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기 – 심념처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 질문 >
묘원님의 법문을 듣고 한국명상원의 수행법인 심념처 수행을 근간으로 삼고자 정진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마음 알아차리기 중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는데 어제 밤 좌선에서는 알아차림의 의도(?) 겨냥하는 마음, 어떤 법문에서 스승님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나누실 때, 전자에 마음집중과 노력이 순일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수행에서는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분명한 앎'에 마음집중을 해야 하나 싶어서 시도를 했는데, 대상을 고정하지 못하고 번갈아가며 다시 알아차렸습니다.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새로 내는 것과 분명한 앎이 한순간에 이루어진다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구분하여 다시 알아차리는 것은 착각인가 싶기도 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알아차린 후에는 특별히 겨냥하지 않고, 마음자리에서 호흡과 몸의 느낌을 오는 데로 알아차려서 수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질문을 요약하자면, 몸을 움직이려는 마음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의 의도도 세 번째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포함되나요?
요즘 묘원님의 대념처경에서 심념처 법문을 듣고 있는데, 귀한 법을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답변 >
위빠사나 수행은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심념처 위주로 하면 수행에 장애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를 기본으로 한 뒤에 수념처와 심념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대중들에게 신념처 위주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보통은 육체적 감각기관인 오욕락을 말씀하십니다. 상대가 정진력이 높을 때 특별한 경우에만 정신적 감각기관인 의근이라는 마음을 포함시키십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을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나중에 심념처를 할 때도 기본은 신념처에 두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제가 심념처 수행을 배운 쉐우민의 우 꼬살라 사야도께는 “나는 사념처 수행자지 심념처만 하는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에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뜻이 매우 큽니다. 여기에 대한 깊은 내용은 법문시간에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본이해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오온이며 두 번째는 사념처입니다. 첫 번째로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사는데 이것을 세분화한 것이 오온입니다. 오온에서 마음은 식온으로 아는 마음입니다. 오온은 다섯 가지 무더기가 함께 작용하므로 어느 것 하나도 빠질 수 없습니다. 식온일 때의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있어서 최종적으로 아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음이 있어서 대상을 알기 때문에 심념처 수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사념처입니다. 사념처는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때도 오온처럼 네 가지가 모두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조금 더 집중적인 수행이 필요할 경우에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로 나누어서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때도 기본은 신념처에 두어야 합니다. 이때도 네 가지 대상에 마음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에서 심념처를 할 때는 마음이 대상을 아는 일차적인 기능은 필요합니다. 그런 뒤에 심념처 수행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심념처 수행은 1단계와 2단계가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요약하면 심념처 수행은 마음이 대상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을 하려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반드시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사실 이런 수행은 평소에 누가 해보지 않아서 조금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념처 수행으로 집중력이 생겼을 때 비물질인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네 가지로 심념처 수행방법을 요약해보았습니다. 첫째,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둘째,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셋째,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넷째,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네 번째의 경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에서는 아는 마음이라는 뜻을 우리끼리 ‘앎’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쉐우민에서는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로 했습니다. 모두 심념처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두 가지는 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통역이 달라서 한국말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네 번째 방법은 수행자가 몸이 사라진 뒤에 남아있는 것은 마음밖에 없을 때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최종적 단계에서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때 ‘앎’ 사라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때 열반이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앎’ 사라졌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만약 수행자가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하면 스승께서는 천박한 번뇌를 입에 올린다고 나무라십니다. 왜냐하면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타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착이 끊어져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들어가면 내가 무엇을 얻었다는 오만에 빠집니다. 그러면 다음 수행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열반도 수다원의 열반에서 아라한의 열반까지 다양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만 열반이라고 말하고 보통은 해탈이라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지만 물질이 아닌 비물질이라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을 해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심념처 수행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외에도 알아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사념처에서 ‘분명한 앎’은 위빠사나 수행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표현입니다. ‘분명한 앎’은 지혜수행이라는 뜻으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념처에서 위빠사나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앎’이나 ‘통찰지혜인 무상, 고, 무아’라는 말이 나올 때는 위빠사나 수행을 말합니다. 미얀마의 스승님께 위빠사나 수행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상, 고, 무아라고 답변하십니다.
묘원 올림
첫댓글 명심하고 신념처 수행부터 단계별로 정진하겠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