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남자를 사랑해 ]
“ 권제후. 나 좀 보자. ”
중요한 일이 있다고 분명히 들었건만 그것마저 내팽개치고 제후를 부른 세후.
그래봤자 전화 속 목소리뿐이었지만 제후는 엄청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픔. 분노. 안타까움 등등이 복합한 감정.
소해는 자신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사용할 물건을 챙겨 온 후에 쇼파에 앉아
입도 열지 않았다.
그냥 어금니만 꽉 깨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침대로 들어가 잠들어버렸다.
아무래도 옛 사랑. 그녀의 말에 의하면 떠나가버린 ‘그’의 생각 때문일 듯 싶다.
“ 알았어. 언제, 어디로? ”
“ 언제는 지금이고, 어디로는 필요없어. 내가 간다. 집에 가만히 있어. ”
탁-
제후는 전화를 끊고서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소해를 보았다.
고동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오늘따라 더 안쓰러워보였다.
스윽-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갖다대었다.
미안했다.
다른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미안했다.
“ 조금만... 조금만 참아. ”
콰앙-!!!!!
그렇게 혼자 잠든 채 뒤돌아있는 소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이고 있을 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문에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버린 채로 넥타이와 정장 자켓을 손에 든 채
술에 취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세후가 있었다.
그 두 눈이 너무 공허해서 마치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 형... ”
제후는 세후의 그런 모습에 움찔했다.
예전부터 세후는 제후에게 쫓아갈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에 제후는 무섭고 당황했다.
‘ 사람이 사랑에 저 정도로까지 달라질 수 있는건가. ’
터벅- 터벅-
세후는 제후에게 걸어왔다.
술을 어찌나 많이 마셨는지 멀리서도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게다가 세후는 취해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비틀비틀-
하지만 전혀 추하지 않았다.
“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거냐. ”
“ ... 형. ”
“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가 그럴 수 있는 거냐고. ”
“ 어차피... 형은 사랑할 수 없잖아. 이건 다 형을 생각해서... ”
콰앙-
세후는 굉장히 격동적인 눈빛을 하며 옆에 있는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소리의 진동마저 느껴졌다.
제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미성년자를 벗어난 지 2년 째이지만 세후의 앞에서는 한없이 어렸다.
“ 형을 생각한다는 놈이 뻔히 사랑하는 줄 알면서 여자를 가로채냐? ”
“ 미안.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형도 잘 알잖아. 사랑에는 양보가 존재하지 않아.
사업에는 양보를 해도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되지만, 사랑은 한번 놓치면 그걸로 끝이잖아. “
“ 그리고... 지금 저기 누워있는 여자는 대체 뭐야. 너 설마...? ”
제후는 긴장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대 맞을 것이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형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동생의 고통 따위는 기꺼이...
“ 맞아. 형. 우리 같이 살아. ”
“ ...! ”
세후의 공허한 눈은 이제 공허하다 못해 텅텅 비어버린 듯 했다.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꽉 쥐어진 주먹에 힘이 들어가서 부들부들 떨렸다.
“ 설마 여자랑 남자랑 같이 살면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형?
동거한다는 것 부터가 목적이 따로 있는 거잖아.
이젠 소해.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형은 극히 일부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야. “
퍼억-
참다 못한 세후의 주먹이 동생의 뺨을 내리쳤다.
그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고, 눈에 시큰하게 눈물마저 살짝 고였다.
제후는 남자 치고도 놀랄만큼 강한 세후의 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유일하게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세후의 힘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 경고한다. 꺼져. ”
세후의 살벌한 말에 제후는 형을 잠시 응시한 후, 문을 쾅 치고 나가버렸다.
“ 으음... ”
소해가 문 치는 소리가 꽤 시끄러웠는지 단잠에서 깨어났다.
한번 울고 잔 잠이라 그런지 상당히 달콤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세후를 보며 놀라야 했다.
“ 제후를 사랑하는거냐, 아니면 남자를 사랑하는거냐. ”
“ ... ”
소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후를 바라보았다.
“ 대답해. ”
대답을 듣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반 강압적인 질문.
소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약간은 위험한 그 질문에 나는 서슴없이 말했다.
“ 둘 중에서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남자. ”
제후를 사랑하지 않는다.
난 현재... 앞으로 어떻게 되었던간에 오직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남자와 제후 중 하나를 굳이 골라야 한다면 난 당연히 ‘남자’를 고를 것이다.
‘그’ 하나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가 포함되어 있는 ‘남자’ 전체를 사랑하는 게 낫다.
내 대답을 들은 세후의 표정은 의아할 정도로 굳어져있었다.
알 수 없을 정도로. 한 번 건들면 폭발할 정도로...
“ 그래? ”
타악-
그의 거친 손길이 내 손목을 낚아채고 끌어당겼다.
이 상황을 접하면서 난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뜨거운 분노와 차가운 냉기가 뒤섞인 분위기에 난 두려움을 느꼈다.
“ 그럼 나도 사랑해 줄 수 있겠네. 날 여자로 보지 않는 이상은. ”
“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
“ 그럼 대체 무슨 의미인데.
권제후와 연애하면서 권제후라는 남자 대신 ‘남자’ 그 자체를 선택하는 이유.
대체 뭔데. “
“ 그건... ”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 권제후가 니가 그 사랑한다는 포괄적인 의미의 남자들 중에서 그나마 낫다는 거냐?
그럼 난 뭔데. 대체 난! “
“ ...!!! ”
기습키스였다.
‘그’ 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해 보지 않은 키스를..
그것도 뜻하지 않게 빼앗겨버렸다.
이제 내 입술에 ‘그’ 의 온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떨쳐내고 싶었지만 너무 애틋하고 간절한 키스에 내 마음까지 아파왔다.
술 향기가 확 다가왔다.
스윽-
세후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냈다.
난 당황스러웠지만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그런 나를 세후가 슬프게 주시했다.
“ 너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도 좋으니..
일말의 시선. 일말의 사랑이라도 얻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