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대엔진이라는 곳에서 근무를 했다. 말 그대로 배의 엔진을 만드는 공장이다. 그 무렵은 앞서 말한대로 용접기술로 제품의 껍데기 만들기도 벅찼던 때인데 배의 핵심이라 할 엔진을 만든다 하니 나로서는 최신식 분야로 여겨져 주저없이 자원을 한 것이다. 대형선박엔진은 그 크기가 건물로 쳐 3층 정도 높이에 해당한다.20만톤이라는 배의 크기에 꽁무니에 달린 배의 스크류 그리고 그것에 연결한 축만 상상해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긴 환봉을 가공하는 선반의 크기를 상상해 보라. 길이는 족히 11미터가 넘으며 봉의 원형 또한 1미터가 넘는다. 이 쇠봉을 꽉 물리고 빙글빙글 돌리며 큰 바이트로 동그랗게 깎아내야 한다면 사용할 공작기계는 어느 모습일까. 당시 미제의 신시내티 공작기계나 일본제는 알아 주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큰 대포 구멍은 바로 그런 공작기계가 쇠봉의 안으로 파고들며 가공을 한 것이다. 거기에 내부 안쪽에 테이퍼를 주어 대포알이 탄력을 받고 쑝하고 날아가도록 만든 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155밀리 곡사포 자주포 견인포 등등의 것들이다.
그러기에 중공업은 바로 군수산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끔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높은 분들이 찾아와 상호 관심사를 논의 하였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망위산업을 알아보고 수주를 하기위해서 온다고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기계나 제작물에 있어서 껍데기는 덩치는 크지만 금액으로 쳐 별 큰 부분을 차지 하지 않는다. 정작 핵심은 바로 동력전달 하는 장치에 있다. 당시는 어느 제품이든 특히 중공업분야에는 알맹이는 쏙 빼고 빈 껍데기만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우리가 배 엔진을 만든다고 하여도 누가 우리를 신뢰할까. 제품은 내구년수라는 게 있다. 제품 수명이 어느 정도 인지가 바로 신뢰의 기본요건인데 시제품을 이제 겨우 만든 처지로서는 실증은커녕 성능 발휘여부 조차도 장담을 할 수는 없다. 바삐 기술을 터득하고 우리 것으로 하기에는 어쩔 수없이 외국 유명 메이커들과 비싼 값을 주고 기술제휴를 해야 한다. 그들의 노하우를 우리가 사는 것이다. 당시 세계적 업체는 MANN B&W와 SULZER란 회사가 있었다.
그들과 라이센스를 맺었지만 쉽게 노하우를 전수해 줄 리는 없다. 당시 우리회사의 사장님은 김영주라는 분으로 그는 정회장의 여동생 남편이었다. 정회장이 현대건설 초창기 고려대학교를 신축건물을 지을 때 작업반장으로 데리고 다녔던 인물이다. 그는 결재내용에 영어나 한자가 들어가면 그냥 던저 버렸다고 소문이 난 사람인데 바늘 끝 씨알도 안먹힐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포니 2가 막나오던 때인데 그는 외제차를 안타고 그 차만 몰고 다녔다.
그는 비록 무식하였지만 경영철학 만큼은 확고한 사람이었다. 선박엔진 국산화율 30%를 그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매일 기름 짜듯 볶아댔다. 기술습득을 앞당겨야 하는 사명감에 충실한 우리는 늘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중공업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비밀 해독실 같은 건물이 하나 있다. 슈퍼바이저가 오면 시내 오션 호텔을 잡아주고 예쁜 여자들을 소개해 실컷 놀도록 하고 그들의 서류 가방을 낱낱이 훑기도 했다
요즘은 별 것도 아닌데 당시에 청색도면을 복사기에 넣으면 트레이싱 원도 도면으로 복사되는 장비가 그곳에 있었다. 트레이싱 원도는 원본과도 같아 다시 청색도면으로 수십 장 찍는 활용이 가능하고 도면 변경도 가능하다. 배 엔진에 국산화를 높인 주역은 우리뿐 아니라 오션호텔에 미스 정 그리고 비밀해독실등등 숨은 공로자가 제법 많다. 그렇게 해서 만든 배 엔진은 울산 앞바다에서 성능발휘 테스트를 한 달 가량 실시하게 되는 데 첫 숱가락에 배 부를 수는 없었다.
국산화율이 불과 30%에 불과한 데 성능도 떨어지고 life time 이라는 것도 큰 변수라 그 누구도 선뜻 우리 제품을 장착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다. 수주조건에 '단 선박엔진은 누구 것으로 한다.' 고 명시한 계약서가 당시는 흔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외자를 들여 비싼 장비를 들여다 놓은 탓에 장비의 감가상각비는 실로 엄청 났는데 묵은 때가 앉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시기가 그 무렵이었다.
예를 들어 엔진의 몸체를 가공하자고 들여 놓은 Planer millling Machine의 경우 한 시간 당 그때 돈 감가상각비가 1,500원이었다. 그렇다면 정지된 상태로 하루 지나면 3만원도 넘는 마이너스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김사장이 득달을 했지만 선박엔진 적자는 늘어만 갔다. 선박엔진을 만들려면 기계의 정수라고 할 4가지 유형의 공장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3층 건물만한 쇳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주물공장이 들어가고 배의 스크류를 잡는 단단한 키와 샤프트 소재를 다루는 단조공장도 있어야 하며 이 소재들을 가공하는 기계 가공공장 그리고 이 부품들을 조립하는 조립공장도 당연 필요로 한다. 덩치가 큰 제품을 다룰 공장 넷을 상상해 보시라. 엄청난 규모에 정밀도 또한 상당히 높았기때문에 당시 이런 장비를 갖춘 곳은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두산엔진)하고 현대밖에는 없었다. 지금 한국중공업은 이를 활용해 원자력 발전설비를 제작하고도 있다.
나는 지금도 정회장에게 찬사를 보낸다. 단순히 선박 껍데기만 수주할 생각만 했다면 이런 공장들은 굳이 필요 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조선 제1위 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군수산업이나 원자력 분야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현대의 모기업이라고 할 현대건설에서 번 돈을 아낌없이 중공업에 쏟아넣은 왕회장이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해마다 적자는 늘고 막막하기만 한 대형선박엔진 사업인데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현대중공업 엔진사업은 그야말로 고속 쾌속 행진으로 거듭 났다. 지금은 자체개발한 힘센 엔진, 고유 브랜드를 갖고 있다. 2001년 처음 4대가 생산됐던 '힘센엔진'은 2004년 123대, 2006년 422대 등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과거 세계 선박엔진기술은 덴마크의 만B&W, 독일의 슐츠 등 유럽업체들이 장악하였고 알다시피 우리가 기술제휴를 하였고 일본 업체들도 기술을 빌렸었다.
그런데 중형엔진 세계시장을 집중공략해 2006년 52%의 시장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2009년도에는 74%를 독식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중공업(내가 나온 후 현대엔진을 합병)은 디젤 뿐 아니라 가스를 연료로 하는 엔진을 개발했고, 선박뿐 아니라 육상 발전용 엔진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생산시설도 늘렸다. 현대중공업은 선박엔진 전체 시장에서 35%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데 힘센엔진의 호조로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제 2위는 어디일까. 다들 놀라지 마시라. 바로 두산엔진이다. 현재 25%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두산엔진은 1위 탈환(현대중공업)을 목표로 다양한 변신을 모색 중에 있다.두산엔진의 선박용 대형 저속 디젤엔진은 2002년 산업자원부가 지정한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국내 조선소를 포함, 전 세계 약 45개 조선소에 엔진을 납품하며 중국시장의 경우 외국계 업체 중 시장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세계 최대 선주사인 AP몰러그룹 산하 조선소들과 장기 공급계약을 하며 세계시장을 누비고 있다. 요즘 조선산업이 불황이라 그 여파로 구조조정을 하고는 있지만 내가 근무하던 1981년도에 바한다면 30년 만에 그야말로 괄목한 성장을 한 것이다. 사실 2천년 들어서 자체 브랜드를 갖은 것이니 내가 나온 후 20년 정도는 남의 이름의 엔진을 제작하였다는 말도 된다. 기계를 전공한 사람으로 실로 감개무량한 대한민국이 아닐 수 없다.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시장확대를 통하여 선박엔진을 선도하는 글로벌 리더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지켜줄 것을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중공업이 가져다 준 파급효과는 여타 업종과는 규모나 기술력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참 당시 그렇다면 비싼 장비를 놀리지 않고 적자를 메꾸는 방법은 없었을까. 후후!! 적자를 보고 가만 놔둘 김사장이나 정회장이 절대 아니다. 내가 한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그 이야기를 하자니 나름 신바람이 난다. 지금은 감방에 잡혀 들어가고도 남는 이야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