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종교인 모임을 하기 위해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교무님, 주교님, 교령님이 모두 정토사회문화회관에 도착하자 다 함께 식사하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평화재단 회의실로 자리를 이동하여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지난 한 달 동안 튀르키예-시리아 접경 지역과 부탄을 방문한 모습을 함께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고 나서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새마을 운동을 새롭게 하고 계시군요.”
스님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갖고 있는 여유 자금을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에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될 거예요.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한류는 엄밀히 얘기하면 소비문화이지 않습니까.”
이어서 기후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교령님이 질문했습니다.
“부탄 사람들이나 동티모르 사람들도 기후 위기를 화두로 느끼고 있습니까?”
“일반 국민들은 많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요. 그러나 실제로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설산의 빙하가 녹아서 강물의 양이 줄어드니까 수력 발전량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기 때 비가 많이 오면 전기를 인도에 수출하는데, 건기 때는 오히려 인도에서 전기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전기를 판매할 때는 100원 받고 파는데, 전기를 수입할 때는 200원 주고 수입해야 하는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기 수출이 전혀 수입원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동티모르는 국가 전체가 식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후 위기로 비가 적게 오니까 산속에 샘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사람은 샘을 살리는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의 해외 방문 일정에 대해 가볍게 대화를 나눈 후 다가오는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행사를 어떻게 준비할지 함께 의논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가 태어난 경주 일대와 동학의 경전이 집필된 남원 일대를 순례한 후 서울에서 대중이 참여하는 기념 심포지엄으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프로그램 초안을 잡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종교인 분들이 다양한 의견을 이야기하고 프로그램을 조정했습니다. 특히 이번 기념행사를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이 참석하는 대화 마당으로 확대해 보자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번 기회에 각 종교마다 후배들을 데려와서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요?”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사회 원로들도 초대해서 같이 대화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경주에 갔을 때는 경주의 지역 사회 인사들과 대화 마당을 해보면 좋겠고, 남원에 갔을 때는 남원의 지역 사회 인사들과 대화 마당을 가져보면 좋겠네요.”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하는 순례의 여정에 다양한 이웃 종교인들이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사의 뜻을 이어받아 종교 간의 화합을 실현하는 것이 되니까요.”
“최제우 대신사가 깨달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대신사가 그런 활동을 했는지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순례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에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최제우 대신사는 어떤 사회적 배경 속에서 어떤 가치에 목숨을 바쳤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스님도 한 가지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200년 전에 이미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하고 깨달은 분
“한 인간의 사상이란 결국 그가 자란 자연환경,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라는 분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었던 것처럼 ‘최제우 대신사가 왜 불교, 천주교, 유교의 길을 가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갔느냐’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유교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였으니까 희망이 없었고, 불교는 500년 동안 억압을 받고 있었기에 사회 변화를 추동할 리더십이 없었고, 천주교는 외래 종교로 배척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제우 대신사가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하고 깨달은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최제우 대신사가 한국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근거입니다. 이런 깨달음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민중들이 감동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대해 깊이 대화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 순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국제화해학회 세미나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어떤 프로그램으로 준비할지, 현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는 점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짧게 의논을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종교인 분들을 배웅한 후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기 위해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로 이동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 한 주 동안 정토회 회원들의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지난 한 주 동안 북미 서부 순회강연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올해 여름은 무척 더웠죠? 올해 날씨가 가장 더웠다고 하지만 내년이 되면 ‘작년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하는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기후 변화를 더 실감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지난주는 시애틀부터 시작해서 밴쿠버,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샌디에이고를 거쳐 로스앤젤레스까지 매일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미국 현지인들을 위해서 모두 영어로 통역해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해외 순회강연에서 느낀 점은 외국인들도 이제는 조금씩 즉문즉설에 대해 이해하고 익숙해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대중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드러낼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겨우 묻는 게 불교 교리에 관해서 묻거나, 왜 스님이 됐느냐, 스님이 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하면서 외국인들도 대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려움이나 고민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수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는 것이 잘 안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문즉설을 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까 아직은 ‘내가 스님한테 왜 나의 고민을 얘기하느냐?’, ‘이런 얘기를 한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인식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냥 즉문즉설이라고 하니까 참가할 동기도 많이 없는 것 같고요. 그래서 주제를 정해서 강연을 열어보는 방안을 구상 중입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즉문즉설을 할 때는 ‘인공지능과 불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영어 통역으로 즉문즉설을 해보면서 여러분들이 한국어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편리한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즉문즉설은 속도감 있게 말해야 질문자가 정신이 번쩍 드는데 통역을 하다 보니까 속도감이 떨어지고 내용이 100퍼센트 전달이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제이슨 님의 통역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어느 정도 보완이 되고는 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전 세계 언어로 통역하는 세상이 아마 10년 안에는 오지 않을까 싶지만, 그전까지는 통역을 잘하는 분이 있어야 외국인을 위한 즉문즉설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시어머니께 돈을 빌려 드렸는데, 이제는 집까지 팔아서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난처하다며 어떻게 대처를 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라고 요구하는데, 어떡하죠?
“시부모님께서 시동생 사업 자금을 대주느라 그동안 은행에 빚을 4억 정도 내셨는데요. 최근 대출 원리금이 연체되면서 카드론을 이용하시다가 그것도 힘들어지니까 장남인 제 남편에게 5,000만 원만 도와달라는 연락을 주었습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을 텐데 스님 즉문즉설을 많이 듣다 보니까 마음공부가 됐는지 남편이 하자는 대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돈을 마련해 드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시어머니께서 그 뒤로 자꾸만 전화를 해서 멀쩡한 우리 집을 팔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는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안 팔면 되죠. 물어볼 게 뭐 있어요? (웃음) 시어머니 생각에는 큰아들이든 작은아들이든 같은 아들인데, 지금 작은아들이 빚에 쪼들려서 어렵잖아요. 그러니 시어머니는 ‘큰아들이 집을 팔아서 작은아들 빚을 갚아주면 해결이 되지 않느냐?’, ‘너희는 월세나 전세를 살고 나중에 갚아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 두 명을 하나의 가족 공동체라고 생각하는데, 질문자는 시어머니 가족 따로 동생 가족 따로 내 가족 따로 생각하는 거예요. 질문자는 내 남편과 내 아이가 하나의 경제 공동체인 거죠. 그래서 질문자가 볼 때는 남을 위해서 내 집을 팔기는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질문자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것은 견해가 다른 것이지 시어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질문자가 시어머니 하자는 대로 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제 집에서 살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그게 뭐 별일이라고 괴로워합니까?
질문자도 나중에 애를 낳아서 키워 봐요. 큰애와 작은애가 있고, 큰애는 잘살고 작은애는 못 산다면, 질문자가 생각할 때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작은애한테 주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시어머니한테는 모두 하나의 경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설 명절에 엄마하고 아빠하고 자식 둘하고 같이 화투를 쳐서 돈을 따거나 잃었다고 합시다. 엄마나 아빠가 보기에는 큰애가 따든 작은애가 따든 아내가 따든 남편이 따든 그게 그 돈 아니에요? 주머니 안에 돈이 이리저리 간 것밖에 아니잖아요. 그래서 부모는 누가 따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동생이 따느냐, 형이 따느냐’ 하는 차이가 큽니다.”
“문제는 그 빚이 시동생 빚이 아니고 시부모님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한 거라 시부모님이 지금 그 빚을 빨리 안 갚으면 시부모님 집이 넘어갈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그 집을 급매로 빨리 처분을 해서 빚을 해결하셔야 하는데, 그냥 시세대로 내놓고 집이 안 팔린다고 계속 버티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갑자기 저한테 우리 집을 팔고 재개발에 투자를 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합니다. 이런 경우에도 제가 남편에게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나요? 아니면 예전처럼 부부싸움을 해서 집안이 시끄럽게 해야 되나요?”
“집이 누구 명의로 돼 있어요?”
“원래 공동명의였다가 시댁에서 자꾸 예전부터 돈 문제로 부담을 주는 일이 있어서 제 명의로 돌려놨어요.”
“그런데 왜 싸워요? 내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싸울 필요가 없고 ‘좋은 의견입니다. 그런데 저는 팔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죠.”
“남편이 집을 팔자고 해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안 해도 되나요?”
“당연하죠, 질문자가 소유한 집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제 말은 서로 싸우지 말라는 거예요. 시어머니가 돈을 달라고 해도 ‘네, 알겠습니다. 돈이 필요한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줄 형편이 못 됩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남편이 집을 팔자고 하면 ‘당신 뜻은 알겠는데, 나는 팔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싸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남편이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 던지면 ‘그래, 당신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날 만하다. 그런데 나는 애들도 있고 하니까 집은 못 팔겠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남편은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자기 가족이니까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남편의 의견에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게 하자’하고 말해도 되고, 질문자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 집은 내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하고 말해도 됩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줄도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제가 법륜 스님을 알기 전에는 남편하고 많이 싸웠어요. 그런데 법륜스님을 알게 되면서 남편한테 항상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숙이는 연습을 해서 저도 편안해지고 부부 싸움도 없어졌어요. 이런 일에서도 제가 남편한테 숙여야 하는지가 고민입니다.”
“남편의 뜻을 따를 수 있으면 좋지요. 집이 없으면 어때요. 월세나 전세를 얻어서 살면 되죠. ‘당신 원하면 그러세요. 집 없이 살면 되죠!’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싸우지는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집 없이 사는 것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면 ‘당신 의견은 알겠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 됩니다.
질문자는 불교를 거꾸로 알고 있어요. 만약 어떤 여성이 저한테 와서 ‘스님, 저하고 결혼 안 하면 죽어버리겠어요!’ 이러면 여성이 지금 죽는다고 하니까 제가 결혼을 해야 하나요? ‘당신의 종교 때문에 한 사람이 죽는 걸 방관해서 되겠습니까? 한 사람도 구제 못 하면서 무슨 인류를 구제합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어떻게 할래요?”
“사실 5천만 원도 시어머니가 울면서 죽고 싶다고 하셔서 그냥 도와드리게 된 거였거든요.”
“질문자는 시어머니를 도와주지 않아서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과 돈 5천만 원 도와줘서 갈등을 완화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후자를 선택한 겁니다. 법륜스님 때문에 도와줬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소리예요. 어떤 여자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는다고 할 때도 내 속에 결혼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결혼하는 것이지 ‘이 여자가 죽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그런 욕구가 있는데, 결혼해서 생기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결혼을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결정한 겁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너무 간절히 원하니까 5천만 원 정도는 손실을 보더라도 도와주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집은 몇억이나 되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거예요.
질문자가 ‘예’ 해도 아무 문제 없어요. 5천만 원에 ‘예’ 해도 되고, 5억에 ‘예’ 해도 되고, 50억에 ‘예’ 해도 됩니다. 반대로 ‘아니오’ 해도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상대는 나쁘고 나는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상은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도와주지 않으면 됩니다. 그건 질문자의 권리입니다. 부처님은 남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물건을 뺏거나 훔치거나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욕설하거나 술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남이 나한테 뭘 달라고 할 때 안 줬다고 해서 내가 죄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주고 안 주고는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니 남편하고 싸우지는 마세요. 그들이 도와달라고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심정은 이해하면서 나는 도와주지 않으면 됩니다.
시어머니는 자식을 포함한 한 가족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고, 나는 내 가족의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니까 입장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시어머니가 틀린 것도 아니고, 내가 옳은 것도 아닙니다. 시어머니가 옳고, 내가 틀린 것도 아닙니다. 서로 견해가 다를 뿐입니다. 시어머니의 견해에 맞춰 줄 수 있으면 맞춰 주고, 못 맞추면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중에서 나는 안 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이 대화가 끝나고 남편에게 가서 ‘법륜 스님한테 물어보니 어머니 말을 안 들어도 된다고 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할 위험이 매우 커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안 됩니다. ‘법륜 스님이 주라고 해서 줬다’라고 하거나, ‘법륜 스님이 주지 말라고 해서 안 줬다’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내가 결정하고, 안 주는 것도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고 안 주고를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 안 주면 당연히 욕을 먹고, 부부 사이에 갈등도 생기지요. 시어머니로부터 비난도 받지요. 그게 더 중요한지 5천만 원이 더 중요한지 선택하면 됩니다. ‘5천만 원 버리고 비난과 갈등을 피하는 게 낫겠다’라고 결정을 하거나, ‘비난을 받으면 받았지 집을 파는 건 안 된다’라고 결정을 하거나, 질문자가 결정하면 됩니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비난하고 부부 관계가 나빠지고 남편이 난리를 피워도 ‘나는 자식을 키워야 하기 때문에 그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해도 됩니다. 반대로 ‘돈이 뭐 중요합니까, 가족관계가 더 중요하죠. 그러니 집을 팔 테니 그 돈으로 빚을 갚으세요’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질문자가 결정하면 됩니다. 정해진 법은 없어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돈을 준 것도 질문자가 결정한 것이고, 돈을 안 주는 것도 질문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얘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스님의 얘기는 주고 안 주고는 질문자가 알아서 해라는 겁니다.
남을 때리거나 남의 돈을 훔치는 행위는 당장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질문자가 시어머니에게 돈을 줄 의무는 없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돈을 주는 것은 선한 행위이므로 선택 사항입니다. 내가 시어머니의 돈을 뺏는 것은 멈춰야 할 행위입니다. 시어머니가 자식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할 수는 있어도, 자식이 그걸 줘야 할 의무는 없어요. 그러나 자식이 어머니를 고려해서 돈을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습니다. 줄 수 있으면 드리면 되고, 줄 수 없으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죄송합니다. 저도 살아야 하니까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되지, 부부싸움을 할 일도 아니고, 화를 낼 일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고, 두려워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은 늘 요구하고 우리는 그걸 수용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겁니다.
저도 지금 강의해 달라는 요구가 수도 없이 들어오지만 다 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대부분 ‘죄송합니다. 시간이 안 됩니다’ 하고 거절을 합니다. 또 시간이 되어서 요청에 응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저쪽은 해주고, 이쪽은 안 해주냐고 시비가 들어오겠죠? 그런데 저는 강연을 해도 돈을 받지 않으니까 크게 문제가 안 돼요. 저는 이런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돈을 안 받습니다. 돈을 안 받으니까 해주고 안 해주고를 제가 결정할 수 있어요. 저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을 우선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대나 경찰, 공무원 단체나 자선 기구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하면 그런 요청을 우선합니다. 기업에서 해달라고 하면 어떤 행사인지 충분히 보고 결정합니다. 어차피 강연을 하는 것이라면 많은 대중에게 이익을 줘야 하니까 10여 명 규모보다는 100여 명 규모의 행사로 결정합니다. 이런 원칙을 가지고 제 시간을 고려하여 결정을 하거든요. 질문자도 ‘5천만 원까지는 드릴 수 있고 그 이상은 안 된다’, ‘있는 돈을 드리는 건 되지만 집을 팔아야 하는 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자기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서 대응하면 됩니다.
놀랄 일도 아니고, 시어머니가 잘못한 일도 아니고, 남편이 잘못한 일도 아닙니다. 사람은 각자 이해관계를 갖고 말할 뿐입니다. 집이 내 명의로 되어 있으니 그 처분에 대한 결정은 내 권리잖아요. 내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건지는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