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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역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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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세존은 전 세계를 불국토로 이룩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여호와 하느님의 아들]이며, 곧 구세주란 고증(考證)은 모두루비문과 광개토대왕 비명에 뚜렷이 기록돼 있습니다.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하백(河泊)의 외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이다. 추모성왕은 처음 북부여에서 출생하셨다. 고구려의 聖人(성인)은 덕(德)으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려 천하 4방에서 다 알고 있었다. 본 연재의 주제는 [광개토대왕비명의 해설]이므로 고주몽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명확히 확인합시다.
[구 삼국사 소재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의 동명왕편] 단군(壇君) 해모수께서 처음 하늘에서 강림하신 날은 임술년(BC 239) 4월 8일이며, 秦始王政(진시왕정) 8년이었다. 천제(天帝: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를 부여의 옛 도읍터에 내려 보내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는 5룡거(五龍車)를 타고 백여 명의 시종들은 모두 백곡(白鵠:흰 고니)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올 때 채색 구름은 위에 띄우고 구름 속에 청아한 음악 소리가 들리었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며 십여 일이 지난 후에 비로소 내려왔는데 머리에 까마귀 깃으로 된 烏羽冠(조우관)을 쓰고 용의 형상을 刺繡(자수)한 龍布(용포)를 입고, 항상 허리에 빛나는 龍光劍(용광검)을 차고 오룡차에 오르면 백여 명의 시종이 모시었다. 아침에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시니 세상 사람들은 해모수를 천왕랑(天王郞)이라 불렀다.
성북(城北) 청하(靑河)의 하백(河伯)은 매우 아름다운 세 딸이 있었다. 장녀의 이름은 유화(柳花)이고, 차녀는 훤화(萱花)이고, 계녀는 위화(葦花)라 불렀다. 그녀들이 청하로부터 웅심연(熊心淵) 위로 놀러 나와 있었다. 그녀의 자태는 신 같았으며, 용모는 빼어나게 아름답고 몸이 빛났으며 장식한 패옥이 어지럽게 울려 한고(漢皐)와 다름이 없었다. 해모수 왕은 이들을 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왕비로 삼았으면 아들을 얻겠구나." 하자 그녀는 왕을 보자 즉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좌우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궁전을 지어서 여자들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어찌하지 않고 무례를 범하려 하십니까?" 하니 왕이 옳게 여겨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갑자기 금빛 찬란한 동실(銅室)이 생기어 장관이었다. 방 가운데 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술동이를 두었다. 그 여자들이 각자 그 자리에 앉아서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게 되었다. 해모수왕은 세 여자가 크게 취하기를 기다려 급히 뛰어가 막으니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장녀 유화만이 해모수 왕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하백은 크게 노하여 해모수 왕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나의 딸을 지상에 머물게 하였는가? 하니 해모수 왕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지금 하백에게 구혼을 청하고자 합니다." 하백이 다시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네가 천제의 아들로서 나에게 구혼을 청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중매를 보내야 될 터인데 지금 갑자기 나의 딸을 붙잡아 둔 것은 어찌 실례가 아닌가?
해모수 왕은 부끄럽게 여겨 장차 하백을 만나고 나서 보내려고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여자를 놓아주려고 하였으나 여자는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에게 권하기를 "5룡차(五龍車)만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해모수 왕이 하늘을 가리키며 고하니 문득 5룡거가 공중으로부터 내려왔다. 왕과 여자가 수레를 타니 갑자기 풍운(風雲)이 일어나며 하백의 궁전에 이르렀다.
하백은 예(禮)를 갖춰 이들을 맞이하고 자리를 정한 뒤에 말하기를 "천하에 혼인법이 통용되고 있는데 어찌하여 혼례 법을 잃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하였는가? 왕이 천제의 아들이라고 주장 한다면 무슨 신이함이 있는가? 하니 해모수 왕이 말하기를 "오직 시험해 봅시다." 라고 했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가 되어 놀자 왕은 수달로 변해서 이를 잡았다. 하백이 다시 사슴이 되어 달아나니 왕은 늑대가 되어 이를 쫓고 하백이 꿩으로 변화하자 왕은 매가 되어 그 뒤를 쳤다.
하백은 이 사람은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 여기고 예로써 혼인을 이루고 혹 해모수 왕이 자신의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도리어 겁이 나서 잔치를 베풀고 왕에게 술을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한 뒤 딸과 함께 작은 혁여(革輿)를 넣어 용거(龍車)에 실어서 승천하도록 하였다. 그 수레가 물을 채 빠져 나오기 전에 왕은 바로 술이 깨어서 여자의 황금 비녀를 취해서 혁여를 찌르고 그 구멍으로 홀로 나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하백(여호와 하느님의 딸)은 크게 노하여 그의 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했다." 하고 좌우에게 명령해서 딸의 입을 잡아 늘려 그 입술의 길이가 삼척이나 되게 하고 다만 노비 두 사람을 주어 우발수(優渤水) 강 가운데로 귀양 보냈다.
어느날 어사(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금와왕에게 고하기를 요즈음 양중(梁中)에 고기를 잡아가는 자가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금와 왕은 어사를 시켜서 그물로 끌어내게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 그물을 만들어 끌어내니 비로소 한 여자가 돌 위에 앉아서 나왔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그 입슬을 세 번 자른 뒤에야 말을 했다.
금와왕은 천제의 아들(해모수)의 비(妃)임을 알고 유화(柳花)를 별궁(別宮)에 두었는데 유화(사소)는 햇빛을 받고 그로 인하여 임신을 해서 신작(神爵) 4년 계해(BC 58년)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골격이 매우 크고 의표가 영웅답고 울음소리가 기이했다.
[註:환단고기는 [藁離郡(고리군)왕 高辰(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沃沮(옥저) 諸侯(제후) 弗離支(불리지)는 高辰(고진)의 손자가 된다. 모두 다 도적 위만(衛滿)을 토벌시킨 공로로 제후에 책봉되었다. 불리지는 과거 “하백의 딸 유화”를 서압록에서 만나 장가들어 漢弗陵(한불능 昭帝(소제) 2년 임인(BC79년) 5월 5일“고주몽(추모왕)”을 낳았다]
유화가 처음 주몽을 낳을 때 왼편 겨드랑이로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쯤 되었다. 금와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사람을 시켜서 이 알을 마 굿간에 버렸으나 여러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에 버렸으나 온 갓 짐승들이 모두 보호했다. 구름이 낀 날에도 그 알 위에는 언제나 햇빛이 있으므로 왕은 알을 가져다가 그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도록 했다. 마침내 알이 열리고 한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못 되어 말을 했다. 주몽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여러 파리들이 눈을 물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저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그의 어머니는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자 이 활로 방거(紡車) 위에 날으는 파리를 쏘아서 모두 다 맞았다.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 이라고 하여 이름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장대해지자 재능과 덕을 겸비하였다. 금와왕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사냥하였다. 금와왕의 왕자와 그를 따르는 40여명은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나 주몽은 사슴을 쏘아 잡은 마리가 매우 많았다. 왕자는 이를 질투해서 주몽을 잡아 나무에 매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 가 버렸으나 주몽은 나무를 뽑아서 돌아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신비한 용맹이 있고 눈길이 남과 다른 사람입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뒷날 우환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코자 하였다. 주몽은 속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을 먹이고 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으로 내려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어머니가 계시니 감히 마음대로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도 밤낮으로 속을 썩이고 있느니라. 내가 듣기로는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좋은 날에 떠나면 도움을 받는다 했으니 내가 말을 골라 주겠노라. 하고 드디어 말을 기르는 마구간으로 가서 긴 말채찍으로 말을 치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서 달리는데 한 누른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 넘었다.
주몽은 그 말이 준마임을 알고 몰래 말 혀끝에 바늘을 찔러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고 야위어 갔다. 왕이 馬牧(마목)을 순행하다가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마른 말을 얻어서 바늘을 뽑고 더욱 잘 먹였다. 고주몽(추모왕)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같이 남쪽으로 행하여 개사수(蓋斯水:엄리대수)에 이르렀으나 건널 배가 없었다.
추격하는 병사들이 갑자기 닥칠까 두려워서 이에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외손자입니다. 지금 난을 피해 여기 이르렀으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급히 주교(舟橋)를 보내소서." 하고 활로써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서 주몽이 건널 수가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추격병이 뒤를 따라 이르렀는데 추격 병이 물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의 다리는 곧 없어지고 이미 다리로 올라섰던 군사들은 모두 다 몰사하였다. 주몽이 어머니와 이별 할 적에 차마 떨어지기 아쉬워 말을 못하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어미는 염려하지 말고 떠나가거라, 하고 이에 오곡의 씨앗을 싸서 주었는데 주몽은 생이별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보리 씨앗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더니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주몽은 이 비둘기는 응당 신모(神母:하백의 딸 유화)가 보리씨를 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 후 이에 활을 당겨 이를 쏘아 한 살에 함께 잡아서 목구멍을 열고 보리씨를 꺼낸 다음 비둘기에게 물을 뿜으니 비둘기는 다시 살아나 날아갔다. 주몽왕은 스스로 잔디밭 위에 앉아서 임금과 신하의 위계를 정했다.
비류국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불러서 자리를 양보하며 말하기를 바닷가에 편벽되게 있어서 일찌기 군자를 본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 만나 뵙게 되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자손으로 서국(서천축국)의 왕이거니와 감히 묻고 있는가?
군왕은 누구를 계승한 왕이냐?" 하자 송양은 "나는 선인(仙人)의 후예로서 여러 대(代)로 왕 노릇을 했는데 작은 지방에서 두 왕이 땅을 나누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 나에게 부용(附庸)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자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천제를 계승하고 지금 그대는 신(神)의 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고 하는 구나. 만약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손(天孫)이라고 일컫자 속으로 의심을 품고 그 재주를 시험코자 말하기를 왕과 함께 활쏘기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사슴을 그려서 백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 들어가지 못했는데도 힘겨워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서 옥지환(玉指環)을 백보 밖에 걸고 이를 쏘니 기와가 깨어지듯이 부서졌다.
송양이 크게 놀라며 왕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새로 창업해서 아직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하되 내가 능히 왕에게 예로써 환영하며 전송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를 가볍게 보는 까닭이다." 하였다.
종신 부분노(扶芬奴:奴客(노객)가 나와 말하기를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국의 북을 취해 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타국의 감춘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인데 어째서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은 부여에 계실 적에 어려워하실 때 누가 대왕이 이곳에 오실 줄 알았겠습니까? 이제 대왕은 만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위태로움에서 몸을 벗어나 요수 왼쪽[遼左]에서 이름을 더 날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제(하느님)가 명해서 된 것인데 무슨 일이든지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가져왔다.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 와서 고각을 볼까 겁이 나서 북의 색을 어둡게 칠하여 오래된 것처럼 하였더니 송양은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은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附庸)시키고자 하므로 왕은 궁실을 짓되 썩은 나무로 기둥을 하니 오래됨이 천년이 된 것 같았다. 송양이 마침내 와서 보고 감히 도읍 세운 것의 선후(先後)를 다투지 못했다.
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사슴을 잡아 해원(蟹原)에 거꾸로 매달고 주술을 행해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의 왕도(王都)를 표몰(漂沒)시키지 않으면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 난관을 면하려면 네가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하니 사슴의 그 슬픈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장마비가 칠일이나 쏟아져 내려 송양의 도읍이 떠내려가 버렸다. 왕이 갈대 새끼줄을 가로질러 늘이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들이 모두 그 줄을 잡았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줄어들었다.
6월 송양은 나라를 들고 항복해 왔다.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 嶺)을 덮어 사람은 산을 볼 수 없고 오직 수천 명의 사람이 나무 베는 소리만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해 성(城)을 쌓고 있다. 고 하더니 칠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저절로 걷히고 성곽과 궁대(宮臺)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동명성왕은 하늘에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가을 9월에 추모왕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그 때 나이는 사십이었다. 태자는 왕이 남긴 옥편(玉鞭)으로 용산(龍山)에 장사를 지냈다. [본문 끝.]
[1]. 석가세존은 전 세계를 불국토로 이룩했다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진한,마한,변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국의 4국 또한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으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에 의해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역사적 진실은 이미 전편에서 다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 삼한이 멸망에 이르자 하느님은 해모수 천제를 지상에 파견하여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추모왕)을 낳아 잃어버렸던 고조선 삼한의 영토를 다시 회복합니다.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시대는 곧 중조선(中朝鮮)에 해당합니다. 後漢(후한) 明帝(명제:서기 58-75년)시대에 지상에 재림하시어 광개토대왕 재위때 석가모니(고주몽) 부처님이 고구려에 계셨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중 조선을 천축국이라 칭하게 된다.
즉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천축국은 인도가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던 5천축국을 두루 여행하시고 신라로 돌아온 [혜초의 5천축국 여행 기록문]입니다. 또한 5천축은 후삼한의 5가(五加)들이 건국한 나라이며, 각각 수십 개의 제후를 거느린 대국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삼신(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하고, 불교를 신앙했으나 중국의 북위(北魏), 수(隋), 당(唐)은 도교(道敎)를 신앙하고, 불법(佛法)을 믿지 못하게 하고 수많은 佛像(불상)을 파괴하였으며, 전국의 僧徒(승도)들을 무참히 참살하여 불교를 멸종시킨 三武一宗(삼무일종)의 法亂(법난)의 역사가 삼국시대의 난세(亂世)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란 이락 파키스탄 등의 중동지역은 기독교, 이슬람교가 흥성했으나 모두 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여호와 삼신]을 깨닫지 못하고, 인류의 아버지 태호복희 황제가 친히 창제하신 천리(天理)를 위배(違背)하며 종교가 변질되어 사회에 큰 해악(害惡)을 끼쳐 인간 세상은 그야말로 전투장으로 변해 있었다. 후한시대 석가세존이 다시 탄강하시고 서천축의 5가(五加)들과 함께 중국은 물론 중동지역의 여러 나라를 불교 정법을 교화하시어 동화되지 않는 국왕은 멸망시키고 바야흐로 전 세계 각국을 불국토(佛國土)로 이룩합니다.
[석가세존]은 여러 사람의 몸으로 化身(화신)하며 세상에 출현했으나 초인간적 聖人(성인)의 무량한 수명을 부정하고 특히 서기 400년대 석가세존이 생존하신 사실을 깨닫지 못한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남의 나라 조상으로 혼돈하였던 것입니다. 즉 돈황석굴에 석가세존의 역사적 진실이 뚜렷이 밝혀져 있으나“석가모니 부처”님을 실존(實存) 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옛 인도의 성인으로만 인식한 한국의 사가(史家)들이 잘못 주석(註釋)하여 오늘날의 한국인은 더욱 혼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돈황석굴의 주석을 바로 잡아 해설하겠습니다.
[2]. 세계적 문화유산의 돈황굴 유물을 도굴 절취했다
독일은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돈황석굴 탐험대’란 이름의 도굴꾼들을 베를린 민속학박물관의 인도부 부장 그룬베델을 대장으로 한 3명을 파견했다. 첫 도굴에서 46상자나 되는 유물을 가져갔다. 2차 탐험대장 르콕은 1904년 9월 투르판으로 향하여 약 두달 뒤인 11월18일 투르판의 카라호자에 도착해 약 4달간 머물면서 베제클리크 석굴을 비롯한 유적지들에서 유물 편취에 몰두한다.
르콕은 10년간 하미에서 카슈가르에 이르는 신장 전역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며 103상자분의 유물을 뜯어서 돌아갔다. 그 후 그룬베델이 합류한 1905~7년의 3차 탐험에서는 128상자의 유물을 또 베를린으로 가져갔다.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의 도굴꾼들이 투르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가져간 유물들은 유럽과 미국의 30여 개 박물관에 지금껏 ‘유물(流物)’로 유폐되어 있다.
독일과 러시아간에는 유적 발굴을 둘러싸고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이들 도굴꾼들을 악마들이라고 불렀다. 석굴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부 무슬림들은 불상은 모든 재앙의 근원이라 하며 곧 흉안(凶眼: 아이눈 랏마)으로 착각하고 불상의 눈을 도려내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20년여년 사이에 돈황의 4만여권에 달하는 경서와 많은 진귀한 벽화, 조각을 훔쳐 갔다.
1945년 갑자기 멸망한 일제는 조선총독부에서 보관 중이던 돈황석굴의 유적물을 가져가지 못한 공양보살상 등 투루판 명품만 600여점의 투르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현재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즉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했던 당시 중국을 여행했던 일본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이다. 조선의 유물 보관에 두려웠던 오타니는 구하라란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 돈황석굴의 우리나라 유물을 싹쓸이한 프랑스인 펠리오(右) © | | [3]. 돈황석굴의 유물은 신라의 유적물이다
중국 감숙성의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의 석굴 벽화는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대(魏代)가 22굴, 수대(隋代)가 90굴, 송대(宋代)가 103굴과 청대(淸代)에도 그린 것들도 있다. 현재의 이란(페르시아) 사산왕조가 무너지면서 조선의 서천축국 돈황으로 들어와 정착하는데 일명 호풍(胡風)이라고도 일컬었다. 당나라에서 페르시아의 여인들을 호희(胡姬):호나라 여인)이라 불렀다. 그들이 추는 춤을 <호선무>라 하며 돈황 벽화에 잘 나타나 있다.
1972년 둔황석굴 조사보존사업의 보고서에 의하면 492개의 동굴이 조사되어 2,000여 채의 채색소조상(彩色塑造像)과 4만 ㎡의 벽화를 조사 연구하고 500여 ㎡의 벽화와 30여 채의 소조상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견직물 60여 점, 748년의 문서, 인쇄된 불상 등을 발견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중국 감숙성의 돈황막고굴, 산서성의 운강석굴, 낙양의 용문석굴, 사천성의 대족석굴 등의 조각상은 조선국 5천축국의 유적물로 전편에서 입증(立證)돼 있으나 돈황석굴의 유적물은 우리나라 5천축국 중의 서천축 月支國(월지국)의 유적물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둔황 막고굴 61굴의 벽화 우타이산도의 신라승탑 그림(점선 표시된 부분).
3층 사리탑 모양으로 옆에 신라승탑 명문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동·남·북 세 벽면에 강렬한 색채로 신라(고구려)족 한족, 위구르, 호탄 출신의 여성 공양자상 52명을 그린 벽화가 있다.
특히 굴 중앙의 기단 뒤 서벽에 거의 완벽한 ‘신라의 오대산지도’가 그려져 있다. 전체 면적 250㎢에 달하는 산서성 오대산의 축소도인 이 그림의 길이는 13m, 폭은 3.4m로서 막고 굴에서도 가장 큰 벽화 중 하나다.
지도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남선사와 불광사를 비롯한 67개의 명찰 이름이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생활풍속도 그려져 있는데 그 속에 ‘신라○탑’이란 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20년 전에는 ‘신라승탑(新羅僧塔)’으로 또렷이 보였다고 한다. ‘신라 승려의 탑’(사리탑)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한 고승이 입적한 곳이 틀림없었다. 또한 ‘신라 송공사(新羅送供師)’ 즉 ‘신라에 공양을 보내는 법사’이란 글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닳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둔황 막고굴 237굴의 ‘유마경변상도 ’벽화에서 발견된 ‘조우관을 쓴 삼국(고구려)인 ’(그림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삼국시대 관모의 특징인 조우관(烏羽冠) 형태가 뚜렷하다.
[4]. 세계의 모든 종교계는 석가세존을 공경했다.
220, 335, 237굴- 삼국시대 조우관을 쓴 삼국인 벽화 조우관을 쓰고 등장한 인물들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석가세존을 친견하는 외교 사절, 공양사, 또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하는 실재 인물이 그려져 있다. 또 석가세존이 열반 후에 부처님의 사리를 분배하는 장면 등에 외국 사절들의 실재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다.
또한 20굴은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 좁은 회랑이 둘러있는데, 그 좌우벽에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왕후, 귀족들의 공양도가 그려져 있다. 석가세존을 공경하는 공양상마다 한문이나 위구르어, 산스그리트어로 공양하는 사람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이는 당시 세계 각국의 모든 나라에서 종교를 초월하여 석가세존을 공경한 증서입니다.
98, 428, 435굴 - 98호굴 남벽을 비롯한 여러 굴의 벽화에는 장구(장고)의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장면도 있다. 428굴 벽화에 하늘을 나는 비천상의 그림은 고구려 덕흥리 고분 전실 천장에 그려진, 천마상을 연상케 하며, 435호굴 벽화에서 인물상을 흑백색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기법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기단을 입체감 나게 그린 기법과 동일한 음양법이다. 이들 현상은 곧 신라, 고구려의 유적물로 대변해주고 있다.
[15굴 내 벽화],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의 신상(神像)이며, 인류의 부모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석가세존의 실재 인물상
▲ [15굴 내 벽화]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실재 모습 © 박병역 위원 | |
▲ 석가모니가 왕이었을 때 인물상입니다 © 박병역 위원 | | 15굴 서원화 중 석가모니가 왕이었을 때 실재 인물상 그림, 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원화(誓願花)의 일 부분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동명성왕으로 재위 했을 때 실존 모습의 그림입니다. 즉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의 묵서(墨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광개토대왕(서기 391-412년) 재위 시에 생존하고 있었던 역사적 진실은 이마 밝혀져 있습니다. 따라서 돈황석굴의 석가세존, 관음보살, 가섭, 아란존자 등의 인물도는 실존 인물상이 틀림없습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제자 가섭과 아난의 모습 © 박병역 위원 | |
▲ 불사불(弗沙佛)부처에게 공양하는 석가모니 © 박병역 위원 | | 서원화(誓願花)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 부처가 되기전 弗沙佛(불사불) 부처로 부터 먼 훗날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내용의 그림이다. 4호굴 입구의 좁은 회랑 좌우 벽면에는 갖가지 서원도들이 그려져 있다. 15개의 주제로 된 서원화로서 모두 전생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과거불(過去佛)에게 공양을 올려 미래에 성불할 것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표현하였다. 15굴에 과거불 이라는 벽화가 있으며 그 밑에 왕, 브라만, 상인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제4호(현20호) 이 그림들은 20세기 초까지는 잘 보존되고 있었으나, 독일의 그륀베델과 르콕, 일본의 오오타니, 러시아의 올덴버그, 영국의 스타인등이 벽화와 소조 불상들을 절취해 가 현재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 석굴 내 벽화(서원화(誓願花) 파편), 국립중앙박물관 © 박병역 위원 | | 투루판 베제클릭 석굴사원 부처의 서원화(誓願花)이다.본생경(本生經)을 표현한 그림인데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기전 서원하며 弗沙佛(불사불)에게 공양한 꽃이다.
▲ [15굴], 세존에게 공양하는 사람, 국립중앙박물관 © 박병역 위원 | | 서원화(誓願畵)의 일 부분으로 그림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 오른쪽 아래 부분에는 당시의 부처 또는 과거불이 밟고 서있던 연꽃 대좌의 일부가 보인다.
▲ 관세음보살의 실 인물 그림 © 박병역 위원 | | 31굴에는 동벽에 배를 타고 피안으로 가는 석가의 본행경도(本行經圖)와 열반경변도, 공양도가, 불단 정면에는 회골 칸의 공양도가, 서벽에는 복식 세밀도가 그려졌으나 지금은 거지반 없어졌다.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 부분은 없어지고 윗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의 좌측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100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왕자들의 눈만은 온전히 남았다.
투르판 베제클릭(柏孜里克) 석굴 (천불동) 북천축은 쿠차(500~700년대)와 투프판(650~1200년대)이 있다. 쿠차에 축조된 석굴 사원의 장식품 및 의복 물품, 사람들의 얼굴 등의 수많은 벽화가 정교히 그려져 남천축(인도) 및 이란등의 여러나라 문화를 알 수 있다. 오늘날 까지도 인구의 대부분이 위구르인(약 10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구르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 많이 있다. 따라서, 투르판의 베제클릭 석굴 벽화에는 위구르적인 소재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을 뜻한다. 투르판 동쪽 57㎞에 위치한 베제클릭 석굴은 현재 83굴까지 확인되고 있는데, 그 중 벽화가 남아있는 굴은 50개이며, 벽화의 총면적은 1,200m에 달한다. 장방형의 기본 구조에 궁륭형穹窿形 천장 구조인 석굴이 많고, 백화는 내벽 전면에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 묘사된 인물의 모습과 복장은 고구려풍과 더불어 위구르, 몽골식도 보이는데, 9세기 이후에는 대개 위구르인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석굴 38호 벽화 나무 아래에 흰옷을 입은 마니교 신도들이 표현 되어 있다. 이는 위구르족이 고창(高昌)으로 이주해온 직후만 해도 주로 마니 교도들이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예이다. 지금도 新疆(신강)에서는 위구르 문자가 한자(漢字)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 석굴벽화의 위구르 문자, 국립중앙박물관 © 박병역 위원 | | 베제클릭 벽화의 불교 주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 석가세존의 서원화(誓願畵)와 천불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석굴 33호의〈석가열반도〉의 애도하는 제자상들은 비개성적인 안면 처리에서 탈피해 다양한 생동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며, 석굴 16호의 〈기악도伎樂圖〉에 보이는 고대악기인 소홀뢰小忽雷, 또는 석굴 17호의 〈지옥변地獄變〉등의 경우는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베제클릭 벽화의 명품이라 할 수 있는 〈위구르 왕자, 왕녀상〉은 세밀히 묘사된 안면의 각 부위, 옷감의 세심한 문양 처리, 바닥의 양탄자 등의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위구르왕자回鶻王子〉는 베제클릭 제 9굴 중당中堂 문벽門壁안벽 오른쪽에 3인씩 3단에 걸쳐 그려진 남성 시주자施主者중의 일부 이다. 벽화의 세 사람은 모두 높은 지위의 관冠을 썼고, 관끈을 턱밑에서 매었으며 긴 머리카락을 등 뒤 허리께에까지 드리우고 있다.
가장 오른쪽의 사람은 수염 숱이 적은 왼편의 두 사람과는 얼굴빛이나 눈 꼬리의 치켜진 정도가 다르게 표현 되었는데, 이로 보아 이 인물은 다른 두 사람보다 고위의 위구르 귀족으로 부처님에게 시주하는 자의 중심인물인 듯하다. 세 사람 모두 읍한 자세의 두 손에 꽃 한줄기씩을 잡고 있는데, 이 꽃줄기는 저들이 죽은 후에 더해진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앞의 인물 오른쪽의 여백에는 샤리족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들은 북천축 고창(高昌)에서 장기간 영화를 누린 위구르의 명족名族으로 전해진다. 베제클릭 제9굴 중당 문 벽의 안벽 왼쪽에 있는 3단의 여성 시주자상 가운데 제일 위의 단 부분에 있는〈위구르왕녀回鶻王女〉에는 각기 한줄기씩의 꽃가지를 두 손에 잡고 읍하며 화면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선 두 여성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 오른편 위의 명문을 르콕이 해독 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름다운 왕녀의 초상화”라고 한다. 중앙아시아 회화의 대부분은 벽화의 형태로 남아 있다.
회화작품의 주제는 종교를 비롯한 제식祭式, 설화, 신화, 민속, 역사 등 매우 다양한데, 무엇보다도 불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적 주제가 부각되었던 현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친히 인간 세상에 계시면서 중앙아시아의 많은 유목민들과 지배자들을 불법으로 교화하시어 불교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제 10호 굴의 벽면에 네모형태의 굵직한 글씨가 써있다. 거기에 한락연(韓樂然)이라는 이름이 있다. 한락연 선생은 1898년에 태어나 1930년대에서 부터 1940년대 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던 화가라고 한다. 그의 생의 마지막을 이곳 키질 석굴에서 유물들의 고증에 전념하다가 1947년 우루무치에서 난주로 가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세상을 떴다. 따라서 그림들이 나타난 연대는 1800-1900년까지 소급할 수 있다.
제 17호 굴은 너비가 약 3m 가량 되고 길이가 약 7m 가량 되는 장방형으로 되였다. 뒤쪽 중간에는 천정에 닿인 정방형 기둥을 쪼아세웠다. 굴은 이 기중에 의해 전실과 후실로 갈라졌는데 전실은 높다랗고 널직하며 후실은 낮다. 기둥 양켠에는 각기 전실과 후실로 통하는 좁다란 복도가 있는데 이것은 부처를 공양하는 사람들이 예배때 사용하는 <지제굴>이다. 굴의 천정,사면벽의 복도,감실의 문미에는 아름다운 채색벽화가 그려 있다.
17호굴은 중형동굴로서 아주 작은 굴 천정에 38종의 본생도를 그려 놓았으며 <이야기그림중의 으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키질 천불동에는 현재까지 알아낸 본생도가 60-70종이나 되여 돈황,운강,용문 세곳의 석굴 본생도를 합한 총수보다도 두배 더 된다. 17호굴 벽화의 인물을 보면 아주 근사하며 선이 굵고 소탈한 품격이다. 그림의 인물들은 얼굴이 위엄 있고 눈에 광채가 돌며 입술이 불그스레하고 얼굴 표정에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혜초왕오천축국전(慧超往五天竺國傳)
중국 감숙성의 둔황 17굴, 61굴에서 신라 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 혜초는 780년경 오대산에 들어가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 한 줄만 알 뿐 그 절이 도대체 어디의 어느 사찰인지 몰랐다. 그러던 중 61호굴에서 단서를 찾았다. 61호 굴은 사방이 14m 정도로 막고 굴 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굴이다.
신라의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학자 펠리오가 돈황 막고굴의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했다. 발견 당시 제목도 저자 이름도 떨어져 나가고 없는 필사본은 세로 28.5cm, 가로 42cm인 종이 아홉 장을 이어 붙인 두루마리로서 그 길이가 358cm에 달한다. 한 行에 30字 정도가 쓰인 227行으로 모두 6000여 字가 쓰여 있었다.
1300여 년 묵은 이 두루마리의 실체를 밝혀낸 사람은 첫 발견자인 펠리오였다. 한문(漢文)에 능숙한 펠리오는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기 전부터 당(唐)의 승려 慧林(혜림)이 지은 「一切經音義」를 통해 이 여행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는 제100권 「혜초왕오천국전」 편에 주석된 85개의 어휘 중 일부가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에 있는 어휘와 일치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 두루마리가 혜초왕오천축전(慧超往五天竺國傳) 필사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往五天竺國傳」에 혜초(慧超)가 신라 사람이라고 밝힌 사람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 일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밝혀졌다. 「往五天竺國傳」에는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그 누가 소식을 전하러 계림(鷄林:신라)으로 날아가리」라는 혜초(慧超)의 자작시 등이 적혀 있었다. 즉 지금부터 1300년 전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스님은 신라의 남쪽 광동성(廣東省)의 일남(日南)에서 출발하여 5천축국을 두루 여행하시고 고국의 신라 땅을 그리워하시며 읊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멀기만 하구나 흘러가는 저 구름 편에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결이 거세져 화답(和答) 조차 들리지 않겠네
나는 하늘가 북서쪽에 있고 내 나라는 땅끝 남녁에 있건만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계림(鷄林:신라 땅)으로 날아가 이 소식을 전하리오
혜초의 기행문에서.....한 달 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쿠시나국)에 도착하였다. 성은 황폐하여 사람이라고는 살지 않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스님 한 분이 그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었다. 8월 8일 스님과 여승, 도인과 속인이 모두 이곳에 모여 대대적으로 불공을 드렸는데 그 때 공중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깃발이 휘날리었다. 그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기하여 불교를 믿으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왕오천축국전의 내용 일부- 모두루비명에서 고주몽(추모왕,동명성왕)은 공중에서 말을 타고 깃발을 휘날이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원문1. © 박병역 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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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원문2. © 박병역 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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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중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더가면 대식국에 이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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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신라의 혜초 스님의 친필왕오천축국전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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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도를 세계에 전파한 신라의 마랑(馬郞)들
신라는 나이 20살 쯤 된 남자 중에서, 아름답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마랑(馬郞)이라는 직책을 주어 원행(遠行: 세계 여행)을 명하였다. 혹 성생 월식의 옛 땅에 나아가며, 혹 운해와 천산의 여러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게 하였다. 세계 여행의 먼 길을 떠나는 원행은 천부도의 수신(修身)이며 옛 고조선 삼한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제도이었다.
신라 국이 침략자를 피하여 동해에 살고 있는지 천여년 사이에 제시회(祭市之會)를 열지 못하여, 서로 5천축국의 내왕이 오래 동안 끊어지고, 또 봉국쟁탈(封國爭奪)의 풍조가 사해에 만연하여, 제족들이 각자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고, 오랜 세월에 전란이 반복되니, 삼한민족은 종횡으로 나누어지고, 말이 잡다하게 변하였다.
천부도는 거의 망각하기에 이르렀고, 혹 아는 사람이 있어도, 다 변형(變形)되어, 음이 다르니, 마랑(馬郞)들의 원행이 매우 어려워, 도중에 순절(殉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랑들이 만리 원행에서도 하느님을 숭배하는 천손 국의 절조를 지키며, 굳은 뜻을 가지고, 백난을 능히 극복하며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그 인격은 실로 호매(豪邁)하였다. 장도에 올랐다 돌아온 사람은 반드시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數)와 박물(博物)의 직사(職事)에 임명하였다. 이는 곧 선세의 환국시대부터 전 세계에 천부도(天符圖:하도,낙서)로 통용하여, 인간 세상을 하나의 법에 맞추는 유업이었다.
▶ 신라의 혜초 [慧超, 704~787]
신라의 혜초는 마랑에 선발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신라의 남쪽 廣東省(광동성) 광주[廣州]의 일남(日南)에서 출발하여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723년 남천축(인도)에 도착하여,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우고 북천축의 파미르고원 天山州(천산주)를 넘어 727년경 신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龜玆]에 도착하였다. 733년 신라의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과 밀교(密敎) 경전을 연구하고 한역(漢譯)에 착수했으나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740년(효성왕 5)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으나 그 뒤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삼장(不空三藏)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을 강의 받고, 773년 대흥선사(大興善寺)께서 다시 역경(譯經)을 시작하여 불공의 6대 제자 중에 제2인자로 유촉(遺囑)받았다. 780년 5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전에 필수(筆受)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787년에 입적하였다.
[5]. 석가세존을 蒲圖王(포도왕)이라 불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부처라 하면 석가모니만 부처로 인식하고 환인, 환웅천왕, 단군왕검, 해모수, 동명성왕, 박혁거세왕, 김수로왕 등은 부처인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일체지혜에 형통한 불멸의 不死(불사) 聖人(성인)을 佛(불:부처)라 하고 도교는 신선(神仙)이라 합니다. 즉 일체 지혜에 형통한 초인간적 사람을 성인, 신선, 부처라 합니다.
일체지혜에 형통하신 [석가모니 부처]는 천상과 지상을 수시로 왕래하며 국왕, 또는 보살로 때로는 보통 사람으로 심지어 外道(외도)의 장으로 化身(화신)하며 수천년 동안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셨습니다.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문헌상으로 석가세존은 桓國(환국), 震旦國(진단국), 신라, 고구려, 가야국 등 주로 우리나라에서 설법하셨습니다.
[삼국유사의 遼東城育王塔(요동성육왕탑)] 동명성왕은 前漢(전한) 元帝(원제) 建昭(건소) 2년에 즉위하여 成帝鴻嘉(성제홍가) 壬寅(임인:전19)에 승하 하시어 시대는 맞지 않으나 漢(한) 시대에 貝葉(패엽)에 기록한 梵書(범서)를 읽었다 하였으니 혹 동명성왕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신지 알 수가 없다. 後漢(후한) 때 [석가세존]의 이름은 蒲圖王(포도왕,본명은 休屠王(휴도왕)이며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제사하시던 金人(석가모니)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후부터 佛法(불법)이 시작된 始末(시말)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석가세존은 BC 1,027년 4월 8일 탄강하시고, 1천년이 지난 서기 60년에 또다시 인간 세상에 재림(再臨)하시어 蒲圖王(포도왕, 休屠王(휴도왕)이란 이름으로 출현하시어 12인연(因緣)의 인과응보(因果應報) 법을 설법하시므로서 세상 사람들은 佛法(불법)이 시작된 始末(시말)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세존은 광개토대왕 재위시의 서기 400년경 인간 세상에서 생존하고 있었던 역사적 진실을 우리역사는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 석가세존을 지극히 공경하였습니다. 끝.
다음 주는 [광개토대왕은 일본을 멸망시켰다] 가 연재됩니다.
박병역(朴炳譯)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韓國精神文化宣揚會)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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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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