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
보훈처 "객관적 증명자료 없어 서훈 불가"
(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정병기(49)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 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께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형 사실뿐 아니라 다른 정황도 증조부의 항일 행적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내버린 사실과 그가 실종된 이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킨 사연 등에 비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하고 개가했다는 게 정씨의 전언이다.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
정씨는 고향 마을을 뒤져 증조부가 생존했을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증조부의 항일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판결문 등 구체적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 서훈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이었다"며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사오기도 하고 일본 외무성에도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정병기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1980년 강력범을 검거하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이 됐다는 정씨는 "서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을 멈출 수가 없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낼 것을 검토 중이다"고 밝혔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helloplu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