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탈해 왕은 고구려주몽과 낙랑국 공주 사이에서 낳은 작태자
다파나국은 일본열도에 존재한 또 하나의 신라
▲ 정재수 역사 작가.
신라 석씨왕조 시조 석탈해의 출신지가 문헌기록마다 다르다. 『삼국사기』는 다파나(多婆那)국이고 『삼국유사』는 용성(龍城)국이다. 또한 두 나라의 위치는 ‘왜국의 동북쪽 1천리에 있다[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고 소개한다. 일견 다파나국과 용성국은 동일한 나라처럼 보이나 전혀 다르다. 용성국은 대동강 하류인 평안남도 남포 용강이다. 다파나국은 어디일까?
다파나국의 시조, 고구려 개국공신 협보
‘왜국의 동북쪽 1천리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위치를 찾아본다. 왜국은 지금의 일본 규슈섬을 가리킨다. 일본의 고대 소국 중에 단파(丹波-탄바)국이 있다. 지금의 혼슈섬 교토(京都)부와 효고(兵庫)현, 오사카(大阪)부 일부를 포함한다. 다파나는 일본말로 타바나(タバナ)이니 탄바와 잘 어울린다. 또한 거리상으로도 규슈에서 혼슈 탄바까지는 동북쪽으로 1천리에 해당한다. 위치만 고려한다면 다파나국이 일본 고대 소국 단파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래 다파나국(단파국)은 고구려 개국공신 협보(陜父)가 세운 일본열도의 고대 소국이다. 『삼국사기』는 협보가 고구려 2대 유리왕에게 직언을 하여 파직되며 남한(南韓)으로 내려간 사실만 전한다[王聞之震怒罷陜父職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그러나 『태백일사』(이맥 찬술)는 추가해 협보가 고구려에서 쫓겨나 일본열도 건너가 다파라(多婆羅)국의 시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陜父奔南韓 居馬韓山中 … 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
석탈해는 고구려 추모왕의 아들 작태자
▲ 일본 고대 소국 다파나국 위치[지도=필자 제공]
『유기추모경』(남당필사본)에 석탈해와 협보의 관계가 나온다. ‘동명19년(기원전 19년) 임인 2월, 작부인이 작태자를 낳았고, 협보의 처 시화가 젖을 먹었다[東明十九年 壬寅 二月 鵲夫人生鵲太子 陜父妻柴花乳之].’
낙랑왕(요녕성 요양) 시길(柴吉)에게는 두 딸이 있다. 한 사람은 고구려 추모왕의 부인(후궁)이 된 시작(柴鵲)이고, 또 한 사람은 협보의 부인이 된 시화(柴花)이다. 추모왕의 시작부인이 낳은 아들 작(鵲)태자가 석탈해이다. 석탈해는 비록 추모왕의 정실왕후가 아닌 후궁의 소생이지만 염연히 추모왕의 아들이다. 『고구려사략』은 신라를 가리켜 ‘작태자의 후손[鵲太子之裔]’으로 적고 있다. 신라 석씨왕조 시조가 된 석탈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또한 협보는 석탈해의 이모부이다. 협보와 석탈해는 혈연관계이다.
그렇다면 석탈해가 협보가 세운 다파나국 출신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혈연적인 관계 때문일까? 석씨왕조의 시작은 9대 벌휴왕부터다. 그런데 벌휴왕의 아버지를 두고 기록마다 다소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는 석탈해의 손자 구추(仇鄒)이고, 『고구려사략』은 협보의 손자 구추이다. 구추는 같으나 『삼국사기』는 석탈해계통이고 『고구려사략』은 협보계통이다. 그런데 『신라사초』는 벌휴왕의 아버지를 석탈해의 증손자 석추(昔鄒)로 설명한다. 석추는 구추의 아들이다. 세 기록을 겹쳐보면 일견 구추와 석추는 동일인물로 보이나 한 세대 차이가 난다. 더구나 구추가 석탈해계통인지 아니면 협보계통인지조차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느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까? 석탈해는 이모부 협보가 고구려에서 쫓겨날 때 동행한다. 협보가 일본열도에 도착하여 다파나국을 세우면서 석탈해는 협보의 양자로 입적된다. 그래서 석탈해의 직계아들 구추는 협보의 계보상 손자가 된다. 구추의 아들 석추는 당연히 석탈해계통(증손자)이다. 석탈해는 협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협보가 다파나국의 시조가 되면서 석탈해 또한 다파나국 출신이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추모왕의 아들인 석탈해는 처음 용성국(평남 남포 용강)에 머물다가 협보가 고구려에서 쫓겨날 때 이모부 협보를 따라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협보가 다파나국을 세우자 석탈해는 협보의 양자에 입적되며 다시금 한반도로 건너와 금관가라(경남 김해) 정착을 시도하다 실패해 경주로 들어가 사로국을 건국하며 신라 석씨왕조의 시조가 된다.
다파나국과 신라는 특수관계
▲ 석탈해와 후손 계보도. [자료=필자 제공]
다파나국과 신라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신라사초』 파사이사금 10년(135년) 9월 기록이다. ‘다파나왕이 죽어 후계자가 없자 다파나왕비가 삼니금을 봉하여 남편 삼기를 청하였다. 혜후가 이를 허락하고 수로대사에게 명하여 100척의 배를 치장해 보냈다[多波那君薨而無嗣 其妃請奉彡尼今爲夫 惠后許之命水路大師裝船百艘而送之].’ 5대 파사왕때 신라 삼니금이 다파나국의 왕이 된 사건으로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혜후(惠后)는 파사왕의 왕비인 석탈해의 딸 아혜(阿惠)이다. 삼니금(彡尼今)은 작은(小) 이사금(니금)이다. 이름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석탈해의 혈통으로 추정된다.
다파나국은 시조 협보의 직계 왕통이 끊기자 당시 왕비가 신라의 삼니금을 딱 꼬집어 남편왕으로 삼아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석탈해의 딸인 파사왕의 왕비 아혜는 같은 혈통의 삼니금을 다파나왕으로 보낸다. 특히 100척의 배를 치장해 보낸 내용은 당시 신라가 다파나국에 대해 상당한 정성을 들였다는 사실을 부연한다.
결과적으로 다파나국은 시조 협보의 혈통이 끊기자 석탈해 혈통으로 다파나국의 왕위를 이어간다. 다파나국은 신라왕실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특수관계의 나라인 것이다.
다파나국은 일본열도에 존재한 또 하나의 신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