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 산시성 린퉁현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으로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가>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70여 만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발굴로 밝혀진 바는 없다.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며, 현재는 지상에서는 능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진시황제는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영정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웅대하여 왕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국가를 하나씩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30년,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공격하고 곧이어 조, 위, 초, 연나라를 정복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는 막강한 국력을 갖춘 제나라를 점령하면서 불과 9년 만에 주변의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다. 영정이 주변 나라를 침략하는 데 동원한 군사는 백만 명이 넘었다. 또 장군과 지휘자들이 사용했던 말도 만 필이나 되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백만 명의 군인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2200여 년 전에 군사 백만 명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영정의 군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기록에 의하면 단 한 차례 전투에서 적군을 4만 명이나 몰살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천하를 통일한 영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 칭호가 필요했다. 작은 진나라 왕에서 통일 국가의 왕이 된 영정은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새로운 대국의 왕을 의미하는 진시황제로 부르도록 했다. 오늘날 중국의 영어 명칭인 차이나(China)도, 바로 진(Chin)에서 비롯되었다. 통일 국가를 완성한 진시황제는 서둘러 새로운 정책을 세웠다. 진시황제는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세우는 데 집중했다. 전국을 군현으로 개편하고 자신의 지시가 빠른 시간에 전국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행정 조직도 개편했다. 또 관료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이전에 사용하던 여러 문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비교적 단순한 예서체만 사용하도록 했다. 문자를 통일하여 많은 백성들이 보다 쉽게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만든 동시에 중앙 정부의 뜻을 곧장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다. 그리고 복잡했던 도량형을 표준화시키고, 마차 바퀴의 모양도 통일시켰다. 문자와 도량형의 표준화는 진나라는 물론이고 이후 중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진시황제는 정책 개편에 이어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만리장성 건설을 시작으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관개 시설을 고치고, 변방과 수도 시안(당시 장안)을 연결하는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다. 또한 황제가 살 아방궁과 죽은 뒤 묻힐 묘지까지 공사를 했다. 진시황제는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안식처를 짓기 시작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를 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인공으로 만든 묘지라기보다 산처럼 보인다. 한 면이 400m가 넘고 높이가 76m에 이르러,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한 세기 뒤에 기록된 책에 따르면, 무덤 안에 ‘아름다운 가재도구와 보석, 진귀한 물건뿐 아니라 궁궐과 탑, 관청 건물까지 세워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0년 넘게 전해지던 소설 같은 이야기는 1932년 묘지 주변에서 일하던 농부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농부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같은 모양의 인형 4개가 잇따라 발견되었어다. 이후 40여 년 동안은 특별히 발견된 것이 없다가 다시 관심이 집중된 것은 1974년이었다.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흙을 빚어서 만든 170~190cm 정도 크기의 인형을 발견했다. 과거에 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로 진시황제가 죽기 전에 미리 지하에 묻어 둔 것이다. 이후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동시에 발굴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 쏠리게 되었다.
박물관
병마용갱 서쪽에는 진시황제 때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병마용갱 주변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지요. 당시 사용했던 거울과 건축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 등의 생활용품,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 서예, 마차까지 무척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1980년 진시황제 무덤 서쪽 20m 지점에서 발굴된 두 대의 마차다. 1호와 2호 마차로 불리는데, 각각 4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순회할 때 탔던 마차를 모델로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실물 크기의 2분의 1로 축소해서 만든 것이다. 청동 위에 금과 은으로 도금하고 그 사이사이에 색을 칠해 놓은 채색 마차로, 최고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말은 높이 90cm, 길이 110cm에 무게가 170~190kg에 달하며, 말 4마리가 끌고 있는 청동 마차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무겁고, 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작은 1호 마차의 경우 자그마치 3064개의 부품을 연결하여 만들었고 2호 마차는 이보다 더 많은 3462개의 부품을 사용했다. 마차 하나를 만드는 데 이토록 많은 부품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이 마차들의 무게는 자그마치 1000kg이 넘는다.
진시황제가 살았던 진나라의 수도 시안에는 병마용갱 외에도 흥미로운 유적지가 많다. 아직 발굴을 시작하지도 못한 진시황제의 능을 비롯하여 거대한 성곽 유적지와 당나라 때 건설한 양귀비의 흔적으로 가득한 화청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존해 놓은 쯔언사 다옌탑 등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최고의 문화 도시 서안은 중국 고대 문명을 알 수 있는 문화의 보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