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 소리봉 일대 천연림
나무를 자연으로 되돌려 줄줄 아는 문명은 사막이 안된다.
나무를 대신한 새로운 신소재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나무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 대체재가 개발돼도 아마존의 열대 우림은 물론 우리의 산림도 매년 잠식되고 있다. 숲 그리고 문명 그리고 사막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진행 중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있다."
2세기를 앞선 문필가 샤토브리앙의 통찰력은 그래서 존경 받는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전차의 수레바퀴도 나무였고 인명살상을 일 삼는 창도 나무였다. 승리자의 대궐도 나무였다. 그리고 그들이 일구어낸 문명, 문화도 나무였다.
그러나 나무를 먹고, 나무를 유린하고, 나무를 학살하여 꽃을 피운 문명은 결국 나무를 자연으로 되돌려줄 줄 몰랐던 나무 수탈의 문화로 해서 사막의 모래 속에 묻히고 말았다.
우리는 다행히 나무를 자연으로 되돌려 줄줄 아는 문화를 지녔다.
우리나라는 나무를 바탕으로 꽃을 피운, 온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 유산이 제법 많은 국가 중 하나다.
세계적 예술품으로 조명되고 있는 조선백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조선백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양을 연소시켜도 숯이나 재가 남지 않고 충분한 열량을 낼 수 있는 최상의 연료재인 소나무가 풍부했기에 가능했다.
조선백자
세계 최고의 인쇄술도 나무가 있어서 가능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인쇄활자본 "직지심경",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그 것이다. 흔히 천 년을 두고도 삭지도 썩지도 않는 한지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 또한 양질의 닥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민족의 독특한 목조문화가 주거문화로 자리잡게 된 것은 한반도에 자생하는 소나무의 역할이 컸다. 특히 대표적인 목조건축물인 궁궐은 모두 소나무로 지어졌으며,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우리 토종소나무로 복원되고 있다.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도 마찬가지로 복원 중이다.
이웃나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목조반가사유상은 6세기경 우리나라 소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서 자라는 금강송(金剛松)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의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의 유사성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고종(13세기)때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려고 만든 팔만대장경은 산벚나무, 자작나무,돌배나무 등 우리나라 자생 활엽수종을 원판으로 사용한 것으로서 1995년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판
우리나라에서 칠화칠기, 나전칠기 등의 칠기문화가 꽃피고 팔만대장경판과 같은 문화재를 좀벌레나 곰팡이로부터 오랜 동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옻나무에서 추출한 천연도료로 옻칠을 했기 때문이다.
나무약탈식 문화 이젠 그만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나무를 활용할 줄만 알고 되돌려줄 줄 모르는 무절제한 나무 약탈식 문화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벌목 작업 현장에는 그 문화가 아직도 살아 있다.
수종갱신을 위한 개벌이든 숲가꾸기든 작업에 앞서 엔진톱기능사들은 벌목이 지정된 나무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그 연후에야 대표 엔진톱 기능사가 "어명이오!"를 큰 소리로 외치고 톱을 댄다.
무절제한 나무약탈식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나무를 소중히 다루었던 한 일면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군왕의 명령이 있어야 비로서 나무를 벨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벌목허가는 엄격히 제한돼 받아내기 힘든 허가로 알려져 있다.
역사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조실록, 속대전 및 만기요람 등 자료에 따르면 많은 지역을 금산 또는 봉산으로 지정하여 이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나 봉표를 설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는 2008년도부터 문헌에 나와 있는 황장금표 및 봉산표석에 대해 전국적인 조사를 시작해 22개소를 발굴한 바 있고 조사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황장금표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벌채를 금지시킨 표석으로 표석이 위치한 일대가 황장목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다.
황장목(黃腸木)은 우리나라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 속 부분이 누런색을 띠고,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주로 왕실의 관곽재로 사용됐던 나무이다.
울진소광리 황장금표
우리조상들의 나무 보호정책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면면이 이어졌다. "금산", "봉산", "송금절목" 이니 하는 말들은 나무의 소중함을 알려 목재자원을 육성했던 국가정책의 표식인 것이다.
임진왜란은 소나무의 승리
특히 조선시대에 겪었던 임진왜란은 그 승리가 거북선으로 대변되듯 소나무의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돌격선인 거북선이 왜군의 관선을 충돌해서 산산조각 냈다. 깨지기 쉬운 삼나무로 만든 왜선을 소나무로 만든 거북선이나 판옥선이 좌충우돌 격파했던 것이다.
집이나 선박을 만드는 유용한 재료로써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소나무가 특별한 관리의 대상이 되었던 그 시대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승리는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소나무 뿐만 아니라 밤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보호 생산 하기 위해 율목봉표(栗木封標)와 진목봉표(眞木封標)를 세워 지정된 숲을 표시하기도 했다.
우리는 전통있는 치산치수의 명가
우리민족이 수많은 외침으로 수난을 겪었던 것은 코흘리개도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일제의 식민 수탈과 6.25는 참혹하리만치 고통을 안겨줬다.
산림은 벌거숭이로 파괴됐고 산사태와 홍수는 매년 반복돼 많은 재산과 인명을 앗아갔다.
대전 대덕구 무수리 복구전 민둥산과 복구후의 모습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듯 전통 있는 "치산치수"의 명가가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짧게는 30년 길게는40년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민둥산을 울창한 산림으로 가꾸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의 국토녹화 성공을 근대사에 있어 유일무이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안주는 금물 자연의 경고에 귀를 기울리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만족해야 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안타깝지만 산림훼손의 정도는 덜하다 해도 우리의 산림면적은 매년 잠식되고 있다. 홍수와 산사태도 매년 이어진다. 휴양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입산자 과실에 의한 산불도 심각하다. 지난날 치산치수의 결과에 안주할 수 없는 이유다. 어느 때보다도 산림 가꾸기에 온 국민이 관심을 쏟을 때라는 생각이다.
혹한, 혹서, 잦아진 태풍, 끊이지 않는 산사태 등 자연이 주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글 : 알통 http://blog.daum.net/dumjik/ 사진자료 산림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