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고사리를 십 년 넘게 꺾어 준 할머니는 이제 고사리를 못 꺾겠단다. 어제 일꾼 세 사람을 대서 고사리를 꺾었다. 다리 아프다는 할머니에게 억지를 썼다. 다리가 부실해도 손놀림이 빠르고 일을 야무지게 하는 어른이다. 일꾼이 없어 죽겠다는 말에 오셨다. 다음부터는 부르지 말란다. 다리가 아파 도저히 못하겠단다. 나 역시 다리 아픈 사람이라 그 심정 누구보다 잘 안다. 고맙고 미안했다. 나도 이틀 동안 나부댔더니 약을 먹어도 효과가 별로 없는데 할머니는 오죽 하실까.
농부에게 비요일은 쉬는 날이다. 고사리 작업 끝냈으니 홀가분하게 쉬었다. 남편이 찜질방 가잔다. 남편도 많이 고단한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불가마 찜질방이 생겼다. 시설이 엄청나다. 주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엄청난 투자를 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목욕탕은 사람이 제법 붐비지만 찜질방은 한산하다. 맥반석, 소금, 고온 저온 황토방, 휴식처 등, 시설은 나무랄 데 없지만 본전이나 뽑을 수 있을까. 관광업소랑 계약해서 단체 손님을 왕창 모시면 그나마 운영이 될지 모르겠다.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닌데 걱정스러운 마음이 된다. 일단 비싼 요금 내고 들어왔으니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땀 욕을 했다.
물과 나는 사이가 좋다. 물에 들어가 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물에서 놀면 아픈 곳도 없다. 편안하고 좋다. 어려서 마당이 바다라는 상상을 했었다. 푸른 물이 출렁거리는 마당에서 수영을 하며 노는 꿈을 꾸곤 했다. 축담에 서서 마당으로 뛰어내리다가 다리를 다쳐 어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었다. 목욕탕에 가도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다니며 놀다 나오고, 수영장에 가면 내 세상이다. 항상 어린 내가 생각난다. 몸을 자유자재로 풀어놓고 물 위에 누워 둥둥 떠 있으면 천창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예쁠 때가 많다. 비오는 날은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침대 사용을 하지 않지만 물 위에 누워 있으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
찜질방을 나와 교동 짬뽕을 먹으러 갔다. 그 집 교동짬뽕은 이름만 빌렸지 맛은 별로다. 탄내가 나긴 했다. 교동 짬뽕의 특색은 탄내라고 하던가. 지난여름 강릉에서 먹은 교동짬뽕 맛이 생각난다. 진주에서 먹은 교동짬뽕도 맛이 있었다. 손님이 미어터지는 바람에 오래 기다렸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느꼈는데 오늘 먹은 교동짬뽕은 별로였다. 사람 입은 간사해서 음식 맛을 기억한다. 맛 집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소문난 음식점은 손님이 줄을 잇는다. 그만큼 외식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리라.
집에 돌아왔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파랗게 살아난 잔디가 맑고 깨끗하게 다가온다. 며칠 사이 마른 잔디는 속으로 숨어 버렸나보다. 푸른 잔디밭이 묘하게 평화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홍 연등을 단 것 같은 모과 꽃도 한층 돋보인다. 신록이 짙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곳, 자연 속의 삶은 어떤 노여움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다 받아들이고 다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본다.
오랜만에 난로에 불을 피우고 책을 본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도서관에 간 지 오래되어 새로운 읽을거리가 없어 영적인 가르침을 담은 책들을 재탕 삼 탕 한다. 아잔 브라흐마의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같은 책이나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은 읽고 또 읽어도 늘 새롭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방황의 어느 순간 평화를 느꼈다고 한다. 기적처럼 모든 것이 너무 깨끗하고 평화로워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노숙자처럼 거리를 배외했었다고 한다. 책을 보다 푸르른 창밖을 본다. 연둣빛 느티나무 잎도, 분홍빛 모과 꽃도, 새소리도, 비 소리도, 고라니 짝 찾는 소리도 다 아름답다.
비가 그치면 고사리도 따라서 쑥쑥 자랄 것이고, 일꾼을 다시 맞추어야 할 일이 남았지만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하면 된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면 평화가 온다고 한다. 생각조차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진정한 평화가 오겠지만 나는 아직 생각 자체마저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다. 단지 남의 눈에 보이는 평화가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고마워할 따름이다.
동네 할머니의 건강을 빈다. 그동안 우리 집 고사리 꺾어주시느라 참 고생하셨는데 올해는 고사리 안 꺾어주셔도 되니까 건강하게 지내시라고 인사드릴 참이다. 입담이 좋아서 고사리 밭에 웃음꽃이 피게 하던 할머니, 젊은 시절 할아버지의 몽둥이를 피해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았다던 할머니, 할머니의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팔십 인생을 다시 들을 일은 쉽지 않겠지만 건강하시길 빈다.
첫댓글 아이고... 마지막 문단을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할아버지 몽둥이 피해 동네를 몇 바퀴씩 도시다니요. 저도 건강하시기를 빌어 봅니다. 토요일 부슬비 내릴 때 늦둥이랑 촉촉한 흙바닥을 밟았어요. 물 고인 곳, 물 튈까봐 슬금슬금 피해다니는 꼴이라니.. 아이고 나도 도시소생이라.ㅎㅎㅎ
일꾼이 없어 고사리 농사도 접어야겠어요. 단감 농사도 일꾼 없이는 해 낼 수 없는데. 어제는 귀농한 이웃이 도와주는 바람에 잘 치렀어요^^. 초보 일꾼 두 사람은 더는 고사리 못 꺾겠다고 해요. ㅎㅎ
@박래녀 헉... 고사리 꺾는 일이 장난이 아닌가 봅니다.ㅠ
@새옹지마 엎드려서 하는 일이라 허리와 다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어요.ㅋ
할머니들은 힘들다 하면서도 약 먹어가며 해요.
저도 할매라 약 안 먹으면 고사리 꺾기도 일꾼들 밥도 못해주겠어요.ㅋ
늙는다는 것이 슬픈 나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