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仁顯王后)는 조선 후기 제19대왕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89년 폐서인이 되었다가 1694년 복위되었고 1701년 병으로 사망 하였고 소생은 없다 왕비가 된 초기에 출궁된 궁인 장씨 (희빈 장씨)를 다시 불러들여 후덕한 왕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장씨가 숙종의 총애로 점점 교만해져 회초리로 다스린 적이 있는데 이것이 질투를 하였다는 빌미가 되었다 숙종은 경종이 태어난 후 인현왕후가 질투 때문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않았다며 폐서인하고 사가에 나가 살게 하였다 이때 장씨 측의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김춘택의 인현왕후 복위 논의가 갑술옥사로 이어지면서 숙종은 1694년(숙종 20) 4월 12일 삼불거(三不去)를 언급 하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당시 집권당인 소론의 반발이 심하여 6월에 다시 책비례를 올리고 왕비로 등극하였고 1700년(숙종 26년) 3월에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가 1701년 8월 14일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망하였다 이때에 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 희빈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희빈 장씨가 저주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되면서 장씨는 사약을 받았다 이 괴질은 훗날 통풍으로 추정된다 궁녀가 쓴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고 훗날 영조는 인현왕후의 덕을 기리고자 폐서인으로 머물렀던 사가에 감고당(感古堂)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감고당에는 훗날 5대 후손 명성황후가 잠시 거처하였다.시호는 효경숙성장순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懿烈貞穆仁顯王后)이고,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西五陵) 묘역 안에 있다.
(주) (정성이 지극하여 하늘도 갑동하였던가.)
비록 서인의 신분 이었지만 국모였던 인현왕후를 예우하고 모시기 위해 청암사에서는 새로 한옥을 지어 모셨는데 지금의 극락전 이다 청압사의 극락전은 여느 사찰 건물과 달리 사대부가의 집처럼 단청이 없는 운치 있는 건물로 지어졌다 그리고 경내에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을 지어 인현왕후의 복위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하였다 이곳 김천과 인현왕후의 외가가 위치한 상주는 한 생활권 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서도 외가의 도음을 받으며 생활할 수가 있었다 인현왕후는 외가 에서 보내준 시녀와 함께 수도산 자락 지금 이 길을 따라 수도암 청암사를 거닐며 기도와 산문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궁에서 페출된지 여러 해가 지나 죄인처럼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현왕후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게 느꺼졌다.마침내 인한왕후는 이렇게 괴로운 삶을 끝내리라 지결할 생각으로 독약을 앞에놓고 서럽게울다 지아비인 왕을 꿈에서라도 만나보고 죽으리라 '며 살풋 잠이 들었다.그 꿈속에서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천축산불영사" 에 속한 중입니다 괴로우시 더라도 3일만 더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꿈에서 깬 왕후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마음을 고처 3일을 더 기다렸다고 한다.
(주)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페위시킨 뒤 곧바로 후화하였지만 왕으로써 내린 처분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속종은 1694년 마음을 비꾸어 인현왕후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을내리고 이후 서궁으로 입거한 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인현왕후는 북위 후 청암사에 큰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복권되었다 '라는 서찰과 함께 수도산 일대를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왕후의 자리까지 올랐었던 장씨는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이 지냈던 옥쇄는 부수어졌으며 장희빈의 부모에게 작호까지 내렸던 교지는 불 속으로 던져져 없던 일이 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은 다시금 바뀌게 되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1681년 속종을 지아비로 섬기게 되었던 그 봄날처럼 인현왕후는 마침내 따스한 봄바람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