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을 보면 한나라당이 보인다.
내가 전여옥을 만난 것은 한겨레토론마당(한토마)에서였다. 한참 늦게 그 존재를 알게 된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에 심취해서 미친 듯이 글쓰기를 하고 있던 중, 나의 글에 누군가가 전여옥 글에 대한 반론을 써달라고 댓글을 달았다.
“전여옥? 전여옥이 누구지?” 하고서 싸이트를 둘러보니 온통 난리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나만이 문제의 글에 대해 모르고 있던 상황인 듯했다. 전여옥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다.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다고 해서 조독마(조선일보 독자마당)엘 가 보았더니 거기에서는 찬양일색이었다. “허,허 한 사람의 똑 같은 글에 대해 이렇게 반응이 다르다니?”
문제의 글을 복사한 후 그 글을 원용하여 패러디 형태로 반박의 글을 썼다. 하도 시끄러워서 전여옥이 대단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글을 읽어 보고 난 느낌은 실망 그 자체였다. 이런 수준의 글을 쓰는 여자가 조선일보 고정 칼럼니스트라는데 의아심이 들었다.
전혀 가다듬어지지 않은 생경한 말투, 상대의 약점만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비열함, 거기에 작은 것을 크게 부풀리는 잔머리, 팬들의 수준을 미리 짐작하고 그들에게 환호성을 이끌어 내려는 선동적인 계산된 어휘 사용 등등에서 그 여자의 수준이 읽히고도 남음이 있었다. 경력을 보니 KBS 동경 특파원에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허, 참!”
그 글이 얼마나 조잡한 글이었는지 잠시 구경해보자.
//솔직히 대다수의 국민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보는 심정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지켜보았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음에도 놀랍기 그지없다.(‘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는 말에 대해),
나이와 더불어 그의 토론실력도 ‘청문회 스타의 똘똘함’은 물론이고 대통령후보 때의 ‘겸손한 논리’도 완전히 빛이 바랜 채 파르르 떠는 성마름과 자기과시로 일관했다.(평검사들과의 토론에 대해)
그러나 그날 국민이 본 것은 개인적인 자잘한 섭섭함과 한을 풀지 못해 삐치고 핏대내고 열 받는 대통령의 모습이었다.(KBS T.V. 토론에 대해)//
전여옥의 글에 반론한 내 글에 려운이란 분께서 “미친 년 널뛰듯이 날뛰는 그녀의 천박한 언행이, 정말 국민속의 대통령이 아닌 군림하는 대통령(박정희나 전두환)이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녀의 천박함과 교만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장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댓글을 달아 놓았는데 적확한 표현이다.
어떻게 해서 “삐치고 핏대내고 열 받는 대통령”이란 표현을 할 수 있는지 그 뇌에 들어가서 해부해 보고 싶을 지경이다. 아, 그리고 전여옥은 고 노 대통령에 대해서 악담을 엄청 많이 쏟아 놨는데, 그중에서 압권은 “당신의 뇌를 해부하고 싶다. 인큐베이터에 다시 집어넣고 싶다” 등이다.
전여옥은 2002년 당시 어떤 연줄을 탔는지 정몽준 캠프에 속해 있었고, 정몽준이 일방적으로 노 대통령 지지를 철회한 후 어찌어찌해서 박근혜씨 밑으로 갔는데, 그녀의 신임을 독차지하며 비례대표 국회의원에다 최장수 당 대변인을 하며 승승장구했다.
2007년 대선에서 그토록 떠받들던 박근혜씨를 배신하고 2MB 진영에 가담하여 결국 한나라당의 최고위원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수첩공주 박근혜씨의 자업자득이다. 아마 충격이 컸을 것이다. 2MB를 다시 또 배신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최근에 어느 싸이트를 기웃거리다가 ‘일본은 없다. 항소심을 끝내고 나서’란 유재순씨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은 전여옥이 재일 르뽀 작가인 유재순씨의 취재 내용을 도용하여 마치 그녀 자신이 실제 취재를 한 것처럼 쓴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마이뉴스의 박철현 기자가 그 표절 행위를 심층 취재하여 기사화했는데, 전여옥이 이를 문제 삼아 적반하장 격으로 5억원의 손해배상을 제기하였고, 이 소송에서 전여옥이 1심, 항소심에서 연달아 패소당함으로써 그녀의 파렴치한 행위가 법의 판결을 통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전여옥은 그야말로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대통령이 소속된 한나라당의 최고위원으로서 그 자격이 넘치고도 남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 셈이다. 한나라당 당원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치사하고, 얼굴이 두꺼운데 그 중에서도 최고로 거짓말을 잘하고, 최고로 치사하고, 최고로 얼굴이 두껍기 때문에 최고위원이 된 셈이니 어찌 전여옥을 보면 한나라당이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유재순씨가 전여옥을 만난 후에 그녀에게 당한 갖은 사기 행위와, 수모는 이루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자, 그 진실의 현장으로 가 보자. (전문은 중프라이즈( www.joongprise.com ) 자유 게시판 24736번 글 참조 바람)
//판결결과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5년 반 동안의 재판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분노, 억울함, 재판, 불면증, 신경쇠약 등등. 그래도 용케 견뎌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래서 담담하게 그동안의 재판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중략.....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거짓말의 천재였다. 그것도 얼굴색깔 하나 변하지 않고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했다. ...중략.....
원고(전여옥)가 일본에 간 지 한 2주 정도 지났을 때 유 재순이 원고를 NHK 지국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당시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아울러 유재순에 대하여 호감도 갖게 되었습니다.(전여옥의 항소 이유소 중에서)
전여옥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나를 아주 빈한한 유학생 마누라로,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 여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라고 큰 아량을 베푼 것처럼 묘사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100% 거짓말이다.
나는 전여옥을 만나는 첫날부터 내 지인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고, 이 같은 관계는 그녀가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게다가 당시 나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80년대 중반 이후 몇 년은 매월 여성동아 원고를, 그 이후에는 우먼센스, 세계여성, 일요신문 등 시사주간지 원고를 번갈아 가며 쓰느라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아사히 신문사 계열의 시사주간지 <아사히저널(현재휴간)>, 아사히그라프 등에도 일본르포를 쓰면서 그 틈틈이 다른 일본 주간지나 월간지에 칼럼까지 썼다. 또한, 매월 두세 차례씩 JAL항공사, 시민단체 등에 강연을 다녔다.(이렇게 바쁘게 일을 하는 그녀를 가난하고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몰다니....:거사) .....중략.....
뿐만 아니라 선의적으로 꽃을 사 들고 간 사람에 대해 마치 내가 대단히 가난한 유학생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묘사’를 했다. .....중략.....
아파트는 105,106호 두 개를 빌려서 살았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은 만큼 대형 냉장고 두 대가 풀가동됐다. .....중략.....
그런 연유로 유학기간 동안 3년에 걸쳐, 매년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 7-8명을 초청하여 민단 조총련에 관계없이 재일동포들의 애환과 실상을 듣고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내 개인적으로 주최하기도 했다.
이때 의원들의 초청경비 및 진행에 드는 비용은 대략 300-500만엔 정도. 그 부담은 모두 내가 원고료, 강연료로 충당했다.(엄청난 돈을 썼네요. 3,000-5,000만원 정도? 그럼에도 빈한해 보였다니.....:거사) .....중략.....
하지만 도움을 준 것은 전여옥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여옥에게 내 일본인 인맥과 재일동포들을 소개시켜 주고, 그리고 집에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했다. 반대로 내가 전여옥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중략.....
결정적인 왜곡 또 하나. 그녀가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에게서 20만 엔을 꾸어갔다. 이유는 결혼할 준비로 보석을 사야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 꾸어줬다(나중에 서울에 가서 받음).
만약 내가 그녀가 표현하는 대로 그렇게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면 한 번에 20만 엔씩이나 하는 목돈을 흔쾌히 꾸어줄 수가 있었을까?
결국, 전여옥은 ‘사람 소개시켜 주고 먹여주고 재워 준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행위를 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략.....
특히 ‘일본은 없다’에 대한 소문은 언론계나 출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여서, 기자회견이 있다면 일부러 찾아가서 취재를 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들은 적도,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당시 잡지편집장들은 한결같이 증언했다. 나는 당연히 이 증언을 기록한 진술서를 받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중략.....
또한, 2심 재판에 당시 우먼센스 편집장이 우리 측 증언자로 나와 그때의 잡지계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또 하나 더 큰 결정적인 거짓말은 내가 유인종 기자와는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유인종 기자를 처음 본 것은 2심 재판 법정에서였다.
법정에서 우리측 송호창 변호사가 유 기자에게 물었다.
“유재순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유재순 씨의 집 전화번호를 압니까?”
“모릅니다.”
“아니 유재순 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유재순 씨에게 기자회견을 한다고 연락을 했습니까?”
“후배가 했습니다.”
“그럼 그 후배이름은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 이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국회 청문회를 할 때 총리, 장관 후보들 등의 청문회 대상들이(원문은 의원 나리들이) 자신의 잘못을 에둘러 감추려할 때마다 상습적으로 남발하는 말이다......중략.....
이삿짐을 싸던 날, 전여옥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도 양쪽 집에서 수화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바로 이를 유학생들이 번갈아 가며 메모를 했고.
한국에 귀국해서 잠시 들른 유학생을 만났을 때, 그 유학생은 내게 서류 한 통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그 전화통화 내용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서류였다. 그것도 일본에서 공증까지 해서 말이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는 당시 그 유학생은 내게 말했다.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유학생들은 앉으면 전여옥 이야기인데 혹시 나중에 법정소송으로 갈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유학생들의 증언을 모아서 공증해서 갖고 온 거예요. 혹시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몰라서요. 그러니 잘 보관하고 계세요.”.....중략.....
//<… 원고가 ‘일본은 없다’를 낸 지 한 2-3년 뒤 유재순은 ‘하품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는 서문부터 원고에 대한 악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에 원고는 참을 수 없어 아는 출판사에 ‘이젠 법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뒤 며칠 뒤 유재순이 책을 거두어 들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재순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쓴 책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라고 밝혔지만 원고 생각에는 소송을 할까 봐 겁이 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 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전여옥의 항소이유서10쪽’>// .....중략.....
먼저 ‘하품의 일본인’이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하품의 일본인’은 일본에서 먼저 낸 책이다. 아니 원래는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이름으로 나왔어야 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 반 이상을 전여옥이 가져갔다. 대화내용, 취재수첩메모, 초고 등 가져가는 방법도 다양했다.
물론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올 때까지 나에게 단 한마디도 책을 쓴다는, 준비한다는 이야기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서울에서 전화를 걸어온 기자 친구를 통해서였다.
“야, 근데 니 책 내용이 왜 그 애 책에 다 나오니?”
그때서야 내가 철저하게 전여옥한테 당한 것을 알았다.
나는 전여옥을 만나기 전부터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밝혔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일본기자들이나 내 독자들은 내가 어떤 류의 책을 준비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자료나 취재원이 있을 때는 그들은 협력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런 만큼 나는 친구로 지내고 있는 전여옥한테도 당연히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에 관계된 초고는 물론 취재현장으로부터 곧바로 그녀를 만날 때는 취재수첩을 보여줘 가며 현장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중략.....
“유재순 씨 억울해서 어떡해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만 유재순 씨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작가잖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없어요. 전여옥 씨는 내가 친하게 지내서 잘 아는데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너무 마시고 놀기만 했어요(飲みすぎだった、遊びすぎだった).”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사실은 그날 아침 나와 만나기 전에 전여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전여옥이 자신에게 ‘일본은 없다’를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양심상 도저히 번역할 수가 없어서 거절하는 편지를 부치고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했다.
그날 마츠이 씨는 내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을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도작당한 내 입장에서 먼저 분노를 터트려주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으니 너무 상심 말라’는 따뜻한 위로까지 해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철저하게 전여옥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노스러워 혼자 꺼억꺼억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앉았다 일어서려고 보니 갑자기 목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갑자기 앉지도 일어서지도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날부터 난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닐 때는 목에 깁스 띠를 두르고 로봇처럼 시선을 한 곳에만 고정시키고 걸어 다녀야 했다.
그때 나는 인간의 머리가 그렇게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 한 인간의 분노가 그렇게 한순간에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바보로 만든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한 달 가까이 누워지냈고, 그 이후부터는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일 정도로 머리가 무겁고 통증이 심해 몇 분도 채 안돼 자리에 도로 누워야 했다. 모든 것이 지옥이었다. 전여옥의 전자만 생각해도 목의 통증은 더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불면증까지 겹쳐 이중의 고초를 겪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많은 유학생들이 돌아가며 나를 돌봐주었다는 것이다. 번갈아가며 반찬을 해왔고, 내 속옷은 유학생 부인들이 빨아주었다.
그렇게 약 3개월간을 고생했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전여옥 이야기나 ‘일본은 없다’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어가 되었다. 서울 시집에서는 몸조리하라고 두 재의 한약을 지어서 보내 주었다. .....중략.....
다만 ‘하품의 일본인’의 서문에 내가 도작당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을 뿐이다. 이같은 서문 내용이 인터넷상에서 ’펌’ 형태로 널리 퍼져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솔직히 난 몰랐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나중에 비로소 알았다. 왜냐하면 2004년까지 내가 컴퓨터 사용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에서 조회 수가 그렇게 많은지도 재판이 시작된 후에야 겨우 알았다.
오죽하면 스포츠조선에 ‘일본은 지금’이라는 타이틀로 월,화,수요일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메일이 아닌 워드로 친 원고를 매번 팩스로 보내자, 담당기자가 제발 컴퓨터 좀 배우라고 매일같이 닦달했을까. 그래서 내 별명이 ‘천연기념물’이었다. .....중략.....
그리고 ‘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이란 말이 있는데, 이도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에게 잘해 준 것이라고는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도무지 하나도 없을뿐더러, 나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도 아직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본 여행 도와준 것이 피해라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중략.....
그럼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창피한 줄 모르고 일본 언론매체에 대고, 자신은 일류대학 출신의 명품을 휘두른 공영방송기자, 나는 3류대학의 남루한 옷을 걸친 프리랜서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 일본기자들로부터 '진짜 기자출신 맞아?'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제아무리 명품 옷을 걸치고 일류대학을 나왔다 한들, 인품이 명품이 아닌 하품(下品)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전여옥 자신만 모르고 있다.
1심 승소 후, 전여옥이 패소의 변으로 '노무현좌파 정권과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가 유재순을 앞세워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일체 오마이뉴스와 접촉을 하지 않았다.
2심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이 한국을 오가면서도, 오마이뉴스 기자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피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여옥에게 핑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1심 초반 무렵 재판과정이 오마이뉴스에 보도되어, 이 또한 보도되지 않게 변호사를 통해 정식으로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재판과정에 대한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재순은 선, 전여옥은 악'이라는 이분법의 여론재판이 아니었다. 팩트는 하나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현실적인 권력을 쥐고, 세속적인 잣대로 나를 비하하고 모멸감을 주며 질겅질겅 밟는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사회정의가 살아 있다면 정녕코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나와 전여옥이 공통적으로 관계가 있는 지인들에게 온갖 추잡한 협박을 가해도, 그들은 조용히 내게로 다가와 손을 잡아준 것이 나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큰 버팀목이 됐다.
2심 재판정에서 현재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출신 영사부인이 이런 증언을 했다.
"전여옥 씨의 특파원 시절, 우리 부부가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씨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자기가 책을 쓰고 있는데 유재순 씨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특파원이 취재한 내용도 들어 있다고 본인한테서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한 일본인 외교관 부인은 그날 저녁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다시 한번 주둥이를 잘못 놀리면 네 혀를 잘라 놓겠다. 그리고 네 남편을 한국에서 추방시켜 버리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외교관의 집 전화번호를, 그것도 부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된 일본영사의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것이다. 특별한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일반인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집 전화번호는 아니다. 결국, 재판과 관련된 사람이 협박전화를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전여옥은 계획적으로 내가 준비하고 있던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의 책 내용을 가져갔다는 얘기가 된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아직 저작권법에 대한 의식이 전무할 때였다. 아마 지금 상황이라면 그녀도 남의 것을 감쪽같이 도용한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전여옥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미안하다'라는 사과 한마디였다. '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과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네 것을 좀 가져다 쓰게 됐다. 미안하다.' 이 말이면 나는 그냥 덮어둘 생각이었다. 내 성격에 친구가 좀 욕심을 냈기로서니 하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런데 전여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질겅질겅 짓밟는 것도 모자라 학력비하에, 목숨을 걸고 취재한 르포까지 천박하다고 몰아세우고, 내 주변사람에게는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이간질을 시켰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내라고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이제사 이야기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아픔이 아니다. 배신처럼 쓰라린 아픔은 없다. 그것도 사람의 신분상승에 따라 말도 태도도 아주 대단히 세속적으로 달라져 간다는 것. 나는 그런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배신의 차원을 넘어 인간적으로 슬프기까지 했다.
맨 처음에는 나보다 더 분노하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본인이 나서서 대신 토로해주던 사람이, 전여옥이 한나라당 대변인에서 국회의원 신분이 되자,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식으로 태도가 확 돌변했다. 그래서 당연한 현상이지만 전여옥을 위해 써주는 진술서 내용 또한 그렇게 점점 변해갔다.
2심 판결 후, 너무도 많은 전화를 받아 내 귀가 윙윙거릴 지경이다. 한결 같이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고 믿어주었던 지인들이다. 아마도 이런 분들 때문에 그나마 아무것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유일하게 '사람'뿐이니까.
한가지 나를 믿어준 가족들과 지인 그리고 독자들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작년 11월 그 때 나는 서울에 있었다. 내가 현재 만들고 있는 제이피뉴스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금마련은 뜻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마침 그때 변호사로부터 합의조정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왔다. 재판부는 물론 전여옥측에서도 합의를 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세번은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때 많이 흔들렸다. 제이피뉴스 운영자금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급전이 필요한 만큼, 그래서 내가 변호사한테 말했다. '그동안 재판에 들어간 실제비용만 전여옥측에서 토해내도 합의를 해주겠다'고. 그 정도로 난 운영자금의 필요성으로 절박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여옥측은 합의만을 원했다. 당연히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지난 5년 반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많이 부끄럽고 또 죄송스럽다. 적어도 전여옥과의 재판에서 '사회정의'를 생각을 했다면,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주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었다면, 그런 타협같은 것은 애시당초부터 생각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일시적이나마 그런 '타협'을 시도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타협'은 나를 비켜갔다. 아마도 그 '타협'이 받아들여졌으면 2심 승소 판결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이 점 독자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지금까지는 그저 힘있는 그녀를 방어하기에만 바빴다. 그것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온갖 거짓말과 술수를 워낙 잘 쓰는 그녀의 본질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권모술수에 아주 능한 전여옥이 또 어떤 논리와 왜곡, 모함을 가지고 공격해 올 지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당한 만큼, 내 소중한 가족과 지인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은 그 몇 배만큼, 온전히 되돌려 받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이제부터 조용히 생각해 볼 일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험담을 거침없이 늘어놓을 때부터 그녀가 싸가지가 없고, 교양이 전무하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처럼 인간 말종일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우리 한국 말에 ‘인두겁을 쓴 짐승 같은 X’이란 말이 있다. 본래는 짐승인데 사람 껍데기만 쓰고 있다는 말이다. 정말 이 세상에 '인두겁을 쓴 짐승 같은 X‘이 있다면 바로 전여옥 같은 여자가 아닐까 한다.
그런 여자가 한나라당의 최고위원으로 버티고 앉아 있다. 한나라당을 대표하고 있다. 그녀를 추종하면서, 그녀에게 환호하고, 그녀를 떠받들던 이들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대단한 충성심이다. 그들이 지지하는 여자를 닮아서 그들도 모두 ‘인두겁을 쓴 짐승 같은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한나라당에서는 국민들에 대해 사과성명 한번 낸 적이 없다. 천하의 사기꾼을 최고위원 자리에 앉혀 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던지, 아니면 국민을 하챦게 여기는 처사이다.
그러나, 원래 거짓말을 취미로 하는 2MB는 열외로 하고, 한나라당의 의원들이, 그리고 한나라당의 당원들이 전여옥을 최고위원으로 그대로 인정하고 관용한다면, 이는 그들 역시 전여옥과 같이 ‘인두겁을 쓴 짐승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한 시라도 빨리 당의 명예 훼손을 들어 전여옥을 내치는 것만이 그나마 한나라당이 그들의 잘못을 만회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최고위원이 파렴치범이라니,
용산참사에서 공권력으로 애꿎은 국민들을 불에 태워 죽여 놓고 당사자들의 일이니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라면서 발을 빼는가 하면(당사자들이 과연 누굴까), 미디어법을 날치기 한 후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 하고, 수질악화 환경파괴 사업으로 결론이 난 사대강 사업을 녹색사업, 수질정화 사업으로 둔갑시키며, 20번 이상이나 원안 고수를 약속했던 세종시 문제를 당리당략 때문에 수정안을 밀어 붙이면서 국가백년대계를 생각한 고심의 결단이라고 사기 치는 2MB와 그 일당들을 생각할 때면, 전여옥의 얼굴이 유난히 크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전여옥이야말로 한나라당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2MB와 한나라당에게 제안한다. 전여옥의 얼굴을 당의 로고로 정하고, 전여옥의 동상을 한나라당 당사 앞에 세우라. 북에 있는 김일성 동상만큼이나 큰 동상을 세워 놓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다음 주문을 외우면서 항상 경배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위대하신 표절작가이시고 사기꾼이시며, 당의 최고위원이신 전여옥 동지여, 거짓말과 덮어씌우기로 일관한 항소 이유서를 쓰시느라고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없는 일을 있게 하시고, 나의 죄를 남의 죄로 만드시는 그 놀라운 필력은 능히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저희는 여옥님의 현란한 사기술을 길이길이 계승, 발전시켜, 대한민국이 망할 때까지 국민들을 끊임없이 속이겠습니다!”라고 말이다. 부끄러운 줄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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