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자기 수명을 알 수 없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자기가 언제 죽는지를 안다면 그때까지 아무 생각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막연히 나이가 많으니까 죽을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이 아니라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서 그 시각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안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를 알고 살아간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 날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바로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간청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에
누가복음에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44절)
내일이면 죽을 것을 ,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을 알 때에
凡人같으면 미리 까무려처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한 기도를 하십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누가복음22장 42절)
십자가에 달려죽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으니까 그것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끝에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시하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중요하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이 말씀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한 입을 먹은 죄-불순종-으로 아담의 후손인 온 인류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목숨을 내어놓는 순종으로 갚으셨습니다.
그 순종하는 마음과 고백의 극치가 바로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나는 그 잔을 마시지 못하겠으니까 그냥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하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그 소원을 들어주셨을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불순종의 죄는 다른 방법으로 속죄를 해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하는데 인간들 중에 의인(죄 없는 자)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10절)
선악과 한 입과 예수님의 목숨 -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지만
선악과 한 입의 죄를 예수님은 목숨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의미는
단지 인간 예수님의 고통과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 앞에 목숨을 내어놓는 순종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 순종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는 이런 순종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속죄받은 인간이 구원받은 것만 좋아하고 순종은 헌신짝 처럼 여기는 것은
결코 구원받은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카톡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절망으로 표현했기에
그냥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