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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어머니 이야기만 하게 되어서 아버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이야기를...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산 대한민국의 아버지 세대들의 이야기도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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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묻지마라 갑자생(甲子生)생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갑자생’
이라는 말은 갑자년인 1924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분들은 지금 살아계신다면 나이가 96세인 분들이다.
이 분들의 세대는 이차대전 때 일본의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청년기를 살아서 징병으로
징용으로 끌려가서 많이 죽거나 고생을 많이 했으며, 금방 6.25전쟁에 일어나는 바람에 전쟁에 참여하여
또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부상을 당하였던 세대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격변을 모두 다 몸소 겪은 세대들로 고생을 한 세대를 대표하는
‘묻지마라 갑자생이다’라는 말이 생겼다.
아버지는 지금 살아계신다면 97세이니 갑자생보다 한 해 먼저인 1923년 계해(癸亥)생으로
‘묻지마라 갑자생이다’라고 하는 세대이다.
징용은 가지 않았지만 6.25전쟁에는 참여를 하셨고 다행히 무사히 제대를 하셨다.
그 당시의 국민 학교를 나와서 열 몇 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할아버지가 결혼을 하라고 불러
들여서 20세 언저리에 결혼을 하고 시골에서 살았다.
결혼을 해서 징용으로 가지는 않았고 6.25만 참전을 하시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곧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난하다는 것은 아이들을 학교에
제대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집도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 당시의 시골의 남자들은 일 년 농사를 잘 지어 놓고 겨울이 되면 할 일이 없으니 노름들을 하였다.
요즈음 같으면 TV도 있고 시간을 보낼 거리들이 많았지만 70년도 초반까지는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어서, 겨울철이 되면 할 일이 없어서 한다는 것이 노름 곧 도박이었다.
맨 처음에는 먹는 것 내기를 하다가 돈을 걸고 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시골의
타자들(우리쪽에서는 그들을 '질난이'라고 불렀음)이 원정을 와서 순진한 사람들이 농사지은 벼를
내어다 팔게 하고 나중에는 농토도 팔게 만들었다.
그 때는 농촌의 많은 가정의 남편들이 그렇게 살면서 부인이나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었었고,
우리 아버지도 이런 삶을 살았으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되지 않는 농토를 그렇게 날려
버리게 되었다.
그 때쯤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서 서울로 가자고 하였던 때 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고향을
뜨지 못하고 고향에서 계속 살게 되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일어난 일들이지만 그렇게 팔려 버린 논밭을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는 많이
속이 상했을 것이니 남편이 얼마나 미웠을 것일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훗날 어머니가 우리에게 요즈음 같았다면 벌써 이혼을 몇 번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그러는
시대가 아니니 참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는데, 내가 어렸을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겨울의
모습은 늘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우리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가정이 안정이 되었는데 자식들이 성장을 하면서 외지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두 분만이 고향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두 분이서만 살게 되어서 2002년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까지 30여년 정도를
두 분이서 살았다.
여동생들이나 남자 막내 동생은 아버지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나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웠었는데 아들들은 다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비록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지만 다 탕진을 해 버리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좋을 리도 없었다.
우리 아버지의 상(像)이 그 당시를 살면서 노름깨나 했던 아버지들의 그 시대를 살던 아버지들의
모습일 것이다.
자식들이 다 품을 떠나고 둘이 사실 때는 시대가 바뀌어 노름도 같이 할 사람들이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살 나이도 지나서 두 분이서 그럭저럭 잘 지내시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60년대 말에 집을 떠나게 되면서 그 뒤로는 부모님과 같이 살 기회가
없었다.
아들이 네 명이 있었지만 다 외지에서 터를 잡다가 보니 어떤 아들과도 같이 살아보지 못했다.
본래 자식들은 어머니 편인데 젊었을 때 잘못한 내용도 있고 하다가 보니 자식들은 어머니와 더
가까웠고 아버지와는 거리가 좀 멀었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것도 섭섭하고 부인에게도 구박까지는 아니지만 기를 펴고 살지 못하는
것도 서운하겠지만 본인이 그렇게 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식들에게나 부인에게나 체면이 없는 입장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부 분이서 같이 사시는 동안은 많은 농사는 아니지만 농사를 지어서 자식들에게
보내주기고 하고 양봉을 하여서 꿀도 보내주기도 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하면서 사셨는데 어머니에게
많은 양보를 하면서 사셨다.
명절 때나 일이 있을 때는 자식들이 시골집으로 모이지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항상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 때는 시어머니들이 산후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여서, 농사를 짓다가도 며느리들이
아이를 낳으면 산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는데, 외손을 제외하고 손자 손녀가
12명으로 그 산바라지를 대부분 어머니가 하셨으니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면서 집을 지키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자식들이 부모님과 휴가를 가려고 해도 항상 어머니와 같이 가게 되고 아버지는 같이
하지 못했었는데, 소나 닭을 키우니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 항상 집을 지키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우리 집에 와서 잠을 자고 간 것이 일 때문이나 병원 때문에 올라온 것을 포함하여
몇 번 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의 집도 마찬가지로 어머니만 다니고 아버지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머니하고만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장인이 계시지 않고 장모님이 우리 집에서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 몇 년을 같이 계셔서, 여름휴가 때에는 항상 어머니를 오시라고 하여 서울에
사는 처남과 같이 장모님을 모시고 가는 바람에 아버지와는 한 번도 휴가를 같이 갈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여행을 한 것은 막내가 일본에서 유학을 할 때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부모님을
일본에 오시라고 하여 일본을 다녀 온 것과 막내가 결혼하기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를 한
번 다녀 온 것 말고는 자식들과 같이 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서는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는데 아버지는 건강이 타고 나서 그 나이에도
얼굴에 주름살 하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폴 뉴먼처럼 아주 잘 생겼고 시골에서 비록
농사를 지었지만 양복을 입고 서울에 결혼식 같은데 오시면 시골사람 같지를 않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머리도 빨리 세고 주름도 더 많아서 아버지가 나이가 두 살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누님하고 같이 다니는 줄 안다고 어머니가 불평을 하시곤 했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그러다가 8순을 한 달 앞둔 2002년 3월에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일을 보고 오다가 동네 앞 신작로에서
트럭과 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지금 가장 아쉽고 죄송한 일이 아버지와 여행 한 번을 가지 못했던 것이 되어 버렸다.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를 회상해 보면 젊었을 때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일 말고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았던 분이었다는 생각이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그런 성격이 약간 있어서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돌아가시기 십년 전 쯤에는 없어져서 집안일을 아주 잘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인정이 많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참 많아서 다른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물질적으로가 아닌 것으로...
그리고 경우도 바르고 욕심도 별로 없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툴 일도 없었고 체질적으로 술을 못
드시는 체질이서 주사도 없었으며 여자들에게도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그리고 손재주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간단한 가재도구도 잘 만들고 기계 같은 것도 잘 만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문제로 속을 썩이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노름해서 어머니를 고생시킨 것을 제외하면 만점은 아니더라도 아버지로서
80점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는데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고 것이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실까봐 많이 걱정을 하였는데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덜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님되시는 큰아버지가 큰 어머니 돌아가시고 20여년 가까이를 시골에서 혼자
살았는데, 아들이 같은 동네 살고 있어도 부자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서 한 집에 살지 않았다.
아들과 사이가 안 좋은 이유는 성격도 맞지 않지만 큰 아들이 외지에 나가 사는데 작을 아들 불러다
농사를 지어서 큰 아들만 챙기니 작은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쩌다 시골에 가 보면 끼니나 옷을 입는 것이나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우리 집에서나 아들이 돌보아
주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어서 빨래나 식사를 노인이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농사를 짓지 말고 큰 아들에게 가서 살라고 해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농사를 지었는데, 그렇게 사는 형을 보고, 아버지도 어머니보다 오래 산다면 저런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명절 때 우리를 만나면 ‘내가 먼저 죽어야 할 탠데’를 입에 달고 계셨다.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실 때 쯤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서 아마 더욱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사실 자식들 입장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배로 힘이 들게 된다.
자식 입장에서는 시골에 아버지가 혼자 계신다는 것도 상상을 할 수가 없고, 농사를 짓고 사시던
분이 낯선 곳에 와서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현실적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 80노인이라도 혼자 사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겠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어떻게든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살 때였으니..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아버지 장례를 모시고 난 뒤에 자식들끼리 아버지가 갑자기 그렇게
가신 것은 안 된 일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20년 이상을 혼자 사시는 것보다는
낮지 않겠나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제사 때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것과 어머니가 그리 오래 아프지 않고 적당히
아프다가 돌아가신 것이 자녀들에게 큰 짐을 덜어주고 가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것은 그리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아버지와 같이 여행 한 번을
가지 못한 것은 너무나 죄송한 일이고 후회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성화를 하여 소 키우던 것도 못 키우게 하고 닭도 기르지 못하게 하여 집을 비우고 자식들
집에 올 수도 있게 되었는데 자식들과 같이 여행을 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가 보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반대로 어머니는 10여년 정도를 휴가를 우리와 같이 다녔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막내 동생이 전국 구석구석을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서 어머니도 ‘너거 아부지 구경 못한 몫까지
내가 다 한다’ 고 말씀 하실 정도로 많이 다니셨다.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묻지마라 갑자생이다’라고 하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이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우리아버지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을 만큼 흔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리고...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자들은 부인보다 먼저 죽지 못하면
비참해지니 부인보다 오래 살려고 애쓰지는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프면서 오래 사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더 나쁜 케이스는 부인이 먼저 죽고 남편이 오래 사는
케이스가 자식들에게는 가장 골치 아픈 케이스이다.
첫댓글 아버지들은 젊었을 때 어떻게 살았던가를 불문하고 나이가 들면 가족으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 밖에 없으며
그나마 불쌍하게 생각하여 챙겨줄 사람은 부인 밖에 없는데 부인이 먼저 죽게 된다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슬픈 이야기임.
생노 병사~
마음데로 죽음은 어찌 할수 없는데
어떻게 순서를 정할수 있을까요?
남편이 먼저 죽어야 겠다는
희망사항은 되겠지만
고것은 조위에 계시는 분만
알겠지요
살면서 마음데로 할수 없는것
고거이 문제란 말입니다~ㅎㅎㅎ
남편들에게 당신이 먼저 죽는 것이 낫겠소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낫겠오 묻는다면...
내가 먼저 죽는다는 말은 안해도 당신이 더 오래 사는 것이 좋겠오 라고 하겠지요
나도 남편 중의 한 사람이니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픈 것을 치료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겠지만 오래 살려고 몸에 졿은 것 먹는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하시면 됩니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볼려고 그러냐면서
ㅎㅎ
생물학적으로 자연상태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먼저 죽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