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
이종분
마당에 분꽃을 심자고 하니 해바라기를 심는다
어제는 벚나무 심는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목련을 심었다
내가 심어놓은 상추는 뽑아 버리고 고추를 심었다
살다 살다 별별 남자를 다 본다
어디 늙으면 보자 했더니
이제는 나도 늙어 네 맘대로 해봐라
나도 체념만 잔뜩 심었다
----이종분 시집, {내 인생의 스케치}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전칭), ‘그는 시인이다’라는 말은 그의 특별한 신분을 말하는 것이고(특칭), ‘그는 이종분 시인이다’라는 말은 시인 이종분을 말하는 것이다(단칭).
‘부부’라는 명칭은 전칭이 되고 부부 전체를 부르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이 ‘부부’는 동일성이 아닌 모순성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란 해와 달의 관계와도 같고, 실물과 그림자의 관계와도 같다. 남편이 조명을 받을 때는 아내의 얼굴은 필요가 없고, 아내가 조명을 받을 때에도 남편의 얼굴은 필요가 없다. 어쩌다가 부부가 얼굴을 드러내고 일심동체, 즉, 운명공동체의 탈을 쓰고 나타났을 때에도, 그 이질적인 결합은 언제, 어느 때나 따로 따로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당에 분꽃을 심자고 하면 해바라기를 심고, 어제는 벚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오늘은 목련을 심는다. 내가 심어놓은 상추는 뽑아 버리고 고추를 심고, “살다 살다” 보니 “별별 남자를 다 본다.” “어디 늙으면 보자 했더니/ 이제는 나도 늙어 네 맘대로 해봐라”라고 자포자기를 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부부라는 운명공동체의 탈을 쓰고,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고 자포자기와 절망만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부부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개성과 성격 차이로 이루어진 결합체이며, 이 화학적 결합은 그 언어적인 결합(일심동체)의 껍질을 벗겨내면 언제, 어느 때나 ‘남남의 존재’로 분리된다.
‘나’는 단칭 존재이고, ‘나’는 특칭 존재이며, ‘부부’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된 전칭 존재이다.
부부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존재이지만, 그러나 언제, 어느 때나 ‘남남’으로 분리될 아주 모순적이고 위험한 존재이다.
[천생연분]은 인간, 혹은 남녀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삶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