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년간 떠돌던 광개토태왕이 정복했던 영토 그런데 이것이 진실로 밝혀지고 있는 이유이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어디서 어떻게 영토를 차지했을까?
제19대 영락이 즉위
백제는 대륙백제로 요서와 대만 일본을 정벌 후 영토가 어마어마한 영토다. 그래서 백제를 바다의나라 해상제국이라고 일컫기도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 즉위 당시에 고구려 군사훈련은 너무 뒤쳐졌다. 이러한 문제로 고구려는 자주자주 당했다. 그러나 고국양태왕시절부터는 요동성 점령한 만큼 그만큼 군사훈련이 계속이어졌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어떻게 훈련시켰는가?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사냥'이라는 목표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물론 마상훈련, 창법, 검술, 훈련등도 대련을 통한 훈련을 통했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이 고구려 궁수가 말을 타고 뒤에서 쏘는 것을 보면, 당시 고구려 궁기병과 개마무사들은 사냥을 통한 훈련으로 무장한 군사이라는 방증이다.
광개토태왕이 이렇게 훈련 시킨 이유는 이렇다.
실전같은 전쟁 실전같은 경험을 통해 고구려군이 실전에서도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서 이기겠다는 것, 적이 아무리 유리하게 하여도, 고구려의 군사들은 미리 알아채고 역이용하는 방식이 적용될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역시 철기도 발달됬다.
동아시아에서 최강 개마무사라는 의미는 그만큼 옛 다물정신의 47대 오열가가 이끈 단군조선의 철기를 이어받아, 고조선 정통을 인정받으면서 철기를 받은 것이다.
개마무사는 고구려의 전진부대인셈이다. 말해서 연개소문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이러한 개마무사로 적들을 무찌르기도 했다.
ㅈ자 이제 됬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1.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거란정벌
고구려광개토태왕릉비를 자세히보면 염수(鹽水)가 나온다. 염수는 시라무렌강 즉 거란이 있는 지역이다.
당시 거란은 유목출신이면서 무역을 말을 통해 이루어졋다. 이러한 광개토태왕에게는 소금이 필요했다. 단순히 거란정벌이라기 보다 고구려는 바닷가에서 소금구하기가 힘이들었으며, 고구려의 소금은 날로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것도 이유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이에 이런점을 고치기 위해, 거란을 정벌한 것이다.
그 이후 고구려는 소금을 거란으로부터 가져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도 했다.
2.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만리장성을 넘나들었다?
사실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을 두고 논란거리이다.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정벌을 목표로 후연의 모용희와 대결을 펼친다.
베이징 북경은 고구려의 영토이다. 그만큼 고구려는 후연과 매우 가까운 위치이다.
숙군성 전투가 있었다. 고구려는 숙군성을 점령하기 위해 천(내천)을 건너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이 건너가자는 것이다. 그때 숙군성은 점령하기 힘들었다. 워낙 후연의 거세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성을 점령하기 위해 에워쌓고, 성에 들어오는 물길을 차단하자, 후연의 숙군성내 군사들이 아우성쳤다. 결국에 후연의 숙군성이 문이 열어지자, 점령시켰다.
현재 숙군성 위치는 동진 위의 국경지대쯔음이다.
만리장성을 안넘었냐고 묻는데, 사실 광개토태왕은 넘어갔다.
3.백제 정벌
백제는 고구려 고국원태왕(고구려제16대왕)을 죽인 원수의나라이다.
비록 배다른 형제이지만, 고구려가 형이면 백제는 아우인셈이다. 물론 유리왕시절까진 친선을 도모한 나라이다. 하지만 근초고왕이 백제영토를 넓히면서부터 시작이 삐걱됬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제일 첫번째로 백제를 쳤다. 고국원왕의 복수를 위해서
백제의 영토를 하나씩 점령해가면서, 고구려는 강도으 수위를 높였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할 관점은 관미성이다.
관미성이 강화도 근교에 위치했다는데 전혀 근거없는 설이다. 관미성은 요서 산둥반도에 위치되어 있다.
관미성을 자세히 말하자면
관미성은 백제의 중요한 요충지성이다.
그만큼 관미성은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이유는 백제의 관미성은 삼면으로 둘러싼 성이다.
남쪽으론 왜 북쪽으론 고구려, 동쪽으로 후연이다. 그런데 한반도설은 맞지않다.,
한반도설은 남쪽으로 왜를 볼수도 없고, 북으로 고구려다. 동은 역시 고구려백제측이다. 이 한반도설로는 맞지않다. 그렇다고 한반도에 위치된 관미성을 백제가 왜 중요한가 포기한다.
즉 관미성은 산둥반도로 아주 중요한 위치이기에 고구려는 필요했고, 백제는 무역을 활발히 하는 경제자유구역같은것처럼 꼭 필요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열흘간 관미성을 공격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이에 계책을 연구한 광개토태왕은 9성을 공격하였다. 불을 태우고 백제가 우왕좌왕할때 말이다. 이에 백제는 관미성을 고구려에 쉽게 정벌된다.
이에 이때부터 백제 아신왕과 광개토태왕과 라이벌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백제 아신왕은 매번 실패하닥 결국 젊은 나이다. 죽는다.
첫댓글 부여에서 나와 압록강지역(환인)에서 고추모 선조의 나라 고리의 국호로 일어난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한 나라가 아니였고, 복속을 요구한 동부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한군현(전한)을 기반으로 요하를 건너 오는 한나라의 침략을 격퇴하는 치열한 전쟁과정을 통해서 면역력이 강해지게 되고,고추모의 개국국시인 다물을 실현하고자하는 의지가 왕위계승자들에게 계속 이어지면서 강해져 간 나라입니다.동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이고 최리 낙랑국을 정벌하여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대무신 태왕의 명확한 자주노선이 고구려의 자주상무정신을 뿌리내리게 하였고,
요하를 건너 한군현지역을 공격하고 고구려 선조의 땅(서안평-서요하 지역=내몽골 임황)까지 회복하게 되었으나,한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부여의 후미공격으로 현도지역은 회복하지 못하게 됨.태조태왕은 회복한 번조선지역에 10개성을 쌓고 요수(난하)을 경계로 전한과 군사적 경계를 이루게 되지요.6대 태왕 고궁을 <태조>라 칭한 것은 아마도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선조의 나라 고리국(단군조선의 봉후국:1대왕 단군왕검의 차남 부소)을 회복하고 번조선지역을 회복하여 지나세력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강국으로 만든 인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후 아시아 모든 왕조를 개국한 인물들을 '태조'라 칭하게 되는데 고구려 6대 태조에서 비롯됨
대홍안령 산맥의 선비족이 강성해지면서 요하지역은 모용선비족이 전연을 세우면서 고구려 영토는 다시 요하 동쪽지역 만주로 영토가 축소되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선비족이 고구려를 초토화시키고,백제 또한 고구려를 침공하여 지금의 북한 평양성(남평양성)에서 고국원태왕을 전사시킵니다. 백제 근초고대왕 시기입니다. 후한이 설치한 한군현(낙랑군:평양지역/대방군:황해도지역)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고국원태왕의 전사는 광개토태왕시기에 백제정벌을 단행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광개토태왕이 백제 한성을 포위하기 위해서 백제 관문인 한강하구의 관미성을 공격합니다. 관미성은 백제 한성으로 들어 가는 한강 하구지역인 강화도 교동도입니다. 관미성 위치를 알려면 백제의 한성이 어디인가를 알면 바로 해답이 나옵니다. 근초고대왕이후 백제 수도는 지금의 서울입니다. 서울 강동구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규모의 10여기의 전방후원분 무덤이 바로 결정적 증거라 할 것입니다.그리고 장수태왕 당시 초토화되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 고도 서울은 그 유적.유물이 땅 속으로 파 묻혀 버렸습니다.풍납동 아파트 단지 땅 속에 묻혀 있습니다.일부 발굴을 통하여 계획도시였음이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습니다.
대백제(구다라)=대릉하 하류지역의 어하라(비류세력)<서해를 건너 한강지역에 십제를 세운 온조세력<요동지역에서 100가족을 거느리고 서해를 따라 웅진에 백제를 세운 부여왕의 아들 구태세력...부여왕의 아들 구태세력이 세운 나라가 백제고, 205년경에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한강지역의 온조세력도 통합하고 구태왕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그리고 고국원태왕을 전사시킨 근초고대왕 시기에 한강지역은 백제연방의 중심지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한강는 서해로 나가는 해양무역로이자 군사지역으로 관미성은 백제 한성을 방어하는 최전방 군사성이고, 고구려 수군은 압록강을 따라 강화도 교동도(관미성)을 20일간 공격하여 점령한 것임.
광개토태왕은 수군을 동원하여 관미성과 주변 해안성들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일부 수군은 서해를 따라 백제가 일어난 웅진과 주변지역들을 공격하여(광개토태왕비문) 점령하고 충청도 속리산에서 제천의식을 행하고(환단고기) 한성을 포위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국내성으로 복귀한 것임.광개토태왕은 한강을 따라 한성으로 들어가고 서해를 따라 웅진을 공격하는데 방어가 되는 백제 관미성을 먼저 공격하여 제압한 이유이고, 웅진을 공격하여 제압한 것은 한성백제를 후원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임.별 수 없이 아신왕은 항복하고 만 것임/광개토태왕비문 기록 중에 '백잔'는 한성백제을 의미하고, '이잔'은 웅진백제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지나 동해안 지역을 차지한 백제가 지나땅에서 개국했다는 헛소리는 그만해야 함.[구당서]"마한의 옛땅에서 일어난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양자강 지역)에 이르고.."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고, [후한서]에서도 "마한 54개국 중에 백제국이 들어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만주원류고]에도"후한말 동명의 후예 구태가 요동태수 공손강의 사위가 되어 100가족을 거느리고 대방의 옛땅(해머리땅)에 나라를 세우니 동이강국이 되었다."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구태세력은 해머리땅에서 백제를 세우기 전에는 본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있었다는 지나문헌들의 기록또한 맞다.
참고로 고구려는 백제못지 않는 수군 강국이였습니다.광개토태왕 시기는 개마무사로 무장한 육군과 더불어 수군이 더욱 강해져 백제를 정벌할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고구려 수군이 강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비사성과 발해만 연안에 비석으로 남겨진 연개소문 여동생 연수영에 대한 기록이죠. 연수영은 고구려 수군제독으로 당나라의 수군을 발해만에서 모두 격퇴시키고 당나라 수군기지까지 공격하여 수백척을 불살라 버릴 만큼 당나라 수군에게는 위협적인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을 능가하는 여성제독이였죠.이런 명백한 고고학 사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수.당 전쟁이 바다와 무관한 황하지역에서 벌어 졌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코메디
역사가 꺼구로 가나 만리장성이 원 삼국시대에도 있었다니 진나라가 통일하면서 그후 만리장성이 생겨다고 하는데 일제의 조선총독부 왜놈이 조선사 편수회를 통하여 역사를 축소 조작 한 것은 다 알지요 그럼 얼마많금 조작이 되었는지 검증도 없이 반도사관 역사서를 믿으면 뭐가 될까요 xx 쪽발이 왜놈이 만들어준 역사서를 기준 잡으면 안 됩니다 그 시절 있지도 않은 후대의 지명을 태왕이 넘었다고 하면 말이 됩니가 그냥 조작이 표가 납니다 구당서 보다 날조가 더 많다는 신당서 조차 백제의 한성은 두 곳으로 동한(성) = 산동 태안 (태안 있는 곳) 과 서한(성) = 하남 등봉 (숭산 있는 곳) ,,,,>한국인의 역사 인식은 서울 = 백제한
->성 으로만 알고 있으니 문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