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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후회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더 세컨드 핸드 타임 마지막 에피소드)
러시아랑 벨라루스 두 국가의 시민들은 왜 이렇게 시위에 적게 나오는 걸까?
사실, 시위에 나온 사람들이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니야.
러시아 한 국가에서만 이번 반전시위로 체포구금된 사람들은 가장 보수적으로 잡아도 1만5천명이야. (ovdinfo.org)
체포되고 고문 구금당하고 직장도 잃을 수있는 시위인데도 그 모든걸 감수하고 나오는 시위자들은, 대부분 페미니스트 단체의 젊은 여성들과 (소련시대부터의 역사를 자랑하는)군인어머니회의 나이많은 여성들이 선봉을 서고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젊은 사회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사람들이야!
여성들이 시위를 주도하는데는, 웃픈 사실이 있는데...
푸틴과 루카셴코는 벌써 10년도 넘게 반정부시위대를 탄압해왔는데, 여기에는 지도자 독살이나 암살 고문까지 포함돼. 그래서 조금만 단체가 커지면 짓밟았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근데 그와중에 가부장적인 푸틴과 루카셴코는 러시아 페미니스트 단체를 경시했는데, 그래서 살아남은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이번 반전시위에서 가장 구심점이 되고있다고...
자세히 알고싶다면 russia anti war protest feminism으로 검색하면 많이 나올거야.
이 사람들이 시위에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무엇을 감수하고 나오는건지 잘 보여주는 글이 있어서 발췌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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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1년에 있었던 벨라루스 민스크 독재반대 시위 참여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체르노빌의 목소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작가이자 민스크 시위 참여자)가 적은 내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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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타나 쿨레쇼바(여대생, 21세)
사건 기록 :
| 12월 19일 벨라루스에선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정한 선거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루카셴코 대통령의당선, 16년째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그자의 승리. 세계 언론에서는 '감자밭 독재자, ‘세계적인 퍼그'라며 그를 조롱한다. 그는 벨라루스 국민을 인질로 삼고 있는 자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그는 히틀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히들러조차도 '우리 하사님', '보헤미아 일병이라고 부르면서 오랫동안 과소평가했었다.
그날 저녁 옥차브리스카야 광장(민스크 중앙광장)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돌러들기 시작했다. 선거조작에 반대하여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는 발표된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루카셴코를 배제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평화 시위는 특수부대와 오몬 요원들에 의해 잔인하게 제압되었다.
수도 인근 숲에서는 군대가 출격 태세를 갖추고 대기 중이었다. 총 700명의 시위자들이 체포되었고 그중에는 아직 면책권이 유효했던 7명의 대통령 후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거 이후 벨라루스 보안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전국적으로 정치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체포, 심문, 가택 수색, 야권 신문사 및 시민단체에 대한 수색, 컴퓨터 및 기타 사무기기 압수수색 등이 진행되었다. 그래스 교도소와 KGB 격리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집단 소요 조장, 국가 반란 시도, 현 벨라루스 정부가 평화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는 이 두목에 따라 4년에서 15년 징역형을 언도받게 될 것이다.
- NW 기사를 바탕으로
감정에 대한 기록:
"우린 기분 좋게,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어요."
전 저의 성이 아니라 할머니의 성을 말해요. 전 사실 무서워요. 모두가 어떤영웅을 기다리고 있지만 전 영웅이 아니거든요. 전 영웅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감옥에 갇혀서 저는 엄마에 대한 생각만 했어요. 엄마가 심장이 안 좋은데 어쩌지라는 생각만 했어요. 엄마는 어떻게 될까?' 우리가 승리를 해서 역사 교과서에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쳐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의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어떡하나요? 그들의 고통은? 사상은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에요. 사상은 비물질적인 힘이라서 무게를 가늠
할 수가 없어요. 무게가 나가지 않아요. 사상은 전혀 다른 물질로 이뤄져 있어요. 무언가가 엄마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제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전 이제 알아요. 보안요원들이 제 방에 들어와서 제 물건과 책들을 뒤지고, 제 일기를
낱낱이 읽는 기분이 어떤지를요. (침묵한다.) 제가 오늘 선생님과의 약속에 나갈 준비를 할 때 마침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유명한 작가 선생님과 만날 거라고 엄마에게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엄마가 울먹거리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조용히 하거라. 아무것도 얘기하지 말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를 지지해주지만,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그분들은 절 사랑해요.
시위가 있기 전 저녁에 우리는 기숙사에 모여서 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인생에 대한 얘기들과 더불어 시위 참여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일을 떠올리면 되는 거죠, 그렇죠?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대충 이랬던것 같아요.
"갈 거야?"
"아니, 난 안 가. 대학교에서도 제적당하고 군대로 징집될지도 몰라. 그러면 소총 들고 뛰어다녀야 해”
"만약에 내가 퇴학을 당하면 아버지는 바로 날 시집보내 버릴 거야."
이젠 말은 그만하고 행동으로 보일 때야. 만약 모두가 무서워한다면.…...
너는 그럼 내가 무슨 체 게바라라도 되어야 한다는 거야?" (이건 전 남자친구가 말한 거예요. 그 친구에 대해서도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자유 한 모금….”
난 갈 거야. 왜냐하면 독재 속에 사는 게 지겨워졌거든. 우리를 무슨 무뇌아에 노비 정도로 취급하잖아."
'난 영웅이 아니야. 난 공부를 하고 싶고, 책도 읽고 싶어."
소보크에 대한 유머가 있어. 개처럼 화가 났는데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고, “난 힘이 없는 사람이야. 나로 인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난 선거도 한 번도 안 했어."
"난 혁명가야. 난 갈 거야. 혁명은 쾌감이거든!"
"네가 무슨 혁명적 이상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밝은 미래는 자본주의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이여, 영원하라!"
"내가 열여섯이었을 때 난 부모님을 비난했어. 부모님은 항상 뭔가를 두려워하셨어. 왜냐하면 아버지의 승진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지. 난 엄마 아빠는 멍청하고, 우리 세대는 끝내주게 멋있다고 생각했었어. 나가자! 나가서 할 말을 하자! 그런데 나도 이제 부모님처럼 편의주의자가 되어버렸어. 난 진정한
편의주의자야.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서식 환경에 최대한 적응된 종이 살아남는 거래. 중간 정도가 살아남아서 종을 이어가는거지,
시위에 참여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그런데 참여하지 않는 건 더 멍청한 짓이야.”
“야, 이 아둔한 양들아! 누가 너희한테 혁명이 진보라는 생각을 심어 놓은거야. 난 진화의 편이야.”
"난 적군이든 '백군'이든 그게 그거인 것 같아. 다 필요 없어!"
"나는 혁명가야 ……."
"소용없어! 머리를 빡빡 민 군인들이 군용차를 타고 올 거라고, 넌 머리통에 몽둥이 찜질을 당하게 되는 거야. 그걸로 끝이야. 정부는 철의 정부여야 해."
"미스터 총 양반, 엿이나 처먹어! 난 아무에게도 혁명가가 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어. 나는 학교를 마치고 내 사업을 하고 싶어."
“두뇌들의 폭발!"
"공포는 병이야."
우리는 기분 좋게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어요. 많이 웃고 노래도 불렀어요.
우린 서로가 끔찍할 정도로 좋았어요. 굉장히 기분이 들뜬 상태였지요. 어떤 사람은 플래카드를, 어떤 사람은 기타를 들고 있었어요.. 친구들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서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업데이트해줬어요. 덕분에 우
리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어요. 뭘 알고 있었냐 하면, 시내 중심지에 군인과 경찰들을 태운 군용차와 군장비들이 잔뜩 깔려 있다는 것이었죠. 도시까지 군대를 동원하다니…. 이런 소식들이 믿어지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기도했어요.
기분이 들쑥날쑥했지만 공포심은 전혀 없었어요. 갑자기 두려움이 싹사라졌어요. 첫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수십만 명이었으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어요. 우리는 한번도 그렇게 많이 모인 적이없었어요. 적어도 제 기억에는 그랬어요. 둘째, 우리는 우리 동네에 있었어요.어차피 거긴 우리 도시였고 우리나라였으니까요! 헌법에는 우리의 권리가 명시되어 있잖아요. 결사, 집회, 시위, 행진의 자유, 말의 자유, 법이 있었다고요!!
우린 겁에 질리지 않은 최초의 세대였어요. 맞아본 적도, 총격을 겪어본 적도 없는 세대, '그런데 만약 15일 구금을 시키면 어떡하지? 아, 그러라지! 라이브 저널에 올릴 스토리 하나가 더 늘어날 뿐이지, 뭐. 더 이상 정부가 우리를 자기들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눈먼 양 떼 취급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어.
뇌 대신 텔레비전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게 둬선 안 돼.'
전 만약을 대비해서 컵올 가지고 갔어요. 왜나하면 감방에서는 컵 하나로 10명이 사용해야 한다는 걸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또 배낭에 따뜻한 스웨터와 사과 2개를 넣었어요.. 우리는 걸어가면서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서 서로서로 사진도 찍어줬어요. 크리스마스 마스크를 쓰고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는 우스꽝스런 토끼귀를 하고서요. 왜 그중국산 장난감들 있잖아요.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였거든요. 눈도 오고 있었어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술에 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간혹 맥주캔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사람들이 곧바로 빼앗아서 술을 따라버렸어요. 사람들이 어떤집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을 발견했어요. “저격수들이에요! 스나이퍼라고요!' 모두가 한껏 흥에 취해 있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손까지 흔들었죠. 여기로 와요!! 뛰어내려요! 정말 웃겼어요. 그때까지 전 정치에 대해서 항상 반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게 그런 감정이 있고 그런 감정을 느껴볼 수 있게 되리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흥겨움은 음악을 들을 때나 느꼈던 거예요. 제게 있어서 음악은 모든 것이에요, 대체 불가능한 것이요. 그날은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제 옆에 어떤 여자분이 있었어요. 왜 저는 그분의 이름을 묻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그분의 이름도 선생님이 써주셨을 텐데요. 전 그때 다른 것에 정신이 깔려 있었어요. 주변은 흥겨웠고, 전 모든 걸 처음 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여자분은 아들과 함께 걷고 있었어요. 아들은 언뜻 보기에 열두 살 정도 돼 보였어요. 초등학생이었어요. 어떤 대령이 그 여자분을 보자마자 확성기에 대고 욕만 안 했다 뿐이지 거의 그 수준으로 '나쁜 엄마'라며 비난을 했어요. 미친 어자라며,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 여자분과 아들에게 갈채를 보냈어요. 즉흥적으로 이뤄진 일이었어요. 사전에 약속을 한 게 아니었어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항상 부끄러웠거든요. 우크라이나인들은 마이단 시위를 벌였고, 그루지야인들은 장미 혁명을 일으켰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은 늘 비웃음의 대상이었어요. '민스크는 공산주의의 수도야. 유럽의 마지막 독재 국가.' 하지만 전 이제 다른 자부심을 느껴요. '우리도 나갔다. 우리는 두렵지 않았어요. 그게 중요해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그렇게 해서 대치가 시작되었어요. 우리도 그들도 서 있었어요. 한쪽에는 국민들이 있었고, 반대편에도 다른 국민들이 있었어요. 그 모습이 참 모순적으로 다가왔어요. 한쪽에서는 현수막과 초상화를 들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완전 무장한 채로 방패와 육각봉을 들고 있었죠. 한 어깨 하는 청년들이었어요. 정말 잘생겼었죠! '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때려? 나를 때린다고? 나랑 동갑인 것 같은데. 날 쫓아다닐 법한 애들인데.' 진짜예요! 그들 중에는 같은 마을 출신으로 저와 알고 지내던 남자애들도 있었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민스크로 상경해 경찰로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콜카, 라투쉬카, 알릭 카즈나체프……. 모두 괜찮은 애들이었어요. 우리와 같은 아이들이었는데, 다만 계급장을 차고 있었어요. 쟤들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죠. 전혀요.......
우리는 웃으면서 그들을 놀려댔어요. 자극을 하기도 했지요.
“얘들아, 얘들아! 민중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 와중에도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행진할 때 지시를 내리듯이 그렇게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졌어요. 군중을 해산시켜라! 대열을 유지하라!” 뇌가 현실을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군중을해산시켜라!” 얼마간 쥐 죽은 듯이 고요했어요. 잠시 뒤 방패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사냥꾼이 짐승을, 사냥감을 몰이하듯 그렇게 육각봉으로 방패를 당가 박자에 맞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대열을 갖춰 진군을 하고 있었어요..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진군을 했어요. 전 텔레비전이 아닌 실체로 그렇게 많은 군인을 본 적이 없었어요 전 나중에 같은 마을 출신 남자애들에게 들었어요. 그들을 교육할 때 이렇게 말한대요. 제군들은 시위자들을 사람으로 보게 되는 걸 가장 두려워해야한다"라고요. 정말 개처럼 사람들을 끌고 다녔어요. (침묵한다.) 비명 소리, 울음
“이놈들이 때린다! 때린다!” 저도 때리는 걸 보았어요. 그거 아세요? 그들은 신이 나서 때리고 있었어요. 만족스럽다는 듯이요. 흡족한 표정으로 때리던 그들의 모습을 저는 기억해두었어요. 그들은 마치 훈련 중인 것 같았어요. 젊은 여자의 절규가 들렸어요. “나쁜 자식아, 뭘 하는 거야!" 아주아주 고음의 목소리였어요. 이성을 잃었던 거죠. 얼마나 무서웠던지 전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던 것 같아요. 전 하얀 점퍼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온통 하얀색을 입고 서 있었어요.
소리들.…..
"눈에 얼굴을 묻어, 이 씨발 놈들아!"
버스유치장, 기적의 차. 전 실제로는 처음 그 차를 보았어요. 죄수들을 이송하기 위한 특수 차량 말이에요. 전체가 강판으로 둘러져 있었어요. 눈에 얼굴을 묻어, 이 씨발 놈들아!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여버리겠어!" 전 아스팔트에 누워 있었어요. 혼자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누워 있었어요.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느낌은 다였어요. 발길질로 공동이로 특록 치면서 우리를 일으켜 세운 뒤 버스유치장에 집어넣었어요. 남자들은 훨씬 더 많이 맞았어요. 가랑이 사이를 때리려고 노력하더라고요. “야, 불알을 때려, 불알을 거시기를 차버리든가!”, “뼈를 내리쳐!”, “오줌으로 갈겨 버려!” 때리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논쟁도 시도하더군요. '너희 혁명 따위 개나 줘버려!", "야, 이 새끼들아! 몇 달러나 쳐 먹고 조국을 팔아먹었나?”
버스유치장은 2미터에 5미터로 짜여 있었어요. 한 유치장당 수용인원이 이십 명이라고 누군가 얘기해 주더군요. 그런데 우리를 오십 명씩 쑤셔 넣었어요. '심장질환자들, 천식환자들, 모두 조심하세요!' “창문은 보지 말 것! 모두 고개를 아래로 숙여!” 그리고 욕, 또 욕………. '미국 코쟁이들에게 돈을 받아먹
은 우리 같은 '미숙아 병신들 때문에 오늘 축구경기를 놓쳤다며 화를 냈어요. 그 군인들도 사방이 막힌 차 안에서 하루 종일 대 하고 있었대요. 덮개를 쓰고서요. 소변도 비닐봉지나 콘돔을 이용해 해결했다더군요. 차에서 그들을 풀어놓았을 때는 배도 고프고 악에 받쳐 있는 상태였어요. 개인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날 그들은 망나니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겉으로만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 시스템의 작은 나사들…….. 때릴지 말지는 그들의 결정이 아니었지만 결국 때리는 건 그들이었어요. 먼저 때린 후에 생각을 했겠죠. 어쩌면 아예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침묵한다.)
한참을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돌았다를 반복하면서요. '어디로 가는 거지?' 아는 게 전혀 없었죠. 차문을 열어주었을 때, 누군가질문을 했어요.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왔죠. “쿠로파트이(스탈린의 탄압시절 희생자들을 집단으로 매장했던 지역)로, 그런 사디스트적인 농담을 하고 있었어요.
시내를 오랫동안 빙빙 돌았어요. 왜냐하면 모든 교도소가 만원이었거든요. 우리는 버스유치장 안에서 잠을 잤어요.
바깥 날씨가 영하 20도였는데, 우리는 철 박스 안에 있었던 거예요. (침묵한다.)
전 그들을 미워해야만 해요. 그런데 전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전 그럴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하룻밤 사이에 보초가 몇 번씩 교체되었어요. 군복을 입어서 모두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얼굴이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한 사람만은, 전 지금도 그 사람을 길거리에서 본다면 알아볼 수 있어요. 눈만 봐도 알아볼 수 있어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누가 봐도 남자 같은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남자였
어요. 그가 무슨 짓을 했냐고요? 그 사람은 버스유치장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랫동안 열린 상태로 두었어요. 우리가 추위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하면 그걸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모두들 점퍼를 입고 있었고, 싼 부츠라 털도 인공털이었어요. 그는 우리를 보면서 씨익 웃었어요. 그는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 스스로가 그렇게 행동을 한 거예요. 자의로요.
반면 다른 군인은 제 주머니 속에 '스니커즈' 초콜릿을 살짝 넣어줬어요.
"자, 챙겨둬. 대체 무슨 생각으로 광장에는 쫓아온 거야?”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으면 솔제니친을 읽어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전 학교에 다닐 때『수용소 군도를 도서관에서 빌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잘 읽히지가 않았어요. 두껍고 지루한 책이었죠. 한 50페이지 정도 읽다가 책을 덮어버렸어요. 그 책 속 이야기는 뭔가 옛날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 트로이 전쟁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어요. 우리에게 스탈린은 상당히 고리타분한 주제였거든요. 저와 제 친구들은 스탈린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감옥에 가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가방을 책상 위에 모조리 쏟아 붓는것이었어요. 그때의 느낌이요? 마치 옷을 모두 벗겨 내는 것 같았죠. 그리고 실제로도 옷을 벗겼어요. "아래 속옷까지 다 벗고 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린뒤 앉아.” 도대체 그 사람들은 제 항문에서 뭘 찾았던 걸까요? 우리를 마치 범
죄자들 대하듯 했어요. “얼굴은 벽 쪽으로 고개는 바닥으로!" 항상 바닥을 볼것을 요구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쳐다보는 게 그렇게도 싫었나 봐요.
“벽을 보라고! 내가 말-했-잖-아! 벽을 보라고!” 어디든 줄을 서서 움직였어요. 화장실도 줄을 서서 갔어요.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줄을 맞춰라.” 이 모든 걸 견뎌내기 위해서 저는 제 앞에 벽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는 우리들, 벽 저쪽 편에는 그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심문, 수사관, 증기물들.…....
심문을 하면서 “넌 '본인의 죄를 명백히 인정합니다'라고 쓰면 돼”라고 말했어요. -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 "이봐! 그걸 몰라서 물어? 넌 집단 소요에 참여했다고!” - "그건 평화적인 반대 시위였어요.” 그때부터 다양한 위협과 압박이 시작되죠. 대학에서 제적을 당한다, 엄마가 해고된다, 딸이 이 모양인데 엄마가 어떻게 교사직을 유지할 수 있겠냐는 등의 협박을 했어요. 엄마! 전 계속 엄마를 생각했어요. 그들도 그걸 알았는지 심문할 때마다 '엄마가 운다', "엄마가 입원하셨다' 등의 말로 시작을 했어요. 그리고 또다시 이름을 말해! 누가 네 옆에서 걷고 있었지? 누가 선전물을 나눠줬지? 서명해, 이름을 대……...
아무도 발설한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할 거고 말하면 곧장 집으로 보내준다고도 했어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난 아무것도 당신들에게 서명해주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밤만 되면 전 울었어요. 엄마가 입원해 있다니……. (침묵한다.)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배신자가 될 수도 있었어요. 제가 한 달을 더 버터낼 수 있었을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들이 비아냥거렸어요. "자, 어디 보자. 우리 조야 코스모제미얀스카야 양은 잘 있나?" 젊은 사람들이었고 즐거워 보였어요. (침묵한다.) 전 소름이 끼치더군요. 그들은 저와 같은 상점을 다니고 같은 카페에 가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잖아요. 어디든 같이 있는 거예요.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우리'와 '저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어요. 어떻게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겠어요? (침묵한다.) 예전에 저는 선한 세상에서 살았는데, 이제 제게 있어서 그런 세상은 사라졌고 더 이상 오지도 않을 거예요.
한 달을 꼬박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거울을 보지 못했어요. 제 가방에는 작은 손거울이 있었는데, 소지품 검사 이후에 가방에서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돈이 든 지갑도 사라졌고요. 항상 갈증이 일었어요. 참을 수 없는 갈증이! 하지만 물은 밥을 먹을 때만 주었고, 나머지 시간에
는 화장실에 가서 마시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낄낄거리며 자기들은 환타를 마시죠. 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아무리 마셔도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고.
풀려나기만 하면 냉장고 가득 생수를 채워 놓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사람들에게선 냄새가 풀풀 났어요.. 씻을 때가 없었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미니 향수를 가지고 있었고 우린 그 향수를 전달해가며 냄새를 맡았어요. 제가 그렇게 사는 동안에도 우리 친구들은 강의 필기를 하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겠죠. 시험을 보고 있거나요. 온갖 사소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예를 들어 아직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새 원피스에 대한 생각들이요. (웃기 시작한다.) 설탕이나 비누 한 조각 같은 사소한 물건들이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감방은 32제곱미터 크기의 5인용 감방이었는데실제로는 17명이 수감되어 있었어요. 2제곱미터 내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특히 밤이 되면 공기가 모자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린 쉽게 잠이 들지 못 했어요. 우린 대화를 했어요. 첫날은 정치에 대해서, 그다음부터는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들이 이걸 원해서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감방에서 나눈 대화 :
-똑같은 시나리오대로 진행되고 있어. 세상은 방글방글 원을 따라 돌고 있다고, 민중은 짐승 떼야. 영양 무리, 그리고 정부는 암사자지, 암사자는 영향 무리를 지켜보다가 희생양을 물색한 다음 죽여, 나머지 영양들은 희생양을 고르는 암사자의 눈치를 보면서 풀을 뜯다가 암사자가 그 희생양을 쓰러뜨리면 그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어휴,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아직은 더살 수 있어.”
-난 박물관에 있는 혁명을 좋아했어요.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죠. 동화속 역할 놀이에 빠져 있었던 거예요. 부르는 사람도 없는데 난 내 스스로 광장에 갔어요. 혁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구경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 대가로 머리와 신장에 몽둥이찜질을 당했죠. 그날 거리로 나온 건 젊은이들이었어요. 그건 아이들의 혁명'이었어요. 이젠 그 사건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우리 부모님은 집에 있었으니까요. 부엌에 둘러앉아 우리가 시위에 갔다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걱정을 하면서 ……. 부모님은 두려워하셨지만, 우리 세대에겐 소련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우리는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웠기 때문에 공포심이 없었던 거예요. 민스크에는 2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중 몇 명이 거리로 나왔을까요? 한 3만 명 정도예요. 우리가 행진하는 걸 보고만 있었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어요. 어떤 사람은 집 베란다에서, 어떤 사람은 자동차 안에서 빵빵거리면서 힘을 내, 얘들아! 파이팅!'을 외쳐주었어요.
원래 맥주캔을 손에 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구경꾼들의 수가 더 많은 법이에요. 모두들 그런 식이죠.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이 우리들, 즉 낭만주의적 인텔리겐치아밖에 없다면, 그건 아직 혁명이라 부를 수 없어요.
-모든 것이 공포심 때문에 유지되는 것 같아? 군인들, 육각봉 때문에? 틀렸어. 망나니들은 얼마든지 희생자들과 합의를 볼 수 있어. 그건 공산주의 시절부터 대대로 우리에게 내려오는 전통이야, 암묵적 동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계약, 큰 거래………. 사람들은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그 대가로 괜찮은 월급을 받고 중고라도 좋으니 아우디를 사고, 터키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은 거라고, 그들과 민주주의나 인권에 대해서 한 번 얘기를 해봐, 중국 한자를 보는 기분이 들걸! 소련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옛 시절을 떠올리지, ‘우리 아이들은 모스크바에서 바나나가 자라는 줄 알고 컸어.그런데 요즘은 어때? 햄의 종류가 자그마치 100여 개야. 더 이상 무슨 자유가 필요해?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야? 지금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 단, 그 소련에 햄이 잔뜩 있길 바랄 뿐이지..
- 난 아주 우연히 광장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광장에 가게 되었고 현수막과 풍선들이 있는 곳에 끼어서 놀아보고 싶었어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기에 갔던 한 남자애가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난 그 일들에 전혀 관심이 없던 구경꾼이었다고요. 머릿속에서 온갖 정치 얘기를 생각
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어요. 에잇! 선 대 악의 대결은 이제 질색이라고요.
-우리를 이상한 막사 같은 곳에 몰아넣었어요. 하룻밤을 꼬박 벽을 쳐다보며 서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에는 무릎을 꿇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릎을꿇었어요. 다음 지시가 떨어졌죠. “일어나! 손을 위로 들어!”
그 뒤로도 계속두 손을 머리 뒤로 해, 100번 앉았다 일어나, 한 발로 서 있어……. 대체 왜 그런 걸까요? 무엇을 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겠죠. 그들은 허락을 받은 거예요.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의 맛을 느낀 거예요, 젊은 여자애들은 속이 메스껍다고 했고 기절도 했어요. 처음 심문을 받았을 때 난 수사관의 면전에서 웃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요. 꼬마야. 내가 지금 네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 다 내 거시기를 박아 넣고 재미 좀 본 다음에 널 중범죄자들이 있는 감방에 처넣을 수도 있단다.”
난 솔제니친을읽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수사관도 아마 안 읽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알았어요.
-날 담당했던 수사관은 교양 있는 사람이었어. 나랑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더라고, 알고 보니 우리는 좋아하는 작가까지 비슷했어. 아쿠닌, 움베르토 에코....... 수사관이 그랬어. “세상에, 어쩌다가 너 같은 사람이 내 담당이 된 거야? 난 부패 공무원들을 수사하던 사람이었단 말이야. 그건 할 만했어! 그런
놈들은 죄가 뻔해. 근데 너희들은..…..” 그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창피해하면서도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했어. 그런 사람이 수천 명에 달하는 거야, 공무원,수사관, 판사 중에도 있지. 어떤 사람들은 때리고, 어떤 사람들은 신문에 거짓을 쓰고, 삼분의 일은 체포를 하고 형을 선고해. 스탈린 기계를 돌리기 위해선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거든."
- 우리 집에는 오래된 공책 한 권이 보관되어 있어, 할아버지가 자손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써놓으신 거야. 할아버지가 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겪어내셨는지를 쓴 이야기야. 할아버지는 감옥에 갔었고 고문도 받았어..
얼굴에 방독면을 씌운 다음 정화통 구멍을 막아버렸대, 옷을 다 벗기고 철 채찍으로 때리고 문 손잡이를 항문에 박아 넣기도 하고, 내가 10학년이 됐을 때 엄마가 그 공책을 보여주셨어. “넌 이제 다 컸단다. 그러니 너도 알아야 해.” 난이해를 못 했지. '왜 내가 이걸 알아야 하지?"
-만약 다시 수용소가 세워진다면, 그곳에서 일할 교도관들도 다시 생기겠지. 아마 개미 떼처럼 몰려올걸?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네.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정상적인 청년처럼 보였어. 그런데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는 거야. 그들은 몽유병 환자들처럼 움직이고 있었어.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처럼,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휘둘렀어. 어떤 남자가 쓰러졌는데, 그들이 그 남자 위에 방패를 올려놓은 다음 그 위에서 춤을 췄어. 모두들 거구들이었는데, 모두 키가 2미터는 되었는데……. 모두들 80에서 100킬로그램 정도는 됐을 거야. 전투
력을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그 사람들의 몸을 불리니까.
오몬 요원들이나 특수부대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야. 마치 이반 뇌제의 비밀부대였던 '오프리치니키' 같은……. 난 그들이 이걸 원해서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정말 있는 힘을 다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젖 먹던 힘을 다 짜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 사람들도 밥을 먹고살아야 하잖아.
아직 풋내 나는 어린애들..….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왔는데, 대학교 교수들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어. 나중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중에는 반드시 그러겠지. 나중에 분명 그렇게 말할 거야. 우리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그들은 지금도 수천 개의 변명거리를 늘어놓고 있어. "아니, 그럼 누가 내 가족을 먹여 살린단 말입니까?', '난 군인서약을 한 사람입니다",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도, 그때는 그 대열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어떤 사람을 데려다 놔도 그렇게 만들
수 있어,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 전 겨우 스무 살이에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죠? 전 이제 다시 시내에 나가게 되면 무서워서 눈도 못 들고 다닐 것 같아요.
-"수도에서나 혁명이지, 여긴 아직도 소련이 통한다고!"
우리는 한밤 중에 풀려났어요. 기자들과 친구들이 교도소 근처에서 우리를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를 버스유치장에 다시 밀어 넣고는 시의 지역에서 분산시켰어요. 전 샤바니 부근에서 풀어주더군요. 어떤 돌 무더기 근처에서요. 신축 건설현장이 있는 곳이었어요. 정말 다리가 덜덜 떨렸어요. 당황해서 조금 서 있다가 불빛을 향해 걸어갔어요. 돈도 없고 휴대전화도 이미 오래전에 방전되었지요.
지갑에는 청구서만 들어 있었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청구서를 받았어요. 교도소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 들어간 비용을 청구한 거에요. 그 액수가 대학교에서 받는 제 한 달 치 장학금 수준이었어요.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어요. 전 엄마와 둘이 살면서 겨우 겨우 돈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거든요. 아빠는 제가 6학년 때, 고작 열두 살이었을 때 돌아가셨어요. 새아빠는 월급으로 술을 마셔 대고 성공적으로 바람도 피워요. 알코올 중독자, 전 그 사림이 싫어요. 그 사람이 엄마와 제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전 항상 아르바이트를 해요. 우편함에 다양한 광고 전단지를 뿌리고 여름에는 과일을 떼어다가 팔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기도 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었어요. 개 몇 마리만 뛰어 다닐 뿐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요.
제 앞에 택시가 멈춰 섰을 때, 정말이지 기뻐서 펄쩍 뛸 게 뻔
했어요. 기숙사 주소를 불러 드리고는 돈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택시기사가 금방 눈치를 채더군요. “아아! 여자 데카브리스트(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꾀한 12월 당원, 여기서는 12월에 체포된 시위자들을 말함)로구먼! (우
리를 12월에 체포했거든요.) 타요. 다! 벌써 학생 같은 사람 한 명을 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야. 왜 대체 너희들을 밤에 풀어준 거야?”
택시에 타고 가는 동안 전 설교를 들어야 했어요. “다 멍청한 짓이야! 쓸모없다고! 나도 1991년도에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했어, 시위도 열심히 쫓아다녔고, 그때 우리들의 숫자가 지금 너희들보다 훨씬 많았어. 우리는 승리를 했지. 모두가 회사를 열고 부자가 되는 꿈을 꿨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됐어? 공산당 놈들이 있을 때는 엔지니어로 일을 했는데 지금은 아등바등 먹고살려고 별 짓을 다하고 있잖아. 한무리의 개자식들을 해치우니까 다른 나쁜 놈들이 들어서더라고, 검은색이건 회색이건 오렌지색이건 그놈들은 다 똑같아. 우리나라는 말이야, 권력만 잡으면 사람들이 타락을 해. 난 현실주의자야. 난 나 자신과 내 가족만을 믿어. 우리 다음 세대의 멍청이들이 다음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는 동안 난 뼈 빠지게 돈을 벌고 있다고. 이번 달에는 딸들에게 겨울 외투도 사줘야 하고 다음달에는 아내에게 부츠를 사줘야 해, 학생은 아주 예쁘장하구먼. 그러니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이나 가.”
시내로 진입했어요. 음악이 흐르고 웃음소리가 들렸죠. 커
플들이 키스를 하고 있었어요. 마치 우리들은 원래 없었다는 듯 도시는 여전히활기가 넘쳤어요.
전 남자친구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기다릴 수가 없었죠. 우린 벌써 3년을 함께 했었거든요.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있었고요. (침묵한다.) 시위에 참여하겠다던 남자친구는 정작 당일에 오지 않았어요. 전 그 사람의 해명이 필요했어요. 남자친구가 왔어요. 사지 멀쩡하더군요. 뛰어왔어요. 친구들이 그 사람과저만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어요. 해명은 무슨 같잖은 일이죠! 알고 보니, 전 단순한 바보', '대표적인 예', '순진한 혁명가 였던 거예요.. 자긴 제게 그렇게 경고했었대요. "잊었어?" 그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일에 힘을 쏟는 편이 아니었어요. 그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사림이었어요. 그는 바리케이드 앞에서 죽고 싶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라며 절 가르쳤어요. 타인을 위한 삶이란 것이 있는데,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 사람이 받은 소명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커리어' 였어요. 그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했죠. 수영장이 딸린 집이 그의 꿈이었어요. 그 사람에겐 웃으면서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지금은 너무나 기회가 많잖아요. 눈이 돌아갈 지경이라고요. 지금은 세계 여행을 할 수도 있고 호화로운 크루즈도 탈 수 있어요. 대신 비싸죠 궁전을 사고 싶으면 살 수 있어요. 대신 비싸죠. 레스토랑에서 거북이 수프도 주문할 수 있어요.
대신 그 대가만 지불하면 돼요. 돈! 돈!!
물리학 교수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요.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잘 기억해두세요. 돈은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심지어 미분방정식도 풀어냅니다. 가혹한 삶의 진실이에요. (침묵한다.)
그렇다면 이상은요? 결국 이상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나요? 어쩌면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실 수 없을까요? 선생님은 책을 쓰시잖아요. (침묵한다.)
저는 전체회의 결과에 따라 제적을 당했어요. 제가 좋아하던 연로하신 교수님을 빼고는 모두가 찬성'에 손을 들었어요. 바로 그날 그 교수님은 응급차에 실려 가셨어요. 기숙사 친구들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절 위로했어요. “우리에게 화내지 마, 학장님이 협박을 하셨어. 안 그러면 기숙사에서 우리를 쫓아낸다고 만약...... 어머..어머! 영웅 행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표를 샀어요. 도시에 살면서 항상 시골이 그리웠어요.
사실, 어떤 시골을 그리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마도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아빠가 절 양봉장에 데리고 가서 꿀을 꺼내주던 그 시골이요. 아빠는 먼저 벌집 주변에 연기를 잔뜩 피워서 꿀벌들을 날려 보냈어요. 벌들이 우리를 쏘지 못하도록요. 어렸을 때 전 엉뚱한 아이였어요. 저는 꿀벌도 새라고 생각을 했어요. (침묵한다.)
제가 지금도 시골을 사랑하냐고요? 시골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작년과 같은 올해를 살고 있어요. 삶으로 텃밭에 심은 감자를 캐면서 무릎으로 흙 위를 기어 다니죠. 밀주를 만들기도
하고요. 저녁 무렵이면 말짱한 정신인 남자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남자들은 매일 술을 마셔요. 루카셴코에게 투표를 하고 소련을 그리워해요. 천하무적이었던 소련군도 그리워하고요.
버스 안에서 제 옆자리에 이웃집 아저씨가 앉았어요. 역시나 취한 상태로, 아저씨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민주주의자 놈들을 만나면 면상에 주먹 자국을 내줄 텐데.... 너희한테 준 벌은 너무 가벼워 정말이야, 민주주의자 놈들은 총으로 쏴 죽여야 한다고! 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명령을
수행했을 거야. 미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거야. 힐러리, 클린턴 ...….. 러시아 민족은 강한 민족이야.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도 겪었어. 그러니 혁명도 이겨낼 거야. 내가 어떤 똑똑한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말이야, 혁명은 유대인들이 고안한 거래.”
버스 안에 탄 모든 사람이 아저씨의 말을 거들었어요. “지금보다 더 형편없을 때는 없었어. 텔레비전을 켜면 여기저기 다 폭파시키고 총을쓴다고..….
집에 도착했어요. 문을 열었죠.. 엄마는 부엌에 앉아서 달리아 덩이줄기를 털어내고 있었어요. 지하 창고에서 얼었는지 살짝 썩었던 거죠. 예민한 식물이거든요. 추위에 약해요.. 전 엄마를 돕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처럼요.
“수도는 어떠니?" 엄마가 저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어요. "텔레비전을 보니까 많은 사람이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더구나, 하느님, 세상에! 끔찍해라! 여기에 앉아서 우리는 전쟁이라도 시작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어. 어떤 집에서는 아들들
이 오몬에서 복무를 하고 있고, 어떤 집에서는 대학생인 아이들이 광장에 나가 시위를 했다는 구나. 신문에서는 시위자들을 '테러리스트', '불한당' 이라고 하고.
더구나 여기 사람들은 신문을 맹신하잖아. 수도에서나 혁명이지, 여긴 아직도 소련이 통한다고. 집안 전체에 진통제 냄새가 배어 있었어요.
저는 시골 마을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농부였던 유리 쉬베드는 한밤중에 출동한 보안요원들이 1937년도 때 우리 할아버지를 끌고 갔던 것처럼 데리고 갔다고 해요. 집 안 전체를 뒤지고 컴퓨터를 압수해갔다더군요. 간호사였던 아냐는 민스크 시위에 참여하고 야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어요.
아직 아이가 어린데 말이에요. 남편은 술을 퍼마시곤 ‘야당 년!'이라며 아냐를 두들겨 팼대요.
민스크 경찰로 일하고 있는 아들들은 둔 엄마들은 아들들이 특별수당을 받았다면서 자랑을 하고 다녔어요. 그 아들들이 선물도 사 왔다면서요. (침묵한다.) 우리 민족을 반으로 갈라놓았어요. 전 클럽에 춤을 추러 갔는데, 그날 저녁에는 단 한 명도 제게 춤을 권한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전 테러
리스트였으니까요. 절 두려워했어요.
우린 1년 뒤 모스크바 - 민스크 간 기차 안에서 우연히 또 만나게 되었다. 다른 승객들은 이미 오래전에 잠들었지만 우리는 얘기를 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친구들과 모스크바 시위를 쫓아다니고 있고요. 끝내줘요! 전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참 마음에 들어요. 우리가 민스크 광장에 나갔을 때 사람들의 표정이 딱 그랬거든요. 전 그때 제가 살던 그 도시를, 민스크 사람들의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지금은 집이 너무 그립네요. 많이 그리워요.
벨라루스 행 기차를 타면 잠이 오질 않아요. 비몽사몽,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상태가 되죠. 감옥에 있는 것도 같고 기숙사에 있는 것도 같고….. 모든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남자들과 여자들의 목소리가요..
"다리 찢기를 시키고 두 다리를 머리 뒤로 올리게 했어."
"자국이 남지 않도록 신장 부근에 종이 한 장을 대고는 물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병으로 때렸어."
"그 사람이 내 머리에 비닐봉지나 방독면을 씌웠어, 그다음엔 너희도 잘 알잖아, 어떻게 되었는지. 몇 분 뒤에 난 의식을 잃었어. 그런데 그 수사관도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사람이었을 거 아니야.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군홧발로, 구두로, 운동화로 ...”
"당신은 그 사람들이 낙하산 타고 하강하는 법만 배우고 헬기에서 밧줄을타고 내려오는 공수 훈련만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사람들은 스탈린 때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를 해."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 '부닌, 톨스토이를 읽거라. 이 책들이 사람들을구원한단다. 대체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야 하는 거야? 왜 그런 건 전해지지않으면서 문 손잡이를 항문에 박아 넣고 비닐봉투를 머리에 씌우는 건 대대로전해져 내려오느냔 말이야?"
"그 사람들의 월급이 2~3배 오를 거야. 그 사람들이 총을 쏠까 봐 두려워."
"내가 군대에서 깨달은 건 무기를 좋아한다는 거였어. 난 책 더미 사이에서자란 전형적인 공부벌레였는데 말이야. 난 이제 권총을 갖고 싶어. 멋진 물건이야! 백 년이 흐르는 동안 손에 알맞게 맞춰졌어. 손에 쥐면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난 총을 만지고 소제하고 기름칠을 하는 일을 분명 좋아했을 거야. 난 그 냄새가 좋아.”
"어떻게 생각해, 혁명이 시작될까?"
주황색은 눈 위에 개새끼가 지린 오줌 색이야. 하지만 그 색깔이 붉은색으로 변할 수도 있어.”
“우리는 갑니다.”
첫댓글 미쳤네.. 미친 나라들 진짜 목숨 걸고 시위하는구나 ㅠㅠ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