로 부터 일본의 조선지배 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그 옆은 존왕양이(尊王攘夷)론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의 누이동생과 결혼한
구사카 겐즈이 집으로 교토의 천황을 움직여 대정봉환 을 성사시킨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다.


구사카 겐즈이는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와 일본의 통합을 위한 대화를 나누며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시모노세키 전쟁 에서는 외국 함선에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이웃에는 두말이 필요없는 인물 바로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죽은
"이토 히로부미" 의 생가이고 옆에는 따로 별장이 서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본명은 하야시 리스케로 아버지가 고용되어 일하던 중급 사무라이인
주겐 신분의 이토가에 양자 로 가서는 이토 슌스케로 불리다가 훗날 히로부미로 개명한다.

당시 조슈번은 무사가 10% 이고 평민이 90% 인데 신분은 중신 - 사무라이 -
주겐 - 아시가루(병사) - 평민 - 천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이 거리에는 일본 육군의 교황으로 불린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 와
내무대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의 사실상 설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 등 다 헤아릴수가 없다.


1,894 청일전쟁 부터 1,910년 까지 조선 공사와 통감, 총독을 역임한자가 10명인데
이후 총리 가 된 자는 이토 히로부미, 하라 다카시, 데라우치 마사다케이고....


대신 은 이노우에 가오루, 고무라 주타로, 소네 아라스케이며 조선주둔군 사령관 으로
무력을 동원한자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이다.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당한게 아니고 조슈번(야마구치), 아니.... 야마구치현 전체도 아니고
그중에 "하기시" 라는 여기 인구 5만의 작은 마을 출신들에게 먹힌 것이라!


그러니까 여기 조슈번의 수도 하기에서 요시다 쇼인의 제자 들 중에 80%는 메이지유신
도중에 죽고 20% 가 살아남아 일본을 틀어쥐고 조선을 집어삼킨 것이다!


조슈번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쓰마 (가고시마) 의 가지야 마을 加治屋町 에서는
메이지유신 3걸중 사이고 다카모리 와 오쿠보 도시미치 가 태어났다.


그외에 러일전쟁시 육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 원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마도 해전의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과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가 탄생한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때 공신은 고향인 패현 출신이 소하, 조참, 노관, 하후영,
번쾌, 주발, 주창과 여후등이니 타관은 장량과 한신 정도이다.


또 우리나라 조선에서도 북촌 에서는 박규슈 를 위시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등이 살았으니 큰 인물 옆에 있으면 함께 크는 것일러나!

예로부터 "쑥도 삼밭에 가면 삼이 된다" 는 말이 공연한 것이 아니였나 보네?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선각자가 있었던 것이 일본의 행운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