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대담한 여자와 대담한 남자 ]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왠만해서는 여자는 건들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거슬렸다.
“ 대체 이게... ”
그 2학년의 손에 팔을 잡힌 채로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하는 그 여자.
모두들 교복을 입고 돌아다닐 시각에 이 여자는 사복을 입고 나타났다.
내가 일어서자 스스로도 위협을 느꼈는지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듯 했다.
엄청난 책을 들고 갈 정도라면 이 근방에 산다는 말인데 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난 그 책이 들어있는 서점 비닐봉지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봉지를 앞에 꽉 안으며 한발짝 더 물러섰다.
무서워하는 듯 했으나 눈빛만은 당당하고 날카로웠다.
“ 쏟아. ”
그런 내 말에 2학년 녀석은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피식 웃어대며 봉투를 빼앗았다.
여자는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그 봉투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와르르-
최소 400페이지는 넘을 법한 책 8권이 쏟아져나왔다.
고등부 물리 올림피아드 대비서부터 시작해서 일본에서 번역없이 들어온 대학교 수학책.
물리학에 관련된 영어 원서 등등.
난 발로 툭툭 쳐 가면서 책 제목들을 확인하고는 그 여자를 스윽 쳐다보았다.
고작해야 고등학교 1, 2학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모두 우리 형의 서재에서 본 것들이었다.
“ 선배. 이거 장난 아닌데요? ”
내게 말하며 킥킥 거리는 후배녀석.
여자는 꽤 자존심 상한다는 듯한 얼굴로 주저앉아 책을 주워들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우려고 했다.
타악-
내 발이 그 여자가 주우려던 책을 가차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주워들어 책장을 한두장 넘겨본 후에 후배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화르륵-
종이는 불에 잘 타는 물질이다.
기름을 먹여서 만든 종이인지 활활 잘 타올랐다.
그 책을 다른 책 있는 곳에 집어던졌다.
어느새 그 여자는 허탈한 눈으로 타들어가는 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어때. 봄이라서 그런지 난로 피우기에는 좀 늦은 감이 있겠지? ”
짜악-
비꼬며 말하는 내 얼굴을 저 여자가 쳤다.
꽤나 매운 손이었다.
“ 이 미친년이! ”
2학년은 어이가 없어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한번 보더니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검지손가락을 쫙 펴서 여자의 가슴 한가운데를 꾹꾹 누르며 뒤로 밀쳤다.
옆에서 좋다고 웃는 인간들.
툭- 툭-
‘ 펵 ’ 이라고 하기에는 소리가 좀 약했다.
하지만 2학년 후배는 타격을 꽤 입었다.
첫 번째 ‘ 툭 ’ 은 여자의 손이 상대방의 목을 정확하게 쳐서 나온 소리이고
두 번째 ‘ 툭’ 은 후배의 가운뎃부분... 그러니까 남자로써 최대의 급소를 걷어차서 나온 소리였다.
“ 으으... ”
녀석은 목도 아프고 아랫도리도 아파 죽겠는지 그 자리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러섰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험악하게 달려들려고 했다.
“ 씨파... ”
난 여자의 멱살을 두 손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솔직히 들어올리고 말 것도 없이 상대방이 너무 작았다.
고작해야 내 어깨에 정수리가 닿을까 말까 정도.
160cm도 채 안 되는 키였다.
“ 여기서 저 새끼 봐 주고 있어. ”
내 말에 녀석들은 우르르 괴로워하고 있는 2학년에게 다가갔다.
타악-
난 상당히 열이 받았다.
그 어떤 남자도 날 때리지 못했는데 여자가 겁 없이 손찌검을 해?
그래서 거칠게 아무도 없는 건물 벽으로 집어던지다시피 내팽개쳤다.
“ 야. 너 나 몰라? ”
“ ... ”
여자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 너 전학생이야? ”
“ ... ”
이번에는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 너 학교 어디야. ”
“ ... ”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소위 말하자면 주관적인 질문.
“ 대답해라. ”
협박어조인 내 말투에 여자는 나를 쳐다보았다.
상대가 여자라서 참고 있다는 내 눈빛을 그대로 읽었는지는 몰라도 입을 열었다.
“ 과학고... ”
“ 어디? ”
“ 서울과고... ”
서울과고. 서울에서 딱 2개 있는 과학고 중 하나가 아니던가.
내 뺨을 친 겁 없는 여자가 공부밖에 모른다는 과고생이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졌다.
난 쭈그려 앉은 채로 다시 그 여자의 멱살을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 빌어봐. 살려주세요 하고. ”
“ ... ”
여자는 모욕감이 드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원래 공부 잘 하는 인간들이 다 그런 거다.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 드높은 콧대.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은 인간 축에도 못 끼는 것 처럼 보이는 거겠지.
“ 그럼 그냥 놓아 줄테니까. ”
저번에 학교에서 1학년 여학생 한 명이 내 바지에 물을 흥건히 적신 일이 있었다.
그 때 아연실색 해서 무릎까지 꿇고 아주 애걸복걸 하면서 빌었었는데.
지금 이 여자와는 너무 대조된다.
“ 얼른. ”
타악-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가져가려는 내 손을 거칠게 쳐 내었다.
짜악-
기분이 한 층 다운 되어 그 여자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황에서 아예 옆으로 엎어져버린 여자.
난 그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쳤다.
무테 안경이 벗겨진 맨 얼굴은 그나마 볼 만 했던걸로 기억한다.
“ 빌으라고 했지. 살려주세요. 딱 그 한마디만 하면 돼. ”
하지만 여자는 입을 다물고는 계속 다른 곳을 응시했다.
볼에는 붉게 멍이 들고 입가에는 피가 주르르 흘렀다.
“ 씨발... 더럽게 안 꺾이네. ”
여자랑 상대하는 일은 노는 남자를 사이에서는 한마디로 쪽팔린 일이었다.
난 그 여자의 머리채를 놓아주고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는 여자를 다시 미행했다.
내가 여잘 미행도 하게 되다니, 참...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겼다.
여자는 빠르고 넓은 보폭의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곧 한 남학생과 마주쳤다.
내가 다니는 학교 2학년 남학생.
그 남학생은 여자를 보더니 놀란 듯 했고, 여자도 주춤했다.
그리고는 여자가 남자의 목을 힘껏 껴안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냥 작은 흐느낌이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뭔가 일이 있다 싶은지 여자의 등을 그냥 토닥였다.
난 찜찜한 기분에 뒤돌아섰다.
저 남자에게조차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는.
학교에게 저 남자를 찾아갔다.
남자는 아주 평범하고 평범한 그냥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었다.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게 못 생긴 것도 아닌 그럭저럭한 외모.
나에게 불쾌감을 심어 준 것은 여느 싸가지 없기로 소문난 깡패들이 아닌,
학업에 충실한 멋없는 남학생이었다.
“ 저거. 저거 끌고 와. ”
그리고 나서 단 1분 뒤에 계단으로 끌려 온 그 남학생은 내 앞에 무릎꿇려졌다.
남한테 무릎을 꿇는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지
황당함과 분노가 반반 섞인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 남자.
“ 어제 눈물겹게 끌어안고 있던 여자 누구냐. ”
“ ...! ”
놀랍다는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남자.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용감했다.
“ 피해 줄 만한 사람 아닙니다. 건들지 마세요. ”
저 평범한 외모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행동이 아니었다.
분명 상당한 위협을 느끼기는 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행동.
그 여자와 흡사했다.
“ 하...! ”
난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보통 때였더라면 주먹이 먼저 날아갔겠지.
“ 맹세한다. 절대 건들지 않을테니. ”
“ 과학고 1학년 여학생... ”
“ 너랑 무슨 사이야. ”
“ 중학교 선후배입니다. ”
하지만 그 여자는 중학교 선후배로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 여자를 찾아가보고 싶었다.
“ 됐어. 가 봐. ”
내가 언제부터 여자에 그렇게 집착하게 된 걸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