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는 현대를 다니고 내 동생은 삼성을 다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는 현대 대우 삼성이라 하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알아주는 직장이었다. 각기 특색도 있어서 전해지는 우수개소리가 있다. 뱀이 방에 나타나면 현대는 즉시 처치하고 회장한테 보고를 하고 대우는 회장한테 보고를 해서 지시를 받는다고 했다. 삼성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고 하였듯이 그 뱀에 물리면 죽는지 괜찮은 것인지 확인하고 검토를 치밀하게 한 후에 행동을 취하고 공무원은 계획서를 작성하여 보고를 하고 결재가 나면 그때서야 움직인다고 했다.
우수개 말이지만 대충 들어맞는 것도 같다. 현대는 추진력을 대우는 빠른 통제력을 삼성은 치밀한 계획과 실행을 자랑한다 싶다. 그렇다보니 현대는 일을 저지르고 보고 대우는 자율성이 없으며 삼성은 인간적인 면모가 떨어진다는 평도 있다. 언젠가 이건희 회장이 기업은 B급인데 정부가 여전히 D급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런 투의 말을 해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솔직히 정부를 큰 기업으로 간주해 보면 떼어갈 것은 꼬박 빠짐없이 챙겨가면서도 지켜주고 나누어주는 것은 여타 기업만큼 능동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 큰 공룡 기업이라 군불을 지피면 웃목까지는 기별이 안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통령이라는 운전수에게 너무 의존한 나머지 기대는 큰데 골고루 혜택을 챙기지 못하여 실망도 커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쯤 내각제를 한 번 고려해 보면 어떨까.
기업은 미래에 대처하지 않거나 과로 하면 쓰러지고 만다. 굳이 말을 안 해도 수십 년간의 우리의 경제가 이를 대변한다. 내 친구는 대우 중공업을 다녔는데 그 친구가 대리에서 과장 진급을 바라볼 쯤 집에 들렀을 때 깜짝 놀랐다. 집 구석방에는 대우제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냉장고는 0.5점 TV는 1점 등등 안 팔리는 물건일수록 점수는 높게 책정을 해 개인당 2점인가를 채워야 인사고과가 올라가는 그런 강매제도가 있었다.
현대는 감히 반대를 발설하지 못하는 강제적인 저돌성이 팽배해 그로 고충이 많았으며 삼성은 지나친 혹사로 개인의 삶은 생각지도 못하는 상실감이 있었다. 심야근무에 지친 동생은 본가에 올 때면 잠만 청했었다. 인간의 삶이란 이렇듯 늘 양면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의 양식에 투철한 자신의 사람을 일구어내 이른 바 현대 맨 삼성맨 대우 맨을 만들어 세상을 평정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삼성이다. 삼성이 망하면 우리나라가 망한다 할 정도이니 견고한 삼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따로 생각해볼 많은 것들이 있다.
기실 삼성그룹의 파워에 대해 일일이 나열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일본경제에서 소니나 도요타가 차지하는 비중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제일제당, 신세계, 한솔, 새한, 보광 같은 형제(위성)그룹들까지 합치면 위세는 절대적이다.
12월 결산 상장업체들이 거둔 순이익 중에서 매해 삼성전자 한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법인세만 1조원 넘게 냈다. 삼성이 만드는 제품들 중에는 D램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하여 세계 상위권 제품들이 즐비하다. 주식시장에서도 삼성그룹은 국내 시가총액의 20%를 차지하고 있고 대부분 고가주에다 블루칩 대접을 받고 있다. 한때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의 경영참여를 놓고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지만 삼성은 신속한 돌파력으로 최소한의 상처만 남긴 채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골치 아픈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도 역시 삼성답다고 할까.
이런 삼성의 '성공'에 대해 흔히들 'IMF 이후 누구보다도 신속하고 완벽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투자를 과감히 결정했기 때문이다'라는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하지만 좀 더 제대로 설명하자면 삼성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삼성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가치관, 업무행태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시스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송병락 서울대 교수는 "예전부터 '인재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삼성은 인재 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영 전략이나 시스템도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시스템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이야기다. 서울대 출신으로 다른 기업에 간 사람과 3류대 출신이지만 삼성에 들어온 사람이 입사 한 달 뒤에는 우열이 뒤바뀐다고 그들은 말한다.
대졸사원은 한 달 간 합숙훈련으로 기본 소양을 기른 후, 현업에 들어가면 OJT(현장실무교육)가 독특하다. '왼손으로 술을 따르면 안된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주법은 물론이고, 정장 입는 방법, 화장실 사용 매너, 적당한 머리 길이 등에 대해 배운다. '소리내지 말고 국을 먹어야 한다', '검은 양복에 흰 양말은 안된다'든지 하는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몸에 익힌다고 한다. 휴지와 신문지가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현대 계동사옥 화장실과 대조적으로 내부가 깔끔한 삼성본관 화장실을 가보면 양 그룹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삼성은 입사 한 달 동안에 전직원에게 비슷한 가치관을 심어준다. 그들이 쓰는 용어와 말하는 방식부터 다르다. '복합화', '업', '메기이론' 등 외부인이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금방 와닿지 않는 용어들도 삼성맨들은 누구나 똑같이 설명할 줄 안다. 삼성의 인사철학은 '의심이 가면 쓰지 말고, 일단 쓴 뒤에는 절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재 양성에만 그치지 않고 인재 확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삼성전자에만 현재 박사급이 1000여명. 서울대 교수 숫자와도 맞먹는 지적 자산들이다. 그중 80%가 해외박사들이다. 인사담당 임원들은 우수한 연구인력과 엔지니어를 찾기 위해 아예 실리콘밸리나 유럽 등지를 수소문하고 다닌다. 이렇게 기르고 확보한 인재들에게 과감히 맡기고 자부심도 한껏 키워준다. 그러다보니 외부에서는 삼성 직원들에 대해 '자만심과 엘리트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삼성에버랜드의 일반직원용 기숙사는 이례적으로 1인 1실이다. 회사가 떼돈을 벌어서가 아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불평을 듣고 하다보면 저녁에는 혼자서 조용히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의 본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성을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호텔신라나 에버랜드의 서비스가 뛰어난 것도 직원들에 대한 합리적인 대우가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삼성은 조직 내에서도 단순히 지위가 높다고 하여 부하직원을 누를 수가 없는 분위기다.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삼성 스타일이 빛을 발하는 것은 특히 불경기 때다. 대표적인 것이 대북 사업이다. 현대가 과감한 대북사업에 나섰다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에 비해, 삼성은 처음부터 하나씩 따져가며 북한측으로 하여금 안달나게 만들고 있다. 투자 위험(risk)을 감안하면 삼성은 사실상 대북 사업에 거의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한다.
삼성은 모든 가능성을 일일이 다 피드백(feedback)하여 시뮬레이션(Simulation)을 해보고 나서 결정한다. 따라서 실패가 없을수는 없겠지만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그만큼 낮다. 신중하다고 해서 언제나 소극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 바탕에는 남들에게 절대 질 수 없다는 일등주의가 깔려 있다. 삼성을 뒷받침해 주는 커다란 힘은 깨끗한 조직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거래선으로부터 구두티켓만 받아도 징계를 받는다. 삼성그룹에서는 단 한장의 투서만 접수되어도 감사부서에서 신속하게 진상을 파악한다. 만약 투서 내용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해당 임직원은 사무실 정리도 못하고(기업정보 유출을 우려하여) 그 다음 날로 회사를 떠나야 한다. 보통 구조조정본부나 계열사 감사팀은 큰 혐의를 포착했을 경우 2~3개월 전부터 주변조사를 하여 증거를 확보한 뒤 들이 닥친다. 따라서 감사팀의 방문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황 끝'이다.
삼성의 비서실은 회장의 분신처럼 움직인다. 어떤 때는 회장의 카리스마를 그대로 가져가기도 한다. 삼성의 정보력은 워낙 은밀하고 막강하여 그 실상을 아무도 잘 알지 못한다. 정보수집에는 전문가 집단이 하는 것 이외에 그룹 통신망인 '싱글'도 크게 기여를 한다. 삼성 직원들은 경쟁사 친구들을 만나서 들은 자그마한 정보도 모두 싱글을 통해 보고한다. 유명인사에 대한 얘기를 들어도 역시 다 전송한다. 그런 실적은 모두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삼성의 강한 정보력은 로비력으로 이어진다. 평소 업무관계로 만나는 정계, 관계, 재계, 학계, 언론계 인사들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사회각계에서 삼성을 반대하기 어려운 세력으로 변한다. 삼성은 그룹에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기존의 정보망과 로비망을 최대한 활용하며 여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신속하게 처리해 버린다.
삼성도 수많은 문제점과 약점과 단점을 갖고 있다. 내부적으로 보면 삼성이 지금처럼 재무통 인사들이 득세하는 시스템을 계속 유지할 것이냐도 관심거리다. 삼성의 미래는 이들 재무통의 위상을 어떻게 잡아주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의 또다른 문제점은 그동안 단행했던 구조조정과 분사의 후유증이다. 가령 분사된 삼성전자 아프터서비스(A/S)의 경우 삼성전자의 한 부서로 있을 때는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독립회사가 되어 수익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서비스의 질이 떨어졌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강하다. 사업내용으로 보면 반도체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이 항상 위험요인으로 지적된다. 지난 96년 반도체 가격하락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IMF쇼크를 맞았던 악몽이 재현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룹 전체로 보면 삼성전자, 삼성SDI를 제외하고 계열사들 중에 과연 내세울 곳이 있느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삼성으로는 차세대에 주력으로 키워나갈 '수종사업'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튼 21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공전략으로 나는 이건희회장의 반도체 진출을 두 말 필요없이 꼽는다. 이 회장은 전자산업에는 반도체가 필수라는 생각으로 1976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혁신을 강조한 이회장은 스피드 경영으로 정보와 기술로 회사를 무장시켰다. 항상 6개월 1년 정도를 앞질러 당시 휴대폰 시장의 70%를 장악한 모토로라를 1년 만에 제압했다. 1등만이 생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1세기는 아이디어시대다.아이디어가 고부가성 창출이고 곧 승리다. LG전자는 러시아에 에어콘을 팔아 시장의 35%를 점령한 업체다. 러시아 사람들이 추위에 익숙한 나머지 더위는 못 참는다는 데서 출발한 아이디어다. 파세코라는 난로업체는 어쩌다 찾아온 추위를 겁내는 중동인들에게 난로를 팔아 돈을 벌어들였다. 상상을 초월 한다. 만도는 건조한 물품 보관에 치우친 냉장고에서 탈피하여 우리만의 김치냉장고로 변신하여 경쟁자없는 블루오션을 창조했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급변한다. 레인컴이라고 해서 한때 MP3삼각형 제품으로 100만대가 넘는 대박을 터트렸지만 결국은 후속타 불발인지 대기업들의 견제인지 순식간 부도가 나고 말았다. 그런 업체는 한두 곳이 아니다. 밀리면 바로 끝이 난다. 핀란드 휴대폰 노키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 업체들은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멈추어서는 바로 뒤쳐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해도 근면하고 성실하다면 겁 날 것은 없다. 익히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다라는 남다른 끈질긴 투혼이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당시 대기업 3사를 다녔던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그들은 그 시절 삼성맨이고 현대맨이고 대우맨 사람들이다. 뿌리 깊은 정서가 가득한 것은 아마도 온몸을 헌신하여 전력투구하여 산 생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시절 그러하였듯 우리에게 절망은 없다. 베이비부머의 개척시대는 이제 막 시작이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스미스라는 광산주가 금맥을 찾지 못해 땅과 장비들을 모두 처분했는데 몇 피트를 더 파자 금맥이 쏟아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막바지라고 생각할 때가 바로 절망의 끝이다.베이비 부머야! 눈물겹지만 그 시절처럼 우리 모두 다시 강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