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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自然環境)【지세(地勢), 기후(氣候), 토산물 등】과 조선(朝鮮)<2 부>
○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옛 기록(記錄)을 설명(說明)하는데, 우리나라만큼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要因)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일제(日帝)에 의한 식민(植民)통치(統治)를 받으면서, 그들이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들을 지배(支配)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에 길들여진,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 각(各) 개인(個人)들의 뇌(腦) 세포(細布)에 각인(刻印)된 지식(知識)때문일 것이다.
더하여 일제(日帝)의 통치(統治)를 벗어나, 66년이 지났는데도, 정부(政府)는 정부(政府)대로,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는 그들대로, 얄팍한 상술(商術) 때문에, 많은 조선사(朝鮮史) 부분을 “반도(半島) 땅”에 고착(固着)시키는 작업(作業)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가신(家臣)으로 “이두란(李 豆 蘭)”이란 인물이 있다. 여진(女眞)족 출신(出身)으로, 천호(千戶)였던 “이두란 첩목아(李 豆 蘭 帖木兒)”를 말하는데, 『청해 백(1331-1442)으로 봉해진 분인데, 이 분은 “고 룬 투 란 티무르(초명)”, 퉁 두 란, 이두란, 이지란』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분이 “청해 백(靑海 伯)”이다.
『청해(靑海)이씨(李氏) 뿌리』라는 종친회 자료에 따르면, 이 분은 『남송(南宋)의 악비【岳飛 : 본인 주(注) : 군벌(軍閥)출신(出身)으로 금(金)과의 전쟁(戰爭)에서 주전파(主戰 派)로 알려졌으며, 주화파 진회(秦檜)로 인해 처형(處刑)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금(金)에 의해 남송은 멸망(滅亡)되었다. 】장군의 다섯째 아들 “정(霆)”의 6 세손으로, 원(元)나라에서 정서대장군(征西 大將軍)을 지낸 아원(雅 遠)의 아들이며, 천호를 승습(承襲)하고, 여진족(女眞族)의 풍습에 따라 어머니의 성(姓)을 따서 “동”으로 성을 바꾼 후,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20년 부하(部下)를 이끌고 고려(高麗)에 귀화(歸化) 북청에 거주하면서 이씨(李氏) 성(姓)과 청해(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사(下賜)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분이 “청해 백(靑海伯)”으로 봉(封)받고, 청해(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사(下賜)받았다면, 분명 “청해(靑海)”는 반도(半島) 땅 어디엔 가에 있어야 정상(正常)이다. 바다의 이름이었던, 지명(地名)이 되었던 “청해(靑海)”라는 곳이 있었으니, 그 지명(地名)에 따라 본관(本貫)을 하사(下賜)했을 것이 아닌가? 이 분의 세거(世居)지는 북청(北靑)이라 하였으니, “북청(北靑)백(伯)”이라 하였다면, 또 이해(理解)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청해(靑海)”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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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강역 고 (盛 京 疆 域 考) / 서(序)
〔2〕《並榆關而東盡鴨綠江岸與朝鮮為鄰南至於海北帶蒙古諸邊至兩遼河匯流處是為盛京我國家肇基地也輻員數千里 : 유관(楡關)의 동(東)쪽이 끝난 압록강(鴨綠江)안(岸)과 조선(朝鮮)이 이웃하고,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띠를 누른 듯 몽고의 여러 변(邊)에 이르는데, 아울러 양(兩) 요하(遼 河)의 물이 돌아 흘러 모여(匯), 흐르는 곳이 성경(盛 京)이며, 아(我) 국가(淸)의 기초를 다진 땅이다. 땅의 넓이가 수 천리이다. 》 라 하였는데,
● 『성경(盛京)의 땅은 “유관(楡關)”의 동쪽에 있다.』는 설명이며, 『북쪽은 “몽고 여러 변경지방과 다다르며, 요하(遼河)는 본시 하나의 줄기로 흐르다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성경(盛京)주위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진 흐르는 곳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 匯 流 : 물이 돌아 흘러 가다가 모여 다시 흐르는 모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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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楡關)의 동(東)쪽 : 현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 유관(楡關)은 산해 관(山海關)이라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유관【渝 關 : 渝는 ‘투’로도 읽는다.】이라 하며, 또 림 려 관(臨 閭 關)이라고도 한다.』【유(楡)는 유(渝)이다.】
※ 유관(楡關)에 대한 것은 장문(長文)일 수밖에 없으므로, 3부에 설명키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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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오대사(舊五代史) 137 글란(契丹) 편의 첫 머리에,
《契 丹 者, 古 匈 奴 之 種 也. 代 居 遼 澤 之 中, 潢 水 南 岸, 南 距 榆 關 一 千 一 百 里, 榆 關 南 距 幽 州 七 百 里, 本 鮮 卑 之 舊 地 也. : 글란(契丹)은, 옛 흉노(匈奴)종족이다. 대대로 요 택(遼澤)의 가운데, 황수(潢水)의 남안(南岸)에서 살았는데, 남쪽으로 유관(楡關)이 1,100 리 떨어져 있으며, 유관(楡關)의 남쪽으로 유주(幽州)가 700 리 떨어져 있다. 》
위의 설명(說明)을 현대(現代)역사해설(歷史解說)로 풀이하면, 『요 택(遼澤)과 황수(潢水)남안(南岸)에서 남(南)쪽 방향(方向)으로 당시 유관【楡關 : 현 산해 관(山海關)】까지 1,100 리 떨어져 있었으며, 이 유관(楡關)에서 다시 남(南)쪽으로 700 리 떨어진 현 산동 성(山東省) 앞 바다 속 용궁(龍宮)속에 유주(幽州)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人間)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살 수 없다.”는 점을 감안(勘案)하면, 현재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지형지리(地形地理)로 살펴볼 때, 현 하북성(河北省)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대(現代)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을 지세(地勢), 방향(方向)등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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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으로는 띠를 누른 듯 몽고의 여러 변(邊)에 이른다.』는 말을 보자.
성경(盛京)의 북(北)쪽 지방은, 흑룡강 성(黑龍江省)으로 이곳은 몽고(蒙古) 땅이 아니다. 성경(盛京)으로부터 수천(數千)리 북쪽지방은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 성(黑龍江省)지방으로 몽고(蒙古)의 여러 변(邊)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방이다. 곧 길림성(吉林省)을 지나야 몽고(蒙古) 땅에 이른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북쪽으로는 띠를 누른 듯 몽고의 여러 변(邊)에 이른다.』는 지형지리(地形地理)는 이곳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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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강역 고 (盛 京 疆 域 考)
〔3〕秦 / 遼 東 郡 《通鑑秦政三十二年遣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伐斥逐匈奴收河南地築長城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又史記朝鮮列傳秦滅燕以朝鮮屬遼東外徼 : 통감(通鑑), 진(秦) 정【政 : 시황제(始皇帝)를 말한다.】 32년, 파견된 장군 몽 념(蒙恬)과 전쟁을 위해 일으킨 병사 30만이 북벌(北伐)하여, 흉노(匈奴)를 쫓아내고 하남(河南)땅을 거들어 들이고, 림 조(臨洮)에서 일어나 요동(遼東)에 까지 ‘동서(東西) 또는 남북’【연무(延袤)】으로 만(萬)여리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또 사기(史記)조선(朝鮮)열전(列傳)에, 진(秦)이 연(燕)을 멸했는데, 요동(遼東) 외요(外徼)는 조선에 속하였다.》
〔3-1〕열하일기(熱河日記) / 구 요 동 기(舊 遼 東 記)
《본문 : 요동(遼東)의 구성(舊 城)은 한(漢)의 양평(襄 平)ㆍ요양(遼 陽) 두 현(縣) 지역에 있었다. “진(秦)이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뒤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편입되었다가, 한 말년에 “공손도(公 孫 度)”가 웅거한바 되었으며, 수(隋)ㆍ당(唐) 때에는 고구려(高句驪)에 속하였고, 거란(契丹)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금(金)은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元)은 행성【行 省 원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명(明)은 정 요 위(定 遼 衛)를 두었더니, 지금은 요 양 주(遼 陽 州)로 승격되었다.》
● 위의 두 글【 3 과 3-1】은 모두 “요동(遼東)지방(地方)”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글에서 말하는 요동(遼東)지방(地方)이 어디인가를 “지형지리(地形地理) 및 방향, 특이지형(特異地形)”등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 현대(現代)의 역사해설(歷史解說)로 보면, 요동(遼東)지방은 요 녕 성(遼寧省)에 있는 요하(遼河)의 동쪽지방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사기극(詐欺劇)이란 것을 지형지리(地形地理)와 특이지형(特異地形)등으로 고증(考證)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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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資治通鑑) 23 한기(漢紀) 15 / 孝 昭 皇帝 본문(本文) 주석(註釋)
【도요장군(度遼將軍) : 度遼將軍, 蓋 使 之 度 遼 水 以 伐 烏 桓. : 도요장군(度遼將軍)이란, 요수(遼水)를 건너 오환(烏桓)을 치러가는 파견사이다.】
※ 이때의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요수(遼水)를 건넜으며, 이들은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으로 진격(進擊), 출정(出征)하는데, 이들의 군영(軍營)의 이름이 “도요 영(度遼營)”이며, “도요 영(度遼營)”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하(河)의 북안(北岸) 오원(五原)의 서북(西北)지대였다. 당시(當時)의 하(河)의 상류(上流)를 “요수(遼水)”라 했다는 증거(證據)이다.
이러한 기록은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신구오대 사(新舊 五代史) 및 자치통감(資治通鑑)등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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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 典 卷 第 195 / 邊 防 11 . 匈 奴 下
《 單 于 驩 喜, 上 書 願 保 塞 上 谷 以 西 至 燉 煌, (中略). 臣 聞 北 邊 塞 至 遼 東, 外 有 陰 山, 東 西 千 餘 里, 草 木 茂 盛, 多 禽 獸, 本 冒 頓 單 于 依 阻 其 中 : 흉노가 한(漢)에게 자청해서 상곡(上谷)으로부터 돈 황(燉煌)에 이르는 새(塞)를 보존하겠다고 하였다. (중략). 신(臣)이 견문키로, 『북변(北邊)의 성채(塞)로부터 요동(遼東)까지, 밖에 음산이 있는데, 동서(東西) 천 여리이며』, 이곳은 초목(草木)이 무성하며, 날 짐승들이 많다. 본래 모돈(冒頓)선우는 그 가운데 험한 곳에 의지하였다.》
이곳 지방은 바로 『하남(河南)과 하 북(河北)』지방이다. 하(河)의 남안(南岸)지대와 북안(北岸)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 “요동(遼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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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史記) 열전 몽 념(蒙 恬)편 ;
《 秦 已 并 天 下 , 乃 使 蒙 恬 將 三 十 萬 眾 北 逐 戎 狄 , 收 河 南. 築 長 城 , 因 地 形 , 用 制 險 塞 ,起 臨 洮, 至 遼 東. 始 皇 築 長 城 東 至 遼 水 , 西 南 至 海 ( 之 上 ),延 袤 萬 餘 里 。 於 是 渡 河, 據 陽 山, 逶 蛇 而 北 。: 이미 진(秦)의 천하가 되었다. 이에 파견사 “몽 념(蒙 恬)”장군은 30만 무리로 북쪽의 “융적”을 뒤 쫒아 물리치고, 하남의 땅을 거둬들였다. 장성(長城)을 축조하는데 지형을 이용하여 수비하기에 용이하도록 험한 곳에 성채를 만들어 “림 조(臨洮)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렀는데, 연맥【동서남북 꾸불꾸불하게】 만(萬)여리 이다. 이때에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뱀처럼 꾸불꾸불 북(北)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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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 남경(南京)도 란 주(灤 州) 편
《 灤 州, 負 山 帶 河, 為 朔 漢 形 勝 之 地。有 扶 蘇 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 統 縣 三 : 란 주(灤 州), 산을 등지고 하(河)가 띠를 두른듯하며, 한(漢)나라 북방의 지세가 뛰어난 땅이다. 아주 감미로운 부소(扶蘇)천이 있으며, 진(秦) 태자 부소(扶蘇)가 북쪽 장성(長城)을 쌓는데 이곳에서 상주하였다. ; 림 유 산(臨 楡 山)은, 날카로운 봉우리가 불쑥 솟았는데, 높이가 천(千)여 인【仞 : 본인 주(注) / 1 인(仞)은 8 척(尺)이다. 】이며, 아래에는 림 유 하(臨 楡 河)가 있다. 3 개현이 있다.》
한(漢)은 장안(長安)에 황도(皇都)였다고 하므로 그 북쪽의 형승지지는 중원(中原)의 북방지대일 수밖에 없으며,
진시황제(秦始皇帝)시 쌓은 장성(長城)은 하(河)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 감독관(監督官)이었던 “부소(扶蘇)”가 상주(常駐)했던 곳에 샘물인 “부소(扶蘇)천”이 있을 수 있으며,
이곳에 수천(數千)미터를 헤아리는 준봉(峻峰)이 솟아 있는 산이 어디에 있으며, 그 아래를 흐르는 하천(河川)인 “림 유 하(臨 渝 河)”가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꼭꼭 숨어라”는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잘못 선택해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 열전 몽 념(蒙 恬) 편 ;《 秦 已 并 天 下 , 乃 使 蒙 恬 將 三 十 萬 眾 北 逐 戎 狄 , 收 河 南. 築 長 城 , 因 地 形 , 用 制 險 塞 ,起 臨 洮, 至 遼 東. 始 皇 築 長 城 東 至 遼 水 , 西 南 至 海 ( 之 上 ),延 袤 萬 餘 里 。 於 是 渡 河, 據 陽 山, 逶 蛇 而 北 。: 이미 진(秦)의 천하가 되었다. 이에 파견사 “몽 념(蒙 恬)”장군은 30만 무리로 북쪽의 “융적”을 뒤 쫒아 물리치고, 하남(河南)의 땅을 거둬들였다. 장성(長城)을 쌓는데, 지형(地形)을 이용하여, 수비(守備)하기에 용이(容易)하도록 험한 곳에 성채를 만들었는데, “림 조(臨洮)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시황(始皇)이 쌓은 장성(長城)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에 이르렀는데, 서남(西南)으로 바다(海?)에 닿았으며, 연맥【본인 주(注) : 동서남북(東西南北) 꾸불꾸불하게】 만(萬)여리이다. 이때에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뱀처럼 꾸불꾸불 북(北)쪽으로 이어졌다.》
위의 본문은 사기(史記) ‘몽념(蒙恬)’열전속의 내용이다. 위에서 “하남(河南)의 땅”을 거두고 이곳에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말이며, “림조(臨洮)로부터 요동(遼東)까지”이며, 사기(史記) 이사(李斯) 열전에는 『림 조(臨洮)는 요동(遼東)에 속했다 / 起 臨 洮 屬 之 遼 東』고 하였다. 『西 南 之 海』에서 “해(海)”의 용도(用度)는 당시(當時)의 뜻이 중요(重要)한 것이지 현대(現代)의 용도(用度)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장성(長城)은 요동(遼東)까지 이르렀는데,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依支)하여, 그 북쪽으로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졌다.』고 하였다. 『하남(河南)이란 하(河)의 남안(南岸)지대를 말하며, 하(河)를 건넜다는 말은 하(河)의 북쪽을 말하는 것이며, 양산(陽山)은 “하북(河北) 땅”에 있었으며, 이 양산(陽山)의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이용(利用)하여, 성(城)을 쌓았는데, 그 산(山)의 북(北)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이 『현 하 북 성(河北省)과 요 녕 성(遼寧省)』지방이라면, 100년 되지 않은 시점에 천지개벽【天地開闢 :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열림】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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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灤 州, 永 安 軍, 中, 刺 史. 本 古 黃 洛 城. 灤 河 環 繞, 在 盧 龍 山 南. 齊 桓 公 伐 山 戎, 見 山 神 俞 鬼, 即 此. 秦 為 右 北 平. 漢 為 石 城 縣, 後 名 海 陽 縣, 漢 水 為 公 孫 度 所 有. : : 란 주(灤 州), 영안 군(軍), 중, 자사. 본시 옛 황락(黃洛)성【본인 주(注) : 본래 옛 고죽국(孤竹國)의 왕도(王都)였다.】이다. 란 하(灤河)가 에워싸고 있으며, 노 룡(盧龍)산 남쪽에 있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산융(山戎)을 칠 때, 산신(山神) ‘유귀(兪鬼)’를 보았는데, 곧 그곳이다. 진(秦)의 우북 평(右北平)이다. 한(漢)의 석성(石城)인데, 후에 이름이 해양(海陽)현이며, 한수(漢水)를 공손도(公孫度)가 소유(所有)했었다. 》
㉠ 황락 성(黃洛城) : 고죽국(孤竹國)의 서울이었다. 『고죽국은 북해(北海)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대륙(大陸)의 동북(東北)지방이 북해(北海)라 한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자랑스럽고, 존경(尊敬)스러운 학자(學者)님들이다.』<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 우 북 평(右北平) :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북 평(北平)”이란 뜻의 지명(地名)이다. 진(秦)나라의 황성(皇城)은 함양(咸陽)이었다고 한다. 함양(咸陽)에서, 동북(東北)지방의 하 북 성(河北省)지방이 『서쪽의 북 평(北平)지대』라고 한다면, 진시황제(秦始皇帝)는 『가공(架空)의 인물(人物)이다.』란 말과 같다.
㉢ 해양(海陽)현 : 『海』가 어떤 의미(意味)로 사용(使用)되었는가? 지금까지도 설왕설래(說往說來)다. 역사서(歷史書)에서는 “그때 그 당시”가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이다. 지리지에서는 『하주【夏州 : 현 영하 성(寧夏省)중북부의 옛 지명(地名)이다.】해양(海陽)현』이라고 하였고, 『해(海)』는 큰 하천을 대신하는 이름이기도 했으므로, 큰 하천(河川)의 북쪽지방 지명(地名)으로 해양(海陽)현이 될 수 있다.
㉣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 본시(本是) 지명(地名)의 위치(位置)를 보면,『력(酈)』을 홍자옥편(弘字玉篇)에서 찾아보면,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의 땅이름』이라고 하였다. 곧 자치통감(資治通鑑) 시황제(始皇帝) 본기(本紀)편의 주석(註釋)을 보면, 『력 주(酈 州)는 북지군(北地郡)에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본래의 “노(魯)”나라는 산동 성(山東省)지방에 없었다는 말이며, 곧 “제(齊)”나라 역시 현 산동 성(山東省) 지방에 없었다는 말과 같다.
㉤ 공손도(公孫度)가 한수(漢水)를 소유(所有)하였다. : <1부>편 참조 : 공손도(公孫度 ? ~ 204년)는 후한(後漢) 말의 인물로,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양평 현(襄平 縣) 사람이다. 그의 부친 공손연(公孫 延)은 관리의 추적(追跡)을 피해서 “현토군(玄菟郡)”으로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았다.
중원(中原) 지역이 혼란(混亂)해지자 왕을 자처하며 독립 세력을 구축하였다. 부여(夫餘) 왕 ‘위 구태(尉 仇台)’에게 종친(宗親)의 딸을 시집보내기도 하였는데, 서기 204년 공손도(公孫度)가 죽자, 장남 공손강(公孫康), 공손 공(公孫 恭), 공손강(公孫康)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에 이르기까지 4대를 전하였으나, 위 명제 경초 2년(서기 238년)에 사마의(司馬懿)에게 토벌될 때까지 50여 년간 요동(遼東)에서 군림(君臨)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수서(隋書)를 인용(引用),《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强國初以百家濟海因號為百濟 :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 여식(女息)을 아내로 주어, 점점 크게 일어나 성하였는데, 강국(强國) 초, 백가(百家)제해(濟海)로 인하여, 나라이름을 “백제(百濟)”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삼국지(三國志)를 인용(引用), 《漢末公孫度雄長海東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强度以夫餘介其間妻以宗女 : 한(漢)말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서 패권(覇權)을 장악(掌握)하여, 부여(夫餘) 왕(王) “위 구태”는 다시 요동(遼東)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구려(句麗)와 선비(鮮卑)족이 강성(强盛)하매, 부여(夫餘)가 이들 두 나라 중간(中間)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여 종실(宗室)의 딸을 위 구태(尉仇台)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공손도(公孫度)가 요동(遼東)태수(太守)로 있으면서, 이곳에 있던 “한수(漢水)”유역을 차지하고 강성(强盛)해 졌다는 말은, 요동요서(遼東遼西)를 가르던 “요수(遼水)”가 곧 “한수(漢水)”였다는 말이며, 더하여 “요수(遼水)는 곧 하(河)를 말한다.”는 것을 대륙(大陸)의 역사서(歷史書)가 고증(考證)하고, 증거(證據)해 주고 있다. 지형지리(地形地理)적으로 볼 때 아주 합당한 이야기다.
백제(百濟)왕이 “공손도(公孫度)”의 여식(女息)을 맞아, 강성해졌다는 말은 곧 공손도(公孫度)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으로 비약(飛躍)해 볼 수 있으며,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된 『백제(百濟)는 요서(遼西)의 “진평(晉平)이군(二郡)을 경략(經略)했다.』는 것을 이해(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요수(遼水)는 곧 한수(漢水)이며, 하(河)의 상류(上流)측 이름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은 당시(當時)의 경제적(經濟的) 기반인, 축목(畜牧)과 농업(農業)이 성(盛)했으며, 이곳은 특히 사막(沙漠)과 농업【축목(畜牧)과 농사(農事)】지역을 가르는 하천(河川)이었기 때문에 물물교역(物物交易)이 또한 성했던 곳이며, 말(馬)의 생산지로 유명(有名)했던 곳이다. 당시(當時)의 경제적(經濟的) 기반(基盤)을 두루 갖춘 이곳을 무대(舞臺)로 “공손도(公孫度)”는 강해졌으며, 그래서 후세(後世)의 사가(史家)들은 “해동(海東)의 패자(覇者)”라는 말을 쓴 것이다.
해동(海東)이란 사해(四海)의 동(東)쪽이란 말이지, 황해(黃海)건너 반도(半島)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중국(中國)이란 특별(特別)히 선택(選擇)된 곳은 “사해(四海)의 동쪽 중심(中心)지를 칭하는 말이며, 곧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가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적 현(赤縣)신주(神州)】』
주(周)의 기내(畿內)천리(千里)지방, 한(漢)의 경조(京兆)지방, 당(唐)의 관내도(경기도) 지방이 곧 “중국(中國)”이며, 조선사(朝鮮史)로 보면, 한성부(漢城府) 봉경(封境)을 말하는 것이다. 【東 至 襄 陽 五 百 四 十 里, 西 至 豐 川 六 百 里, 南 至 海 珍 九 百 八 十 里, 北 至 閭 延 一 千 四 百 七 十 里, 東 北 至 慶 源 二 千 一 百 九 十 里, 東 南 至 東 萊 八 百 七 十 里, 西 南 至 泰 安 三 百 九 十 里, 西 北 至 義 州 一 千 一 百 四 十 里】
●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을 찾는데, 각종(各種) 분야(分野)를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중요(重要)한 것은 역사서(歷史書)를 기록(記錄)할 그때의 사회적(社會的) 틀이 무엇이었을까를 우선(于先)해야 한다. 수천(數千)년, 또는 천(千)여년 전의 기록(記錄)을 보면서, 21세기 현재(現在)상식(常識)으로 이해(理解)하려고 하는 답답함은, 정말 답답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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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연도기행 (燕 途 紀 行) 상(上) 【<인조(仁祖)대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 “이 요”의 연행(燕行)기록(記錄)】
《본문 :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淸)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동(遼東) 산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 8월에 소현세자와 금상은 다시 청주(淸 主)를 좇아서, 다시 연산(燕 山)으로 향했고, 나는 쓸쓸하게 본국(本國)으로 돌아왔다. 》고 한다.
요동(遼東)에 심양(瀋陽)이 있었으며, 성경(盛京)이다. 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는 바로 이곳 “심양(瀋陽)”지방에 대한 지리서(地理書)라고 보면 된다.
위의 글은 청(淸)나라를 4번씩이 다녀온 왕자(王子)가 직적 쓴 기록물이며, 이곳에서 “청(淸)”나라의 환경(環境)에 대해 말하기를, 『청(淸)나라 사막으로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심양(瀋陽)”주위가 사막지대(沙漠地帶)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요수(遼水)를 건너면 “대막(大漠)지대가 펼쳐진다.”라는 뜻이다.
○ 薊 山 紀 程 제1권. 출성(出城) ○ 계해 년(1803, 순조 3) 11월[1일-22일] 12일(계 묘) 맑음. 의주(義州) 50리를 가서 소 관참(所 串 站)에서 점심을 먹고 또 30 리를 가서 龍 灣 館에 묵었다.
전 문 영(箭 門 營) ; 만부(灣 府)에 닿기 전 10 리 지점에서 전문(箭 門)에 올라가 서쪽을 바라보니, 압록강 밖의 산세(山勢)가 유달리 웅장하고 쓸쓸한 기운이 호흡에까지 통할 정도다. 산 이름은 금석(金石)이었다.
《미계의 건널목을 지나서 : 渡 過 尾 溪 口 / 전문 마루에 올라가니 : 行 上 箭 門 顚 / 조선 나라 땅은 다 끝나고 : 地 盡 朝 鮮 國 / 대막의 하늘 산이 웅장하다 : 山 雄 大 漠 天 / 고향 소식 꿈속 같은데 : 鄕 音 如 夢 裡 / 중략 / 앞길은 또 몇 천 리 인고 : 程 道 又 幾 千 》하였다.
● 위 글 역시 같은 내용이다. 『압록강(鴨綠江)은 화이(華夷)를 구분하는 경계선(境界線)이고, 산에 올라 멀리 서쪽을 바라보니, 대 사막(沙漠)의 산세(山勢)가 웅장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압록강(鴨綠江)을 나서면, 그 서쪽으로 대막(大漠)지대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좀 더 전진(前進)하면 요동(遼東)요서(遼西)를 가르는 “요수(遼水)”에 닿고, 이 “요수(遼水)”를 건너면 요서(遼西) 땅이며, 본격적(本格的)인 대 사막(沙漠)지대가 펼쳐져, 이름 하기를, 『노 룡(盧龍) 사막(沙漠) 험 난(險難)하기로 유명했나니!』라는 시(詩) 구절(句節)이 절로 표현(表現)되던 곳이다. <3부로 계속>
2012년 09월 0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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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손도는 공손탁으로 정정해야 할듯요^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공손도=공손탁>이라고도 합니다. 같은 인물입니다. 건강하세요.
<청해>의 의문점을 이야기 하기 위해 소개한 것인데, 사실 족보에서 말하는 것들은 어떤 집안의 것이든지 부풀려 있는 것입니다. 또 중간의 대 수가 안맞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현 한국인의 집안 족보란 것이 대부분 근세기에 만들어진 것즐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뭐 참고할 뿐이지요. 제가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대륙의 서쪽, 서북쪽지방은 조선의 변경지방"이란 것입니다. 악비와 진회 두 인물은 후대에 사가들로 인해 정반대의 길을 걷지만, 적과의 싸움에서 전쟁을 지지하는 편과 국세의 약함을 들어 전쟁을 반대하는 파로 나누어지는 것은 작금의 국제정세와도 같습니다. 판단키 어려운 일이지요.
아마도 후대의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과거의 인물들을 이용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남송 같은 경우는 결국 금에 의해 나라자체가 없어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대륙의 땅, 공백지를 남송이란 이름으로 채워 넣은 사가들의 붓속에서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약 실제 존재했다면 고려의 제후국정도의 조그마한 왕국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