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활 체험 : 답은 “예”입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을 이루는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천주교의 저 큰 교리의 성전이 세워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나는 믿고 있고, 또 이것이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너무도 크고 감격스러우며, 또 신비 중의 신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본다. “너는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답은 “예”다. ‘예’하고도 나의 온 존재와 맞바꿀 각오로 (속된 말로, 나의 온 존재를 걸어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다. 나 같은 죄인이, 노상 뉘우침 없이 죄를 지어 쌓기만 하면서, 부활에 대한 믿음 하나에만 매달려 구원을 받으려는 속셈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그래서 도가 지나치다 싶으나, 그래도 나는 이 점에 대해서만은 남이나 나 자신의 눈치 볼 것 없이, 어린아이처럼 되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100퍼센트 의심의 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에서 믿는다.’는 답 이외에 다른 답은 없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몸’은 없고 ‘얼’만 남아서 돌아다니시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라, 구은 생선도 잡수시고, 땅에 발자국도 남기시고, 체중계에 올라간다면 체중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그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성경을 보면 “보지 않고 믿는 이는 복되다.”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어쩌다가 이 복된 자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이것 역시 하느님의 큰 은총이다. 이 점을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믿나이다
부활 사건 말고도 예수님은 무척 많은 기적을 행하셨거나, 기적의 주인공이 되셨다. 원죄 없이 잉태 되심,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죽은 라자로를 살리심, 물 위를 걸으심, 몇천 명을 먹일 수 있을 만큼 빵 몇 조각을 불어나게 하심, 베드로의 부정(否定)을 미리 보심 등등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된 연후에 이러한 기적을 믿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울 리는 없다. 나는 이러한 기적도 다 어떤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이런저런 합리적인(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매우 그럴듯한 설명이 많다. 한 예가 여러 군중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거동에 감화되어 여러 사람이 이기심을 버리고, 숨기고 있던 음식을 꺼내서 모두 나누어 먹은 결과가 그 ‘기적’이라는 것이다. 매우 교묘한 설명인데, 잘 살펴보면 이런 풀이는 예수님의 인성(人性)만 인정했지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인정하지 않으려는(믿기 어렵다는) 심리가 숨어있다. ‘예수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요술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심리가 깔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적의 원형은 따지고 보면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이런 식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남녀 인간도 만드셨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가 갈수록 엄청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은하를 포함한, 눈으로 보이는 우주 만물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있는 이 우주라는 것이 갈수록 더 커져가기만 한다. 은하 하나에 별이 약 천억 개쯤 있다고 한다. 그러한 은하가 또 천억 개쯤 있는 것이 이 우주다. 아무리 하느님이시라지만, 이렇게 큰 우주를 창조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물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느님께서 하느님 행세를 하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이 우주 밖에 이러한 우주가 또 10의 500승만큼 있다는 물리학적 계산이 나온다는 기사를 읽었다. 10의 500승이면 10에 0이 500개 붙어있는 숫자이다. 아무리 하느님이시라지만, 이건 너무 규모가 크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쓸데없는 생각이다. 10의 500승이 아니라 그것을 또 500승 해도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하느님은 문자 그대로 무한하신 존재로, 그 권능 또한 무한인 것이다. 과학자들이 이 우주의 규모를 넓히면 넓힐수록 하느님의 영광도 그것에 비례해서 커질 뿐이다. 예수님의 기적도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원리(기적)의 일환일 뿐이라고 보는 데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내가 겪은 부활 체험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의 엄연한 사건(사실)이라는 점을 믿음으로 확실히 다져놓은 다음에는, 이 ‘부활’이라는 명제를 하나의 비유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무한대로 열린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 인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교섭하는 영역은 바로 여기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만사에서 가장 슬픈 것, 가장 절망적인 것, 가장 무서운 것, 가장 괴로운 것,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이런 것들의 총결집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극복하고 이기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죽음을 날 때부터 지니고 사는 인간으로서는, 예수님께서 이룩하신 ‘부활’ 이상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 있을 수 없다. 죽었다가 생명을 되찾는 부활이 갖는 비유적인 또는 상징적인 뜻이 얼마나 큰 것일까!
아마도 많은 경우의 부활 체험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또는 비유적인 뜻의 범위 안에서의 체험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러나 체험의 내용이 짙고 절실하면 그것은 비유적인 뜻에서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 체험에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부활 체험과 관련하여 두 경우를 떠올린다.
생활에서 겪는 죽음과 부활
그 첫 번째로 나는 잠을 통해서 부활을 생각한다(더러는 체험한다.). 우리가 매일 밤잠에 들고 다음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평생을 통해서 겪는 ‘죽음과 부활의 연습’이 아닐까.
하루의 노고에 지칠 대로 지쳐, 마치 토막나무 쓰러지듯 쓰러져서 모든 것을 잊고 잠에 든다. 이 잠의 감미로움. 잠은 치유이자 정화이며 평화다. 이것이 죽음의 연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음날 아침잠에서 눈을 비비며 깨어보면, 세상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답고 신선하다. (다른 정서를 갖게 되어도 그것은 그것대로 뜻있는 체험이다.) 어젯밤 시체나 다름없었던 나는 이제 기적처럼 생기를 되찾는다. 나의 오관은 바깥 세상에 화답하며 환호하고 나의 영혼은 살아있음의 기쁨으로 설렌다. 이것이 정녕 부활의 연습이자 체험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다만 우리의 일상과 너무 밀착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느끼지 못할 따름이 아닌가.
성경 말씀을 통한 부활 체험
나의 부활 체험, 두 번째의 경우를 말씀드리려면 약간의 어쭙잖은 이론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천주교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닮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좋다. 예수님을 완벽하게 닮으면 그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며 이것은 또한 신앙인의 이상(理想)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은 다 이런 경지에 닿은 분들이다.
만약에 내가 잠시만이라도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면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정말, 위대한 나의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이시며 스승이시며 형님이시며 또 때에 따라서는 벗도 되어주시는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있다면, 그런 때에는 예수님의 체험이 곧 나의 체험이요, 나의 체험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곧 예수님의 체험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도 곧 나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유치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느끼며 되도록 예수님 가까이에 가려고 한다.
1981년 영국에 갔을 때, 낯선 나라에서의 외로움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나는 자나깨나 ‘성경’에 묻혀서 살았다. 예수님께서 수난에 이어 부활하시고, 방랑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 때 없이 나타나시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나는 너무 반갑고 기쁘고 감사해서 많은 눈물을 쏟았다. (그때 나에게는 그런 광경이 정말 눈앞에서 전개되는 현실로 느껴졌다.) 특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머물러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시는 데에 이르러서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것이 나의 부활 체험이라면 체험이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그러한 짙은 감격을 다시 겪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계시다는 실감만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사목, 2004년 4월호, 성찬경(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