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 2대조인 정문도의 묘는 현재 부산에 남아있는데 이 묘에는 풍수지리적인 전설이 있다. 고려 초에 풍수에 일가견이 있는 고익공[4]이라는 사람이 동래 지역 호장으로 내려왔다. 그는 화지산 풍수를 볼 때마다 “좋기는 하나……”라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였는데 정문도와 아들 정목은 그 이유를 묻지 못 했다. 그 후 고익공은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개경으로 전출되었고 정문도가 세상을 뜨자 아들 정목은 고익공의 말이 생각나서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묘소에 가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다. 다시 목관을 묻고 감시하는데 밤에 도깨비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이에 정목이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날이 새자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었더니 이번에는 도깨비들이 “금관이야. 이제 됐다”라면서 사라졌다. 그 후로는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의 괴시암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셔졌다. 아버지의 묘소를 쓰고 난 후 정목은 개경에 있는 고익공을 찾아가 아버지를 화지산에 모셨다고 하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에 정목이 아버지의 묘를 쓰고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고익공은 그제야 안도하면서 “그 바위는 묘를 지내면 후손에서 역적을 낳을 역적바위인데 이제 그것이 깨졌으니 화근이 사라졌다”[5]면서 정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고려 문종 대에 정목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네 아들 역시 모두 문과에 올랐다. 고려 초 풍수지리가 널리 퍼지고 동래 정씨가 관직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도 양반가였음을 나타내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