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말부터 은밀히 원균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민주화 세력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 독재자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원균을 의도적으로 간신으로 악마로 민족의 공적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엄연히 이순신과 같이 선무일등공신으로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또 한 사람의 영웅을 간신으로 만드느냐는 주장이었다.
80년대 들어 한층 더 대담하게 나갔다. 이순신 못지 않게 원균도 훌륭한 장군이었다는 말이 등장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평균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순신의 일기와 그의 후원자인 유성룡의 징비록을 일방적으로 믿지 말고, 역사의 행간을 읽으면 이순신이 장수로선 훌륭하긴 하지만, 완벽한 인격체로 신격화된 것과는 달리 오히려 인간성은 원균이 나은 것으로 발전한다.
90년대에 마침내 '원균 그리고 원균'이란 소설이 나온다. 여기 보면 이순신은 원균과 그 아들의 공을 가로챈 파렴치범으로 나온다. 1996년에는 마침내 김탁환의 '불멸'이 나온다. 2004년 7월부터 KBS에서 방영 예정인 100부작이란 대하드라마 '이순신'의 원본 중 하나이다. (나머지 하나는 김훈의 '칼의 노래') 이 소설에서는 이순신이 원균한테 맥도 못 춘다. 남해현의 식량 창고를 부하와 짜고 불지른 다음 왜군의 첩자가 불질렀다고 하다가 원균한테 '왜놈보다 비열한 인간'이라는 폭언을 듣고 폭행까지 당하고도 꼼짝 못한다.
원균은 이순신 장군이 없으면 전혀 전쟁을 못했다. 그 증거가 바로 칠천량 패전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임진년 이후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면서 고심참담하게 건조한 전선과 잘 훈련된 수군을, 조선군대의 반이 넘는 전력을 단 하룻밤에 전멸시키고 저 자신도 전사하게 되는 칠천량 패전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키고” 있는 탓에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죽었고(‘불멸’ 4권 135쪽) (‘불멸’ 4권 232쪽). (송우혜)
이 패전으로 조선은 곡창 지대 호남까지 다 빼앗기고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겁이 나서 도망간 바람에 남은 전선 12척밖에 없었다. 호남의 식량과 직산과 보은에 집결한 왜군 10만명, 왜선 1,000 척 중에 반만 동원해도 왜의 수군은 무인지경으로 한강으로 조총과 군량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 의의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 열두 척으로 이순신 장군이 전세계 해전 사상 최대의 불가사의인 명량대첩을 이끌지 못했으면, 조선 전체가 이 당시 일본에 늦어도 한 달 안에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원균의 패전도 조정과 권율의 무리한 독전 때문에 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선조와 원균의 인척이자 선조의 사돈인 윤두수의 주장이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아예 백의종군하느라 아무 힘도 없었던, 심지어 권율로부터도 이 때는 무시당했었는데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켜서' 원균이 패전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원균이 죽은 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거둔 것은 전날 밤 꿈에 “원균처럼 싸우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불멸’ 4권 232쪽). (송우혜)
이에 따르면 원균은 전신(戰神)이고 이순신은 비루하고 우둔한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 '불멸'의 이름도 그렇다.
더구나 명량대첩 뒤 이순신의 부하들은 ‘역모’를 꾸미면서 이순신을 옹위하여 거병할 준비를 하고 이순신도 거사를 고려하며 “휘청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서인의 거두 윤두수(이순신 폄훼에 앞장섰던 인물임)가 이순신에게 서찰을 보내어 ‘왕실과 만백성을 위해’ 전사(戰死)를 가장하여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길’을 가라고 강력하게 권했고, 그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 이순신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불멸’ 4권 329∼373쪽) (송우혜)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전혀 이순신이 아니다. 주인공은 '위대한' 원균이다.
이 정도면 김탁환이란 작자가 얼마나 독창적인(?) 인간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원균이 김일성이라면 이순신은 박정희인데, 오늘날 조선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보다 무려 10배나 잘 살게 만들어 한국인이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누구든지 중국에 가서 목에 힘을 주게 만든 박정희는 인간 말종으로 매도하고, 중국의 개돼지가 되더라도 너도 나도 조국을 떠날 기회만 노리는 나라를 만든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떠받드는 자들과 똑같은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소설을 원본으로 KBS는 100부작을 만든다고 한다!
이제부터 원균이 어떠한 사람인지 이순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하나하나 밝혀 보기로 한다.
이순신은 윗사람에겐 강직하고 아랫사람에겐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불의를 보면 아무리 상관이라도 직언을 했다. 그래서 32살이라는 아주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했지만, 승진이 지지부진했다. 임진란 전에도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고 백의종군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한 마디 변명을 한 적이 없었다. 사필귀정, 속으로 이 말을 믿고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 인격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라 할 수가 없다. 체계화한 철학은 없었지만, 인격 자체를 보면 석가나 공자를 능가할 정도이다. 그가 없는 데서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할 정도였다.
얼마나 인품이 훌륭했으면, 명의 도독 진린도 그에게 군권을 일임했을까. 육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명은 원군으로 왔다는 것을 기화로 조선을 종 다루듯 했고 선조는 명의 일개 장군에게도 큰절을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명의 수군들은 행패를 부리다가 아예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명령으로 솥 단지를 들고 이사를 가려고 하자, 진린이 깜짝 놀라 충무공을 말렸고 그 이후로 전시 지휘권만이 아니라 평시 지휘권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육지와는 달리 바다에서는 명의 군대가 전혀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잘못하면 이순신 장군이 직접 군법에 따라 엄히 다스렸던 것이다. 현대전으로 말하면, 6·25 때 미국의 맥아더로부터 작전권과 지휘권과 사법권을 넘겨 받아 모든 작전을 우리 마음대로 하고 미군의 범죄를 국내법으로 다스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원균을 두둔하는 무리들은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챘다고 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진린에게도 공을 은근슬쩍 넘겨 줌으로써 그 인품에 감복하여 저 콧대 높은 대명의 진린이 형식적 예우를 받으며 이순신에게 지휘권을 다 넘겼던 것이다. 조선 사람은 임금도 자기 수하로 알고 거만을 떨던 명의 장수가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먼 친척인 율곡도 끝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청탁으로 비쳐질까 봐서였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서 어느 쪽이든지 줄을 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에 그는 끝내 어느 편에도 들지 않았다. 동인의 유성룡이 그를 천거하고 뒤를 봐 주었지만, 그것은 임진란 1년 2개월 전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적정을 살피고 와서 전쟁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장수를 추천하라고 하여 추천했을 따름이다. 이 때 이순신의 나이는 벌써 47세. 몇 단계 품계를 뛰어넘었다고 하나, 전라좌수영(5관 5포)보다 세 배나 큰 전라우수영(15관 12포)의 수사 이억기가 겨우 31세였던 것을 감안하면, 늦어도 엄청 늦은 출세였다.
이렇게 강직하고 불편부당한 분이었기에 유성룡의 정적이었던 서인의 이항복, 기자헌 등도 일면식도 없던 이순신을 적극 옹호했던 것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직접 도체찰사로 이순신 장군을 만나고 그 진영을 일일이 점검한 이원익도 선조가 교묘하게 유도심문을 했지만, 이순신을 극찬했던 것이다. 그는 왕의 종친으로 영의정까지 역임했지만,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초가 한 채밖에 없었던 청렴한 사람이다. 이렇게 인품이 훌륭하고 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 보는 법이다.
군인은 무엇보다 전적으로 평가를 받는 법인데, 이순신 장군은 식량 한 톨 화살 한 자루 군사 한 명 보내 주지 않고 헐뜯기만 하고 전쟁 중에도 도리어 중앙에서 식량을 징발해 가고 관할 지역의 장정들마저 육군으로 징발해 가는 등 최악의 조건에서도 전쟁에서 단 한 번 진 적이 없다. 그것도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야구로 말하면 하나같이 퍼펙트 게임 내지 완봉승이었다. 7년 전쟁에서 장군의 말을 듣지 않다가 좌초한 한 척 외에는 단 한 척도 잃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선조는 원균을 시종일관 두둔했을까.
내가 몰래 들은 바에 따르면 청병(請兵)과 수전에서의 원균의 공이 이순신보다 더 크다. 순신은 원균을 따라갔을 뿐이다. (선조실록 29년 11월 기해)
왜란 초기에 균은 이순신에게 청병했으나 순신은 스스로 출전하지 않았다. 적을 치기 위해 균은 싸울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언제나 선봉이 되어 용전분투하여 공을 세웠다. 순신과 일체가 되어 적장의 누선을 포획했는데도 불구하고 반대로 그 공을 순신에게 빼앗겼다. ... 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알면서도 부득이 출전했기 때문에 3도 수군이 전멸한 것이다. 균은 나라를 위해 죽었고 그의 용맹은 3군의 으뜸이며 그의 지혜 역시 최고다. (선조실록 36년 6월 신해)
그러니까 원균은 아무리 패전해도 잘못이 없다. 도와 달라고 한 것만으로 이순신보다 큰 공이다, 라고 선조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대개 원균을 간신에서 충신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이 말이 인용된다.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임을 하나하나 밝혀 보자.
먼저 청병(請兵)에 대해서.
임진란 당시의 수군 편제는 제승방략제(制勝方略制)였다. 이것은 을묘왜변(1555년) 이후 진관법(鎭管法)을 고친 체제였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큰 특징이 있다. 첫째는 지휘체계의 일원화. 진관법에서는 지휘체계가 이원체계였다. 곧 수사는 지위는 높았지만, 첨사가 일선 지휘자였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승방략제에서는 수사가 자기 관하의 만호와 첨사들을 직접 관장했다. 첨사는 만호보다 큰 진의 단위 지휘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둘째는 각 수사는 각자의 관할 지역만 지켰다. 그 이유는 고려말 이래 왜구는 전면전이 아니고 항상 취약한 지점을 골라 약탈했기 때문에 저 쪽에서 왜구가 침탈했다고 해서 그 쪽으로 쫓아가면 언제 또 이쪽으로 딴 왜구가 쳐들어올지 몰라서 임금의 명령이 없이는 관할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상부에서 명령 없이 타 관할 지역으로 군사를 내었다가 만약 그 지역이 침략 당하면 그 도의 수사는 중벌을 받게 되는 군제였다.
선조는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청병한 것을 이순신이 안 들어 주었다고 오히려 원균을 두둔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이 4월 13일에 쳐들어온 지 5일 후인 4월 18일에 원균으로부터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공문을 받았다.(난중일기 임진 4월 18일) 그 후에는 연락이 끊어졌다가 4월 29일에야 회신을 받았다. 그 사이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4월 18일에 원균에게 적 수군을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4월 19일 이순신에게 공문을 보냈고 이를 4월 20일에 받았다. 이 공문에서 김수는 전라좌수군으로 하여금 경상우수군을 구원해 달라고 해 달라고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 온 날은 4월 27일이었다. 그리하여 첫 전투인 옥포해전은 5월 7일에 치르게 된다. 원균은 5월 5일에 만나기로 했으나 5월 6일에 전선을 딱 한 척 몰고 나타났다. 경상우수영은 8관 16포로 전라좌수영 5관 5포보다 무려 2.4배나 컸지만,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만 24척을 출동시켰지만, 그는 고작 1척만 갖고 약속 기일을 하루 늦춰 나타난 것이다.
선조는 원균에게 청병의 공이 있다고 우기지만, 그것은 국법에 어긋난 일이다. 원균에겐 그럴 자격이 전혀 없었다. 관찰사도 그런 명령을 내릴 수가 없어서 이 전쟁이 예전의 약탈전이 아니라 정규전임을 파악하여 조정에 청병을 부탁하는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선조는 이런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영남을 보냈지만, 이순신이 오지 않아서 땅을 치고 울었다는 내용을 갖고 원균을 두둔하는 자들이 많다. 전혀 이 당시 군제를 모르는 자들이다.
청병을 하면 그게 승전의 공이 되는가? 그러면 명군에게 청병한 사신은 명군 이여송보다 공이 더 큰가? 명군에게는 일개 장수에게도 버선발로 뛰어나가 무릎을 꿇던 선조가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이라고 치자. 그러면 원균은 왜 경상좌수영을 돕지 않았는가? 경상좌수사 박홍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후세에 아무 말이 없다. 왜? 그 옆에 이순신 장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경상우수영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왜적은 감히 육지에 상륙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거기는 전선도 두 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정보전에 귀신 탄복할 재주를 가진 이순신 장군이었기 때문에 만약 거기 있었으면 일찌감치 왜군이 침략하는 것을 알아채고 조정에 연락하여 명령을 받아 박홍과 함께 전쟁에 대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은 박홍이 달아나면서 올린 장계가 도착한 4월 17일이었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웠다는데, 그런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적의 귀나 베어 전공을 가로챘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나중에 관내의 전선 3척이 나중에 합류하여 4척만 거느린 말뿐인 경상우수사였다. 그는 만호나 첨사와 마찬가지였다. 군사가 없는 패장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적었다. 그럼에도 그는 패전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다. 선조와 윤두수와 김응남 비호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논공행상 할 때도 조정에서는 원균의 죄를 크게 물어야 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백번 양보해도 선무3등공신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하옥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원균에게 벌 주면 그것이 그렇게 만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극력 반대했다.
명량대첩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고 최후의 노량대첩도 깎아 내렸다.
수군이 (노량진 해전에서) 대첩했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말 같아서 믿어지지 않는다. (선조실록 32년 2월 임자)
그러나 직접 보고 온 좌의정 이덕형이 바로 논박한다.
수군이 대첩한 것은 허언이 아닙니다. 소신이 종사관 정곡을 현지에 보내어 탐사하게 했더니, 부서진 배의 목판이 바다를 덮고 흘렀으며, 포구에는 왜의 시체가 쌓여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관음포(노량) 해전이 장한 대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실록 32년 2월 임자)
이 당시 장수의 공에 대한 제도도 선조는 무시하고 있다.
살수대첩 하면 을지문덕, 귀주대첩하면 강감찬, 행주대첩하면 권율--누구나 이렇게 알고 있다. 그 밑의 장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군사전문가 외에는 없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이 당시는 어떤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 공은 최고 장수 혼자의 몫이었다. 군사도 없는 패장과 공을 나란히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선조는 이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 실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는 원균의 패전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전선 4척밖에 없는 그를 깍듯이 같은 수사로 대접했다. 나중에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가 된 다음에도 그를 깍듯이 대접하고 장계를 올릴 때는 꼭 그의 전공을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개동(개똥), 화리동(파리똥)이라고 하여 천민 출신으로 공을 세우면 그 병졸의 공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자신의 공은 전혀 쓰지 않았다. 그냥 자기도 싸웠다, 라고 겸손하기 짝이 없게 말했던 것이다. 공은 모두 아랫사람에게 돌렸던 것이다.
원균은 달랑 전선 한 척(충무공전서에는 협선 한 척이라고 기록)을 끌고 온 주제에 적선을 30여척 깨뜨렸다느니, 10척을 깨뜨렸느니 등의 말을 흘렸고, 이것을 원균 영웅 만들기로 줄기차게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 살펴본다.
제승방략제에 의해 경상우수영은 이미 밝혔듯이 8관 16포였기 때문에 약 200명이 타는 전선인 판옥선이 44척에 연락, 척후 등을 맡은 5명 내지 6명이 타는 협선 29척이었다. 이 중에 원균이 나중에 끌고 온 것은 전선 4척에 협선 2척이었다. (전라좌수영은 판옥전선 24척, 협선 15척). 자, 그 많은 전선은 다 어디에 갔는가? 원균을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된 자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도외시한다. 단지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10척이니 30척이니 적선을 깨뜨렸다는 말만 되뇌고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원균은 판옥전선 40척에 협선 27척을 잃어 버렸다. 군사만 해도 8천여명이다. 만약 전투에서 잃었다면 대패이다. 그랬다면 일본측에 이것이 기록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전혀 그런 기록이 없다.
원균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은 국보 132호로 지정된 유성룡의 <징비록>을 이순신 편이라고 하여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라. 그의 속 깊음과 관대함과 충정과 용기와 지혜가 곳곳에 배어있다. 그는 조정 대신 중에 홀로 군사에도 해박하다. 평양과 한양에서 멋진 전술전략을 여러 번 냈다. 극심한 치질을 앓고 있으면서도 전선에서 또는 조정에서 그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정신을 차려서 두루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명 재상이었다.
징비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적이 상륙하자, 원균은 적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출전하려 하지 않고 경상 우수군의 전선 1백여 척을 모조리 자침시키고 화포와 군기를 바다 속에 수장했다. 홀로 수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과 더불어 4척의 배에 타고 곤양 바다 입구에 이르러 상륙하여 적을 피하려 했다. 이에 수군 1만여 명이 모두 무너졌다. (징비록)
징비록마저 믿지 못하겠으면, 이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인 경상관찰사 김수의 기록을 보자. 그는 원균에게 적에 대항해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조정에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상우수영을 도와 주러 가게 하라고 품계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직접 목격한 바는 이러하다.
경상우수영, 조라포, 지세포, 영등포라고 일컬어지는 진은 이미 텅 비었다. ... 수사 원균은 수군의 대장인데도 불구하고 제장을 거느리고 내지로 물러나 적을 피했으며, 그의 우후 우응진을 시켜 관고에 불태우게 했으므로 2백년 동안 쌓아 둔 재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렸다. (선조실록 25년 6월 병진)
그는 전혀 싸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용기는 무슨 용기! 천하의 겁쟁이였다. 스스로 전라좌수영의 두 배나 되는 군선을 싸움 한 번 않고 불지르고 가라앉히고 수군을 해체하고 제 목숨만 살려고 도망간 것이다. 그것도 우수영에서 무려 2백리나 떨어진 사천까지 도망갔다. 그러하건만 소설 '불멸'에서는 이순신이 작전상 불태우고 이를 전혀 숨기지 않은 남해현의 창고를 기가 막힌 호재로 삼아, 이것을 근거로 이순신을 왜놈보다 못하다고 욕하고 때린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이렇게 엉터리로 기록할 수가 없다. 역사 소설은 기록이 없는 부분을 상상으로 처리하는 거지 이렇게 명백히 기록에 남아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초등학생의 분별력이면 알 수 있는 너무 빤한 일을 전지적 작가의 특권을 휘둘러 환타지 소설도 아니고 무협소설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닌데, 이렇게 정반대로 간신을 영웅으로 만들고 영웅을 간신으로 만들면 안 된다.
원균은 자신을 옹호하려고 왜선이 무려 500척이나 된다고 이순신에게 알렸다. 전라좌수사는 경상우수사의 반밖에 안 되는 군선을 보유하고 있고, 경상도 해역은 알지도 못하는데, 경상우도의 군선이 전선 4척, 협선 2척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500척을 상대하라고 하는 건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절대 적을 얕보지도 않는 이순신은 첫 출전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수에서 언제 어디에서 적에게 기습을 당할지 몰라 감히 지름길을 택하지 못하고 5월 4일 한밤중(축시 오전 2시)에 출선하여 철저히 수색하면서 무려 310km를 항해해서 거제도의 옥포에 5월 7일에 도착한다. 그 전에 당포에서 원균을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그가 나타나지 않아 하루 종일 쾌속선을 보내 그를 찾았다. 그는 그 다음날에야 한산도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 당포에서는 한산도와 칠천량 사이에 일본군이 숨어 있을지 몰라, 빙 둘러서 거제도 옥포에 다다른다. 500척이나 된다는 왜선과 싸우러 겨우 전선 24척, 협선 15척으로 싸우러 가니,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오죽했으면 군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해가 될 뿐인 포작선 곧 어선을 46척이나 데려갔을까. 무엇보다 지리를 잘 아는 경상우수영에서 전혀 도움을 못 받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전략 전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당시의 이순신의 출전은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제갈공명이 조조를 치려고 두 번이나 전력을 기울여 쳐들어가지만, 사마의가 지리의 이점을 이용해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분사하고 마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원균과 선조는 입만 열면 청병의 공이라고 하지만, 왜선 500척에 아군 39척이라면 절대 공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수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다려야 했다. 지리를 이용해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기습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저 유명한 정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하고 군심을 하나로 모아 새벽 두 시에 수색을 철저히 하면서 출진한다.
영남은 이미 적에게 떨어졌다. 영남도 우리 나라 땅이며, 호남도 우리 나라 땅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영남 땅을 월나라나 진나라를 업신여기듯이 버려 둘 수 있느냐. 게다가 울타리 밖의 적은 막기가 쉽고 울타리 안의 적은 막기가 매우 어려운 법인데 말이다. 지금 적이 아직 호남을 침범하지 않았으니 이 때야말로 급히 수군을 지휘하여 적을 거꾸로 공격할 기회이다.(은봉전서)
임금은 천 리 밖의 전쟁 소식에 혼비백산하여 한강을 앞에 둔 천험의 도성을 버리고 백성의 돌팔매질을 받으며 도망가면서, 이미 경상좌우수영의 수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이순신에게 출전을 명령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선 4척만 달랑 끌고 온 원균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였지만, 1년 2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통해 수전을 육전처럼 자유자재로 수행한 직속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연전연승했는데, 승전의 공을 오히려 원균에게 더 주었던 것이다. 사적인 인간 관계와 절대권력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극력 원균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도 만만찮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다시 대거 등장한 것을 보면, 인간성이란 것이 얼마나 바뀌기 힘든지 남을 헐뜯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성리학의 부정적인 요소가 얼마나 끈질긴지 알 만하다.
그러나 다행히 왜선은 26척이 옥포에 정박해 있었고 왜군은 섬에 올라가 노략질하느라 정신없었다. 여기서도 원균이 적과 싸웠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거짓이었나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만약 적들이 한 번이라도 조선 수군과 싸운 적이 있었다면 그렇게 경계를 소홀히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지리를 모르는 적지에서 마음껏 분탕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심조심 와 보니까, 어떤 포구에도 조선 수군이 개미 새끼 한 마리 비치지 않자, 이미 개전한 지 20일이 지났기 때문에 안심하고 군선을 포구에 대 놓고 노략질했던 것이다. 이 때 왜장은 등당고호였는데, 그의 수군은 선봉인 만큼 정예 중의 정예였지만, 전투를 한 번도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여 허겁지겁 함선에 올라 분전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지휘에 휘말려 단 한 척도 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간신히 상륙하여 도주했다.
이제 선조가 원균을 극력 두둔하여 이순신과 동급으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삼는 과정을 살펴본다. 원균을 높이는 자들이 제일 자주 인용하는 부분이다.
원균이 패전한 후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으나 내 뜻은 그렇지 않으며, 균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모든 것을 논하며 원균의 패전만을 들추어 그를 무함하고 있다. 원래 영웅은 성패만을 가지고 논하는 법이 아니다. 왜란 초에 원균은 이순신과 더불어 마음을 합하여 적을 쳤으며, 싸움 때마다 반드시 선봉에 나섰으니 그가 용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한산(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을 가지고 앞을 다투어 그를 나무라고 있는데, 이는 그의 행적을 몰라서 하는 짓이다. 즉 조정이 그에게 진격을 독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장계를 보면 안골포가 부산 앞에 있어서 부산으로 진격할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먼저 육군으로 하여금 안골포의 적을 몰아 낸 후에야만 수군이 부산으로 진격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원수가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으므로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으나 부득이 진격했기 때문에 자패한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 34년 정월 병진)
패전은 병가지상사이긴 하다. 그러나 패전도 패전 나름이다. 수 양제가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한 후 마침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원균의 패전은 곧바로 조선의 운명을 끝장내게 할 생각만 해도 끔찍한 패전이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패전으로 이순신 장군 덕에 온전했던 호남을 다 잃어 버렸던 것이다. 바다는 무인지경. 이미 직산과 보은에는 10만명의 일본 정병이 집결해 있었다. 한성에서는 공포의 대왕이 엄습했다. 피난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들이 그냥 물러났다. 직산에서 명이 왜병을 무찔러서 그런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명의 해생이 지휘하는 2천명이 왜의 척후병 500명 중에 31명을 목 벤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조는 감격하여 명의 경리 양호에게 버선발에 뛰어나가 큰절을 올리려고 했다. 양호는 깜짝 놀라 자기는 공이 없다며 이순신 장군에게 상을 내리라고 했다. 선조는 발끈하면서 그자는 자기 직분을 다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구국의 명장 이순신>에서 최석남이 밝힌 대로 명량대첩으로 바닷길이 다시 막혀서 할 수 없이 왜군이 퇴각했던 것이다.
명량대첩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한 달 안에 일본에 멸망했음에 틀림없다. 그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포상조차 않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용감한 장수는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그는 적극 영남으로 도와 주러 가자고 주장했던 장수였다. 아깝게 그는 부산포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섰다가 목숨을 잃고 만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욕을 하지 않는다. 누구나 칭찬한다.
패전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욕을 얻어 먹지 않는다. 동정이라도 받는다. 원균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왜적의 간첩 역할과 똑같은 짓을 하여 이순신 장군을 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에 그가 한 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용렬한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는 이순신 장군이 아예 거처하면서 문을 열어 놓고 누구의 의견이든지 듣고 제장과 작전회의를 하던 운주당(運籌堂--현재는 제승당이란 이름으로 불림)을 폐쇄했다. (유성룡)
둘째, 그는 수군을 반이나 줄였다. (권율)
셋째, 그는 조정으로 길이 가득할 정도로 뇌물을 바쳤다. (징비록)
아마 그는 군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의 병역을 면제시켜 주었던 것 같다.
마침내 그가 전쟁에 나서게 되었을 때 그의 전선은 190명이 탈 전선에 겨우 94명이 탔다. 노를 젓는 사람만 127명이 필요한데, 겨우 63명이 담당했다. 속도는 충무공이 있을 때보다 반으로 줄었고 기진맥진한 군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선조가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다고 극찬한 원균의 실상이다.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와 칠천량 사이의 해협 곧 거제대교가 놓인 곳을 철통같이 지키던 것을 늘 보아 놓고도 퇴로를 확보하지 않았다. 배설이 그 쪽으로 도망가고 나서 바로 그 곳은 왜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뿐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의 대포를 이용하여 적의 조총 사거리에 들지 않기 위해 항상 밤에 출발하여 낮에 기습했는데, 도리어 독 안에 든 쥐가 된데다 밤에 전투를 벌이게 되어 아군의 장점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손 한 번 못 쓰고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이었고 방화였고 전쟁놀이였다. 전선 102척, 협선 102척이 불탔던 것이다. 수장된 군인만 만여 명.
원균은 일찍이 장계를 보내어 자기라면 당장 적의 소굴에 쳐들어가서 요절을 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막상 통제사가 되자 꼼짝도 않고 육군 타령만 했다. 그러면서 군인들을 반이나 내쫓았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금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딱 한 번 군대를 끌고 갔을 뿐, 적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버티고 있다가 '항명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말이다. 막상 통제사가 되고부터는 그 많던 용기가 어디로 갔는지, 마침내 도원수에게 곤장을 맞고야 바다로 나간 것이다. 오죽 했으면 삼군 통제사에게 곤장을 쳤을까.
왜란 후 논공행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때, 3도 수군을 전멸시킨 원균에게 중죄를 내려야한다는 중론이 일었다. 이에 제일 앞장선 사람이 도체찰사로 이전에 일면식도 없던 이순신 장군을 직접 보고 꼼꼼히 부대를 시찰한 후에 그에게 감복한 이덕형이었다. 그는 남인이었지만, 북인과도 친하게 지낸 아주 공평하고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선조가 강력히 제제를 가했다. '역신'이니 '불충'이니 라는 말을 하며 도리어 협박했다. 까딱 잘못하면 삼족이 멸하게 될 어마어마한 말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공신도감에서 그를 선무2등공신으로 올렸다. 왕은 그래도 성에 안 찼다. 이순신과 같이 선무1등공신으로 책정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공신도감이었던 이항복이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원균은 왜란 초에 수군이 없는 장수였으나 해상대전(海上大戰)에 참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에 3도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이순신, 권율과 동률의 선무1등공신으로 책정하기 어려웠으므로 2등공신으로 내려 책정한 것이다. 이제 상감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1등공신으로 승격하여 책정하겠다. (선조실록 36년 6월 신해)
왜 이순신 장군은 임금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딱 한 번 갔다 온 것 외에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것은 적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첫째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사이가 안 좋아 소서행장이 가등청정의 행로를 알려 준다며 길목을 지키라는 말이 이간책이란 걸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듣고 가게 되면 완전히 독 안에 든 쥐가 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다도해의 수많은 섬에 왜적이 그 튼튼한 왜성을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풍신수길이 '이순신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어떡하든지 그를 그 자리에서 몰아내라는 것이다. 한국인이 파당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이를 기가 막히게 이용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를 유인하여 섬과 섬 사이, 만과 섬 사이에 가두고 좁은 장소에서 조총의 사거리에 몰아넣어 그를 죽이라는 것이다.
정보전에서 항상 몇 수 위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실력을 길렀던 것이다. 1593년 6월, 적은 진해만 일대에 9백여척을 전선을 집결시켰으나 우리 연합함대는 겨우 104척밖에 안 되었다. 열세를 통감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39척을 더 건조했던 것이다. 풍신수길과 이순신 장군의 인내력 싸움이었다. 언젠가는 일본이 물러갈 것이고 그 순간 쓸어 버린다는 계획이었다. 한 명도 살려서 돌려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풍신수길은 미끼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다. 아니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첩보전을 펼쳤던 것이다. 선조와 원균과 김응남, 김응서, 황신, 윤두수 등이 군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공명심과 시기심만 많았던 이들이 마침내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명장을 전쟁 중에 압송한 것이다.
풍신수길은 그것으로 전쟁이 끝난 줄 알았다. 원균이 어떠한 자인지는 그가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은 빈 배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척의 망실도 없이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것이다. 단숨에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했다. 충청도까지 바로 치고 올라갔다. 이제 다 된 밥을 떠먹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귀신 곡할 것이 겨우 12척 남은 전선으로 이순신은 200척과 싸워 133척을 깨뜨린 것이다! 풍신수길의 수명이 10년 짧아졌을 것이다. 아마 그는 홧병에 그 다음해에 죽었을 것이다.
명량대첩의 승리가 얼마나 장대한 드라마인지 모른다. 누가 생각해도 이건 싸움이 안 되니까, 수군을 없애라는 말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12척 대 1,000척, 이건 누가 보아도 싸움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당백은 그냥 말이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선조도 그런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담대하기 짝이 없었다.
12척이 아직 남아 있고 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에 적이 함부로 까불지 못할 것입니다.
(충무공 전서)
적을 절대 얕보지 않지만, 적에게 절대 겁을 먹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진정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인걸이었다. 적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백만대군이 몰려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12척도 12척이지만, 무엇보다 군사가 없었다. 최소한 2,000명이 필요한데, 그에겐 병사가 10여명밖에 없었다. 군량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호남도 적의 치하에 들어갔다.
축구에서 흔히 하는 말, '공은 놓쳐도 선수는 놓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를 역이용했다. 적의 이목을 속여 전선 12척에 신경을 못 쓰고 자신에게 신경을 쓰게 했다. 그래서 무려 330km를 빙빙 돌아다니며 적과 숨바꼭질하면서 군량을 모으고 군사를 모았다. 이렇게 모은 오합지졸과 피난민이 나눠 주는 눈물 젖은 쌀과 보리로 12척을 거두어 기적적인 승리를 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난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현대 심리학에 세뇌된 사람은 이를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까, 떠오른 영감이라고 보는데, 과연 그럴지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이 신인(神人)이 하나님이라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하나님이 직접 내려보내고 보살펴준 사람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 서면,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 앞에선 소인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 가당찮게 김탁환은 이 때의 신인을 원균이라고 한다. 인간이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원균은 선조 이하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호의호식하면서 아름다운 말을 골라하면서 이 세상 어떤 사람의 공도 인정할 줄 모르던 소인배들이다. 자신이 엉터리니까 다른 사람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위선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공로는 그저 운이 좋아서 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 양반의 99%가 그런 자들이었다. 이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항상 남 탓을 한다. 절대 책임지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고 공이 있는 사람을 모함하여 기어코 거꾸러뜨린다. 임진란으로 이들이 몰락했어야만 했는데, 병자호란을 겪고 일제 35년을 겪고 6·25를 겪고도 이른바 배운 자들 중에 이런 자들이 이른바 민주화 바람을 타고 급격히 늘고 있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마침내 이들 중 상당수가 알게 모르게 철저히 남 탓을 하는 주사파가 되었다.
전국민을 노예로 만든 김일성 부자는 찬양하고 전국민의 70%를 중산층으로 만든 박정희는 갈아 마시려고 한다. 만약 박정희가 김일성 부자처럼 전국민을 노예로 만들었으면, 아무도 그에게 감히 욕을 못할 것이다. 한 마디만 잘못하면 바로 수용소로 보냈을 테니까. 1만년 농업시대를 한 세대도 안 되어 산업시대로 바꾼 박정희는 언젠가 전국민이 영웅으로 받들 날이 올 것이다. 그런 그도 그 인격이라든지 온갖 역경을 딛고 이룬 일이라든지 무엇이든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하면 초라하기만 하다.
원균에 대한 당대와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살펴보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한산(칠천량 해전)에서 전패한 원균은 마땅히 저자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한다. 그리고 수군 장병들이 모두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균은 성질이 조포(粗暴)한 일개 무지한이다. 처음에 이순신과 더불어 공을 다투어 백방으로 무함, 순신을 몰아내고 스스로 대신 통제사가 되었으며, 밖으로는 큰소리치면서 단번에 적을 섬멸할 것같이 말했다. 지혜가 궁색하여 패전하자 배를 버리고 상륙 도주하여 수군 장병들을 모두 참살당하게 했다. 이와 같은 원균의 죄를 누가 책망해야 하는가? 한산에서 패전하자 호남이 이어 무너졌으며 호남이 무너지자 나라에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일을 목격하니 뇌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나는 것 같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4월 병진)
통제사 원균은 탐학하기가 그 유례가 없는 자이며 크게 군심을 잃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반하여 드디어 정유년에 한산 싸움에서 패하였다. ... 애석하구나, 조정이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케 하지 못한 것이. 만일 정유년에 순신을 통제사에서 면직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한산의 패전이 있었을 것이며, 호남과 호서를 적굴로 만들었을 것이냐. 아아, 애석하도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1월 무신)
참고로 이 선조실록의 총재관은 유성룡과 반대되는 서인 이항복이었으나 후에는 북인 기자헌이었다.
원균은 성질이 음흉하고 간교했으며 중앙과 지방의 많은 사람들과 연결을 지어 힘써 순신을 무함했다. 그는 언제나 말하기를 "처음에 순신이 오지 않으려 한 것을 내가 굳이 청병을 해서 왔으니 적을 무찌른 공은 내가 으뜸이다." (징비록)
소비포 권관 이영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영남의 여러 사격군이 거의 모두 굶어 죽었다 한다. 참담하여 차마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원 수사, 공연수, 이극함이 가로채 모두 사사로이 썼기 때문이라 한다. (은봉전서)
충청병사(임진란 중 한때 역임함)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한 데에 더하여 탐학한 자이다. 5월, 6월에 군사를 기한 전에 귀가시키고 곡물을 거두어 들여 농장 집으로 실어 갔으며, 또 잔혹한 형벌로 죽는 사람이 연이어지고 병들어 죽는 사람 역시 많아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한 도에 가득 찼다. (선조실록 선조 28년 8월 을묘)
원균은 특히 남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감히 이순신과 견줄 수 없다. 순신의 공은 수군의 으뜸이다. (백사집)
원균은 왜란 초에 겁이 나서 자기 수군의 모든 전선을 자침시키고 쥐새끼같이 멀리 후방으로 도망가서 숨었으나, 이순신의 은혜를 입어 군법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상을 받았는데, 뜻을 얻자 이순신을 무함하여 투옥시킨 후 자기가 통제사가 되어 전 수군을 전멸시킨 자이니 공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죄는 마땅히 주륙해야 한다. (은봉전서)
근거 없이 멀쩡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이순신 장군을 높이기 위해서 만약 원균이 잘한 것이 많았는데도 그렇게 했다면 그건 분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원균은 더 나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무일등공신이 되고 어쩌다가 그를 칭찬하고 이순신을 폄훼하는 글이 눈에 띄는 것은 선조와 윤두수 때문이다. 이렇게 공이 없는 사람들이 남을 모함해 공을 가로채 호의호식한 것이 조선 후기의 슬픈 역사이다. 조정의 신하들이 대체로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원흉이면서 아무도 처단되지 않고 도리어 사서오경에서 아름답게 말하는 것만 잘 배우고 익혀 말을 잘 못하는 의병과 장군들을 전란 중이나 전란 후에 남김없이 내쫓고 그 후에도 300년간이나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잘 먹고 잘 살았다.
마침내 왜병이 겨우 3천명이 쳐들어오자 싸움 한 번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대체로 지주계급으로 일제시대도 그런 대로 호의호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