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험난한 열 두 구비를 넘어 ( 소 제목)
아들이 영등포 신길동 소재 W초등학교에 입학은 했는데 교육 이수 능력이 부족하여 5학년 때 아내의 사범학교 동창인 S선생( 심성자)이 특수학급을 운영하는 영등포구 당산동 소재의 Y초등학교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까지는 의무 교육 제도이기 때문에 여의도의 Y중학교를 나왔고 입학시험을 치루는 고등학교 때부터는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아들을 위하여 혼신의 열과 성을 하늘이 알았음인지 하늘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아들을 불쌍히 보았음인지 마포에 있는 K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마침 이 학교가 학급수를 대폭 증설하는 바람에 야간반에 입학은 되었어도 주간 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3년을 마칠 수 있었다..
대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적합한 전문대학은 없을까하여 백방으로 교육기관을 찾아보았으나 아들의 실력으로 전문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요 망상일 뿐이었다.
두드리면 열린다 하더니 단국대학교 J교수가 우리들의 애타하는 심정을 듣고 수소문하여 찾아낸 곳이 안산에 있는 '한국 선진학교 전공과'였다.
국가의 공인 교육 기관인 그곳에서는 성인이 된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 취업 알선의 일환 으로 1년 과정의 직업 재활 교육을 시키는 제도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라고 했다.
□ 아들을 위한 작은 선물
우편취급소는 우체국이 없는 지역에 거주하는 동민의 우편 배달업무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정부가 민간인에게 인가하여 주는 이른바 우편물 ‘간이취급소(簡易 取扱所)’를 말한다.
그러니까 우체국(post office)에서 하는 일에 비하여 우편 취급소(post agency)하는 일은 동네 주민의 편의를 도와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도에는 우편취급소에서 제세공과금까지 취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포와 등기 우편물은 물론 일반 우편물 발송을 처리할 수 있어서 모두가 우편취급소의 T/O를 따기를 희망하였다.
우편 취급소 개설 자격으로 우체국에서는 당시 의사, 변호사, 약사를 선호할 때였다.
나는 즉시 관할 여의도 우체국 관리과를 찾아가 관리과장에게 신길 2동에서 12년간 자영 약국을 개설한 사람임을 밝히고 신길2동 우편 취급소 인가를 요청하였다.
이 때가 1988년 하반기였다. 여의도 우체국 관할에서는 우편 취급소가 6개가 있는데 거리 제한 때문에 신길 2동은 적합지 않다는 것이다. 신길 3동에 위치한 '사러가 백화점 우편 취급소'와의 제한 거리 1km 반경 내에 신길 2동이 처하여 있기에 개설 할 수 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담배 소매 점포 간의 거리 제한을 1km 에서 500m 로 정부는 제한 거리를 완화하는 조치를 보고 우편 취급소의 거리 제한도 완화되리란 기대 속에서 여의도 우체국 관리과에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1989년 말. 나는 동네 어귀에서 4차선 대로변으로 3층 약국 건물을 짓고 이사하면서 우편취급소 개설에 대한 욕구를 더욱 불태웠다.
아무리 형제가 있다 한들 내가 죽으면 저 목숨은 어찌될까 싶어 직업이 될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직업이라고 하기보다 무료라도 달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우연히 신길 3동의 ‘사라가 백화점'의 우편 취급소가 폐소(閉所) 된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약국 한 쪽을 빌려 아들의 일터를 마련하게 되었다.
나와 가까이 있을 수 있어서 좋고 비교적 단순한 일에 익숙 되면 평생직장이 될 수 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생각하여 하느님께 감사했다.
1992년 11월.
마침내 '신길2동 우편 취급소'가 개소되었다.
내 처지와 형편을 연민해하던 친지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었다.
그 날부터 나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1인 2역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아들을 위하는 것이라면 내 육신 한쪽이라도 잘라주고 싶고 목숨이라도 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직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었다.
계절을 잊은 지도 오래고 음식 맛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된다.
□ 잃어버린 일터
우편취급소의 인가를 받고 동네의 우편물 발송은 물론 등기와 소포물 처리 물량이 늘어나면서 약국의 본업이 우편물 발송 처리로 부업으로 바뀌다 싶이 바뻐졌다.
취급소 개소후에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여 취급 업무량이 대폭 늘면서 모범 업소가 되었고, 여의도 우체국에서 시행하는 체신 적금 모금에서 ‘신길2동 취급소’의 실적이 제일 좋아 우수 업소로 인정 받았다. 여의도 우체국장과의 면담을 청하고는 내심에 품고 있던 아들 이야기를 꺼내 아들의 여의도 우체국 근무를 희망하였다.
우편취급소를 인가 받을 때는 아들의 평생 직장이라 마음 먹고 아들이 이곳에서 일 할 수 있으려니 마음먹었으나 우편물 발송의 모든일이 책임이 따르는 정확한 일을 맡길 수 없었다. 겨우 아들이 거들 수 있는 일이란 연말에 폭주되는 우편물에 소인을 찍는 일이나 우표를 붙이는 일만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나는 K우체국장과 상의하여 무보수 취업이라도 좋으니 일터를 간청하였다.
K 우체국장은 W관리과장과 상의하여 아들이 일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으로 정부와 대 기업체의 홍보물인 ‘대 봉투 분류’ 작업장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아들이 그나마 취업이 되어 아침에 근무 시간을 맞추어 출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내가 개설한 우편 취급소에 3년간 들인 혼신의 열은 ‘하면 된다’는 나의 신념을 확고히 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는 빈틈 없는 주도 면밀한 계획하에 실천에 옮기는 성격 이어서 ‘신길 2동 우편취급소’를 아들의 평생 직장으로 결심을 굳혔다.
그러던 어느날 여의도 우체국 관리과장이 바뀌면서 계약 갱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구가 신길2동에 비하여 2배나 많은 신길 1동에 우체국 T/O가 생겼다면서 정식 우체국이 들어서면 ‘신길 2동 우편취급소’는 자동으로 해지한다는 조건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길에 어떠한 일이 닥쳐도 달갑게 여기리란 나의 생각이 일순간에 허물어 지고 말았다. 평생 직장으로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무거운 짐을 끌고 가야만 하는 하염없는 나의 처지를 아내는 과감히 처리하여야 한다고 나의 결심을 촉구하였다.아들의 평생 직장으로 생각하고 3년 간 공들여 키워온 ‘신길 2동 우편취급소’를 결국 폐소 하였고 우편 취급소의 폐소와 더불어 우체국 근무 중에 있는 아들의 향방이 극히 우려 되었다.
우편취급소를 해지 하고 난 다음해에 새로 부임한 우체국장이 불필요한 충원을 감소한다며 ‘대 봉투 분류 작업장’에 공익요원으로 대치한다면서 아들은 권고 사직이 되고 말았다.
어디에다 하소연 할 수 없는 나의 처지를 누가 이해하랴.
어느 누구도 나의 넉두리를 들어 줄 동반자는 아내 빼고 아무도 없음을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하늘은 알아 주려나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어 본다.
첫댓글 부디 아드님이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기길 간절하게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