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 김명인
예고된 일기라면
지경쯤에서 왜 눈보라와 마주치지 않았을까.
대신 구암 저쪽까지
밀려갔다 돌아오면서 더 자욱한 안개비.
방파제 앞에서 엔진을 끄고
비로소 살아나는 파도 소리 속으로 한 발 들이밀면
느리게, 정지되는 바다의 질문이 되어
이마 높이로 내리는 갈매기 두어 마리.
포말 너머에서 또 대답한다.
잠시 머물다 떠날 때 정작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눈을 만난다.
그렇다, 믿음과 배반을
한 필름으로 인화하더라도 그때 마음속이
무엇으로 클로즈업되던가.
잠결엔 듯 불러내는
삭망의 달빛에 밤새도록 시달리다
나는 等高를 허문 신새벽의 구릉 며칠째
더듬었다. 무슨 경계가 이렇게 어슴한지.
비와 눈의 길을 그때그때 선택하더라도
인적 끊긴 산길을
자욱한 봄눈 안고 혼자 걸어 내려오면서
피해갈 수만 있다면
이 적막 속에 내가 다시 서 있지 않기를,
홀로운 생이 한계 너머로 뻗어 있으면 어쩌나.
나는 절벽에 부딪혀 쌓지를 못하고
골짜기 아래로만 길을 트는 눈보라를
온몸으로 뚫는다. 마음은 무수한 지경을 지나지만
발 아래 수곡 죄다 잠가놓는
때아닌 눈의 홍수라, 선을 넘는 몸이 새삼 느껴져도
쌓이기 전에 물이 되므로. 우리 모두
휩쓸려 사라질 봄눈이므로.
- 김명인 시집 <바다의 아코디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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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초봄 보리를 보면 겨울 속으로 트였던 희열의
길 환하다. 새 세상 활짝 열어젖히기 위해
잠시 엄동 아래로 돌아갔던 뿌리의 폭죽
모든 씨앗과 노래는 얼음 속에서도
함께 소용돌이 친다.
2002년 驚蟄 김명인
[출처] 김명인 시인 3|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