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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고려시대 '동경민란 (東京民亂)'에 대하여... 동경은 일본인들의 수도가 아닌가요?... 허나,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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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고려 명종 20) 이래 약 15년간에 걸쳐 경상도지방에서 여러 차례 일어난 민란. 이 난은 전후 6·7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중에는 신라 부흥을 내세워 민심을 지배하고자 한 것도 있었으나, 이는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당시 중앙의 부패와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에 편승한 초적(草賊)의 난이 대부분이었다. 제1차는 1190년(명종 20) 1월 동경에서 일어난 것으로, 그해 2월 안찰부사(按擦副使) 주유저가 반란군을 치려다 패하여 중앙에서 남로착적사(南路捉賊使)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제2차는 1193년(명종 23) 동경 중심의 남적봉기(南賊蜂起)의 선구가 되었다. 2차의 난에서는 운문(雲門;경북 청도)의 적(賊) 김사미(金沙彌;또는 金三)와 초전(草田;울산)의 적 효심(孝心)의 무리가 유명하였다. 이 난은 그 세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왕은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과 이지순(李至純;李義旼의 아들)·이공순(李公純)·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 등을 보내어 반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지순이 적과 내통하여 관군이 자주 패하므로 전존걸은 자살하고, 조정에서는 다시 상장군(上將軍)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대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道知兵馬使)로 삼아 토벌 작전을 강화한 결과 두목 김사미가 투항, 참형되었고, 효심이 잡힘으로써 일단 평정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최충헌(崔忠獻)이 명종(明宗)을 폐하고 신종(神宗)을 세운 뒤로 계속되었다. 즉 1199년(신종 2) 명주(溟州;강릉)의 적이 일어나자 동경의 민란이 다시 일어 합세하였고, 1200년(신종 3)에는 밀성(密城;밀양) 관노(官奴)의 난, 경주 이의민(李義旼)의 족당(族黨)과 주리(州吏)와의 각투(角鬪)사건, 금주(金州;김해) 잡족(雜族)의 난과 1202년(신종 5) 탐라(耽羅;제주)반란사전,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의 난 등이 속출하였다. 그 중 진주민란(晉州民亂)과 동경(경주) 중심의 민란세력이 컸는데, 동경 중심의 민란은 이비(利備)를 도령(都領;우두머리)으로 삼은 일당과 운문의 발좌를 두목으로 한 일당이 강하였다. 이들이 신라 부흥을 표방하여 각지에 격문을 돌려 주·군(州郡)을 약탈하자 최충헌은 대장군 김척후를 총지휘관인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 대장군 최광의(崔匡義)를 좌도사(左道使), 강순의(康純義)를 우도사(右道使)로 임명하여 토벌케 하였다. 이에 동경의 적 이비는 운문·울진·초전의 적을 규합하여 3군을 편성, 자신을 정국병마(正國兵馬)라 하며 주·군을 회유 또는 위협하였다. 민란세력을 두려워하는 김척후가 전투를 하지 않자 정부는 1203년(신종 6) 김척후 대신 대장군 정언진(丁彦眞)을 중도사(中道使)로 파견했다. 정언진은 이비를 체포하고 발좌를 포살하여 난을 평정했다. 1204년(신종 7)에 정부는 동경을 경주로 개칭, 유수(留守)를 지사(知事)로 강등시켰으며, 토벌에 공을 세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 고쳤다. 그뒤 1233년(고종 20) 몽골병(兵)의 침입으로 국정(國情)이 문란한 틈을 타서 각지의 초적과 함께 최산(崔山)·이유(李儒) 등이 난을 일으켰으나 상장군 이자성(李子晟)에게 평정되었다. <참고: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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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구(倭寇) -> Japan (동남아 미개-야만인)
또, 다른 왜구(矮軀): 키가 작은 체구. 【비】단구(短軀).
즉, 전자는 중국(Korea)에서 일본인(Chinese)들을 낮춰 부른 말이고, 후자야마로, 동남아시아 소인국의 왜적(Japanese)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즉, 임진왜란은 '왜노의 세력'이 '왜구의 세력'을 끌어들여 '고려의 세력'을 치기 위한 전쟁이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전수받은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넘쳐나는 인구를 바탕으로 고려를 배신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China의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여, 전세계 모든 국가들의 기술을 아무런 로열티도 지불하지 않고 도용하여, 자신들의 제품으로 탈바꿈 시켜 전세계에 불법 유통시키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런, '인구수'를 바탕으로 한 '배신/배반의 정당성'이 이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삶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바로 '고려에 대한 배신'으로 부터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분석하는 Chinese의 집단성은 상류층의 집단성이라기 보다는, 하류층의 집단성입니다. 즉, 고려의 하층민 집단인 '향, 소, 부곡'에서 함께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내면서 생겨난 동류의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사회적 질서의 차이로 스스로를 고려인과 다른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집단에서 벋어나 '고려인의 그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대한 '선망'과 '질투심'이 동시에 생겨나게 되었으며, 고려를 동경하면서, 자신들을 없신 여기는 고려에 어쩔 수 없이 다가설 수 없는 그들의 '한계'가 현재의 Chinese 문화를 만든 배경이 아닐까 추정해 보는 바입니다...
저의 어린시절에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가장 Chinese적이라는 '주윤발'이 주연하였고, 저도 감명깊게 본 영화입니다. 또한, Chinese들도 Chinese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냈다고 호평을 많이 하였었지요... 이 영화의 주요 연결고리가 '배반의 정서'입니다... 본인의 나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배반한 인물의 고뇌와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배반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의 정서의 근원에 Korea와 China의 관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현상태선생님이 '황희'의 글을 통해서 언급하려 했던, '진정한 용기'란 '영웅본색'의 인물처럼 본인들의 배반의 역사를 그대로 만인들앞에 그대로 밝혀, 다른이들의 용서와 격려를 받은 후, 모든 고려인들과 함께, 새로운 고려인의 '웅대한' 역사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우리모두' 소설을 '영화'로 진보적으로 발전시켜, '영웅본색'에 버금가는 '감동적인 대조선-대고려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봅시다...
즉, 이태수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고려인과 대륙인의 인종적 구분이 크지 않고 중요성 없다'는 말씀은 납득할 만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익에 따른 배반의 행위'에 따라서 서로 국가가 달라져 있고, 문화도 달라져 있습니다. 이 '배반의 역사'에서 만약 그들이 Korea의 역사를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배반의 과오'를 전세계에 사죄하는 것이 '절대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며, 그 일이 매듭지어진 이후에야, 자연스럽게 반도와 대륙이 하나의 Korea로 거듭날 수 있는 '역사적 단계'가 오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야만인'의 후예인 'Japanese'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이 것이 저의 간략한 지론입니다.... 그러므로, 대륙인의 후예들인 '대한민국의 화교'들이 나서서 진정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그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진정한 '대륙조선의 진실'의 규명에 앞장서 주실 것을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그래야만 '대통합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야만인'들의 후예인 'Japanese'가 주요한 고려 대상이 아님을 또한 언급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