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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조계종 종정 혜암스님께서 일갈하신 바 있다.
“천년 된 고찰이요 아무리 큰 절이라도 제대로 수행하는 자가 없으면 그곳은 술도가요,
도살장이라도 정진하는 사람이 있는 곳은 큰 절이라.. “
참사람, 참수행자가 있는 곳엔 역시 따뜻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있다. 생동감 있고 편안하다. 이번 10월 금강 정진회가 있었던 영평사가 그런 절이다.
몇 년 전 중국의 백마사에 들러 부처님을 참배한 적이 있다. 백마사는 중국이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후 최초로 지어진 그야말로 고찰이다. 고찰이요 대찰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너무 삭막하게 느껴졌다. 수행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여러 절을 순례하면서 생각했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수행자들이 있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스님들이 주석하는 생동감 넘치는 절이 무수한 한국 땅의 불자여서 너무 다행이라고..
중국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다니던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 감사함으로 엎드렸던 일이
생각난다. 햇살이 가득한 법당의 부처님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불과 2주 전, 석남사에서 작은 아이를 돌보아주셨던 석남사 무위스님이, ‘영평사 달빛 아래 구절초 향이 참 좋습니다’ 라고 전해주셔서 아이와 함께 내려갔었다. 그곳 주인이신 환성스님의 취재를 위해 물론 녹음기도 챙겼다.
영평사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구절초 축제가 한창이던 영평사엔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사람 냄새가 가득한 축제의 장이었다. 다음 날, 무슨 음악회가 열려서 한층 열기가 가득찬 것을 보면서 ‘아! 조용하기만 한 절도 이렇게 가끔 축제의 장이 되면 좋겠구나.. ’ 했다. 축제와 적정이 함께 하는 사찰이라면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더 어필하겠다 싶었다.
나중에 스님께 들으니, 20년 전 영평사를 창건하고 들어와 사시면서 ‘수행과 일과 포교’를 3대 슬로건으로 내걸었다고 하셨다.
2주 전 스님의 모습이다. 출가하신지 40년, 올해 육십이라고 하시는데.. 믿는 사람이 없다.
(보리씨님의 평생도반님 작품)
다음날 아침 7시. 일찍 시작된 인터뷰 중간에 환성스님께서 물으셨다.
“수행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열다섯 살에 처음 출가를 결심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아홉에 뒤도 안돌아보고 안면도 간월암으로 출가하셨다는 말씀을 하신 후였다.
출가해서 20년 동안 선방에서 공부하고 난 후, 신도들에게 기대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홀로 공부하려고 들어온 곳이 이곳 장군산 자락이라고 하셨다. 한 일년 동안 홀로 잘 공부하고 있는데 절 곁에 사는 분들이 와서는 ‘진짜 스님을 보았다’고 하면서 불교 좀 가르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수행자가 되어 살고 있으니 부처님 은혜도 갚을 겸 그분들에게 불법을 가르치다보니 청소년 포교에도 간여를 하게되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자급자족의 범위가 더 넓어져 죽염을 만들고, 순수한 우리 농산물로 만든 된장 고추장 간장, 그리고 구철초액 등을 생산 판매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물론 이익금은 청소년 포교, 불우이웃 돕기 등 세상에 회향된다고 하셨다.
내가 대답했다.
“본성을 회복하는 거겠죠.”
그리고 덧붙였다
“최근에 혜암스님 법문집에서
‘불법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잊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심을 증득하는 것이다. 무심을 증득해야 비로소 대자유인이 될 수 있고 불교를 철견한 것이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불법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을 증득한다는 것은 분별하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선이다 악이다,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살면서 저희는 한순간도 이런 분별을 멈추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분별을 멈추는 것이 무심일텐데, 본성의 회복은 무심이 증득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간의 전쟁에서부터 가족간의 갈등 등 인생사의 크고 작은 모든 다툼이 이 분별에서 일어나니, 저 선지식들께서 하신 말씀은 고금의 진리인 것 같습니다. “
스님이 우려주시는 연꽃차에 취해서인지 대답이 좀 길었다. 스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분별없는 무심이 되면 뭐할 겁니까? ”
“...... ”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 출가해서는 오직 도만 닦아서 3년 안에 마치고 중생제도하겠다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게 간단하지 않잖아요. 지금도 원력이라면 금생에 해마치는 거죠.
나는 인정이 많아요. 이곳에 있으면서 몇 번 걸망을 쌌어요, 공부에만 몰두하려고.. 그런데
이미 함께 살려고 모인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어요.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고 생각하면서 수행을 유도하게 되었죠(영평사는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된 사찰이다).
아까 수행의 목적이 분별심 없는 무심이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맑히는 공부가 불법이죠. 그러나 불교는 무심을 활용해서 끊임없는 자비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무심이어야 하고 깨달음이지만 궁극으로는 모든 존재들이 다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불법을 그냥 관념적으로 알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고 다 같이 행복의 길로 갈 수 있게 유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대승적인 수행자세죠.
나는 아직 불법을 철견하지 못해 하는 일이 어설프지만 이런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 골짜기에 있으면 그 골짜기만 아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해제가 되어도 남들처럼 어디를 만행하지도 않은 채, 붙박이처럼 그곳에 머물며 밭갈고 도량을 가꾸던 선승이 수행과 일과 포교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세간 사람들을 껴안고 사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님께선 자신의 단점이 자비가 결코 아닌 인정이 많은 거라고 하셨지만, 스님을 알고 있는 분들은 한결같이 스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참.. 자비로운 분이세요.”
두 번 뵈었지만, 참 편안하고 매듭이 없으신 분으로 느껴졌다.
함께 자리했던 무위스님께서 조용히 여쭈었다.
“저는 출가할 때 도를 깨쳐야지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중생들 쪽에 마음이 많이 갔어요. 공부에 질주하면 될 것 같은데, 마음이 중생들과 같이 가야한다는 것에 자꾸 머물렀습니다. 경을 모르는 사람은 봐주어야 하겠고요.
그러다가 몇 년 전 미얀마에서 수행하면서 생사해탈에 마음이 가는 거예요. 나고 죽은 업을 그만하고 싶은 거예요. 중생들에게 힘이 되고 싶고, 행복의 길을 정확하게 확보해 주면서 같이 가고 싶었는데..
이젠 우선 순위가 정해진 거예요. 제가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힘이나 신뢰를 주더라도
차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정도 수행하고 싶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있어요.”
출가해서 10년, 이제 분명히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결정해야 할 시점인 때문인지 무위스님의 물음은 간절했다.
“그래야죠. 내가 힘이 없는데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되면 그때까지 그렇게 하세요. 수행자의 근본 원력은 중생제도에 있으나 자성제도 또한 급하니까 그렇게 해야죠. 평생을 깨치지 못하면 그렇게 해야 맞는 건데, 나는 마음이 약해 딱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눈을 못 감았어요. 시봉했던 스님들 중엔 결핵을 앓는 분 등 환자가 많았어요. 어떻게든지 살려내려는 쪽에 마음이 갔죠. 그런데 그런 것이 생사 양단엔 상당히 더뎌요.
그래도 생각해보면 부처님께선 수십억 겁을 닦으셨잖아요. 일정한 법이 없어요. 다만 목적이 생사해탈이고 중생제도라면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다 해보는 거죠. “
그러면서 스님은 후학에게 인정 많고 자비스러운 분다운 말씀을 해주셨다.
“후배들에게 부모님에게도 ‘자비스러워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출가해서 25년 동안 집과 담을 쌓았어요. 이것 마치기 전엔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어머니는 내가 출가하자 병이 나서 돌아가셨는데, 단 한 번도 걱정을 안 끼치다가 출가하면서 그런 큰 불효를 한거죠.
나이들어 생각하니, 혈연에게 그렇게 매정할 것 없어요. 자비스러워야죠.
부모님에게도, 스승에게도 최선을 다해 시봉도 하고 자비스럽게 하는 것, 그것이 공부라고 봐요. 규제 아닌 청규가 필요한 거죠. “
스님은 어렸을 적부터 너무 점잖고 모범적이어서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조차 어려워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신발 한번 끌고 다닌 적이 없으며 공부 잘하고 매사 절도 있었다고 하셨다. 출가를 앞두고 한 가지 걱정이, 그리도 막내 아들을 사랑하던 어머님에게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드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하셨다.
“제가 출가하지 많으면 단명할 팔자라서 일찍 죽는대요, 엄마.”
어머닌 나이 어린 자식의 그 지어낸 말을 듣고 아픈 가슴으로 막내 아들의 출가를 받아들이셨을 거라고 하셨다. 나이 들어 부모님에게 너무 무정했던 것을 깨우치고 잘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는 두 분 다 이미 세상이 안계시더라고 하시면서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하라고 하셨다.
부모님에 대한 효가 어찌 승가에만 해당하겠는가. 그래도 스님의 말씀이 너무 가슴 아프게 들렸다.
출가해서 몇 달 후 서류 때문에 집에 들렀더니, 말수가 적으신 아버지께서 ‘참.. 복색 좋구나.. 중노릇 하다가 나오면 상놈에 들어가는 거다..’ 하셨다고 한다.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고맙고 좋았는지 모르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렇게도 그립더라고 하셨다.
“연세 들어 부모님이 그렇게 그리우셨던 걸 보면 힘드셨을 땐가 봐요?”
“아닙니다. 난 힘들어도 거기에 몰입할 뿐 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났다. 몰입할 뿐.. 그렇다. 분별없이 몰입해서 최선을 다할 뿐아닌가. 삶이란 것이..
永平寺. 영원한 평화란 뜻이 아닐까 여쭤보았더니.. 불멸의 행복이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여쭈어보았다.
“불멸의 행복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마음 맑혀 본성을 회복해야 불멸의 행복 아니겠어요? 그리고 불멸의 행복을 얻은 다음의 삶은 모든 생명과 공존하는, 함께 조화롭게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실천하는 거죠.
무아가 되고 본성을 회복함도 그것 때문이죠.“
아침 7시에 시작된 인터뷰가 어느덧 12시를 가까이 하고 있었다.
출가 전후의 이야기도 참 감동적인데 다 옮기지 못함이 아쉽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그림을 그리면서 살 것인가 구상을 해야겠지만, 자기가 현재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삶의 매순간에 분명히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었다.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서 말씀해주신 스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셨다.
“매사에 최고의 정성을 다해라...
그리고 염불하라.“
아! 그리고 중간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몸 바쳐서 기도해보라. 분명히 업장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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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지만 흔들고, 오늘도 그냥 서 있읍니다. 아미타불 _()_+
회장님! 우리가 할 일은 끊임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일입니다. 그래야 밤도 털고 감도 따지요. 그러나 정성껏 부처님 생각과 함께. 감사드립니다.아미타불!_()_
그 말씀에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가지나 흔들어 본적 있는지 ... 나무 아미타불 _()_
나무관세음보살()
항상, 초발심으로 돌아가게 하여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나무삼신일불 아미타불 _()_
수고많으십니다. 통도사엔 덕해님도 오지요? 나무아미타불!_()_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 있는것이아니다...달을보아라... 구절초부처님의 법문과.. 승진행보살님의 아름다운 등불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달을 보아라..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지심귀명례 아미타불!_()_
무심을 증득하는 일...^^*...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깨어있는 삶을 위하여~~~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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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