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수인선(水仁線)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蘇來鐵橋)
 ▲ 갯벌에 다리를 담군 새 수인선 다리, 그 너머로 옛
소래철교가 보인다. |
월곶에서 소래포구로 넘어가려면 소래의 오랜 명물인 소래철교를 건너야 된다. (수인선 전철을
이용해서 건너는 방법도 있음) 이 철교는 옛 수인선(수원~송도)의 몇 남지 않은 흔적이자 수인
선 협궤(狹軌)열차가 기적소리를 날리며 바퀴자국을 남겼던 다리로 인천 남동구와 시흥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다.
수인선은 1937년 여름에 개통되었는데, 건설비 절약을 위해 일반 궤도(1.435mm)의 절반 정도인
협궤선(0.765m)을 깔았다. 이 철로는 왜정(倭政)이 소래와 달월, 안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
과 1972년에 없어진 옛 수려선(수원~여주)을 통해 이천과 여주의 쌀을 인천으로 수송하려는 목
적으로 신설되었다. (수려선도 협궤선임)
처음에는 왜인이 세운 경동철도가 운영을 했으나 해방 이후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인천 송도(
松島)와 논현, 소래, 달월, 군자, 원곡, 사리, 어천, 수원(水原)을 이어주면서 수인선 주변 주
민들의 소중한 발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소금과 농산물, 수산물을 싸들고 인천과 수원으로 이
동하여 판매를 했는데, 송도역 앞에는 그들로 인해 조촐하게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허나 승객
감소와 협궤열차 유지의 어려움으로 운행 횟수가 야금야금 줄어들었고, 1992년 '송
도~소래' 구간을 자르고 '소래~수원' 구간만 다니다가 1994년 9월 나머지 구간마저 절단을 내
면서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협궤열차와 협궤선은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억의 저편으로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된다.
이후 버려진 수인선을 광역전철로 다시 단장하면서 지루한 공사 끝에 2012년 6월에 '송도~오이
도' 구간이 개통되어 옛 수인선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인천역까지 연장되어 '인천~송도~
원인재~오이도' 구간을 운행하고 있음, 나머지 수원역~한대앞역 구간은 2018년 말 개통 예정> |

▲ 장도포대지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 댕구산(소래포구 서쪽이자 장도포대지 뒷산)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
수인선 열차가 신세를 졌던 소래철교는 1937년에 개통되었다. 철교의 길이는 126.5m, 폭 1.2m
로
수인선이 폐선되자 자연히 사람들의 통행 다리로 활용되었다. 소래포구와 1992년에 개발된
월곶을 바로 이어주는 다리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교에서 인도교(人道橋)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소래철교는 소래포구의 명물로 지금까지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인천과 시흥 경계에 자리한 탓에 말썽도 다소 있었다. 2010년 2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철교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는데, 이때 시흥시는 통행 안
전을
이유로 부실 것을 외쳤지만 소래철교로 단단히 재미를 본 인천시는 철교 보존을
외치면서
서로 갈등이 생겼다. 다행히 국토해양부가 다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철거를 면하게
되었고 철
교의 건강과 통행 안전을 위해 철교를 보수했다.
2011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인천 소래철교'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삼으려고 하자 이에
뿔
이 난 시흥시는 '소래철교'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시 쓸데없는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아직
까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래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를 하면 안됨)
또한 다리 보강공사가 끝나자 인천시에서 소래포구 축제에 맞춰 철교를 다시 개방했으나 시흥
시에서 소래 관광객의 월곶포구 불법주차와 쓰레기 무단투기로 월곶동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다
며 다리 남쪽에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인천에게는 이
철교가 소래포구를 두툼하게 수식해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시흥시에게는 월곶의
관광/외식 수
요를 소래로 빨아들이고 소래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인천의 얄미운 빨대로 보았던 것이다. |

▲ 소래철교를 건너다 |
소래철교는 비록 철교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이 땅의 철도 교량 가운데 가장 폭이 좁다. 그래서
2명이 지나가면 좌우가 꽉 찬다. 협궤열차가 바퀴를 굴렸던 선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철판
을 깔았다. 그 밑은 썰물 때는 검은 갯벌이, 밀물 때는 서해바다가 넝실거리며 고깃배가 들어
온다. 철교 좌우에는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안전을 배려했다.
이 철교가 소래의 명물이 되다보니 온갖 이상한 말이 생겨닜다. 소래포구를 찾은 연인들이 손
을 잡고 이 다리를 건너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서 다리를 건너면서 소원을 빌 때 포구
로 들어가는 배가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무슨 불상이나 신앙 대상물도 아닌 철
도가 지나갔던 철교일 뿐인데, 다리의 인기가 높다보니 그런 허무맹랑한 말까지
생겨나 철교를
좀 무안하게 만든다. |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갯벌과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
소래철교를 건너면 동쪽에 어선들이 정박한 소래포구와 재래어시장,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장
도포대지가 있다. (소래포구에는 재래어시장과 종합어시장 등 2개의 어시장이 있음)
소래포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이자 해안 어시장으로 인기가 자자하다. 섬을 제외
한 인천 본토의 거의 유일한 포구이자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한 재래 어항(漁港)으로 썰물 때
는 서해바다가 저멀리 줄행랑을 치면서 검은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 포구로써의 실감이 좀 떨
어지지만 밀물이 되면 포구 바로 앞까지 바다가 밀려와 제법 포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때
배들이 들어와 바다에서 건져온 것들을 풀어놓는다.
소래는 인천과 월곶을 이어주던 나룻터이자 포구로 주변에 경작지가 많아 제법 괜찮게 살던 어
촌이었다. 왜정 때 인근에 소래염전이 생기고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소금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북쪽 실향민들이 모여들어 정착을 했다. 포구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새우와
물고기를 잡아 젓갈을 만들었고, 수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인천, 수원 등을 오가며 새우젓을
팔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래는 한산했던 포구였다.
그러다가 1974년 인천내항이 준공되어 새우잡이를 하던 조그만 어선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천
항에서 가까운 소래로 배들이 몰려들면서 졸지에 새우파시로 부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인
천 근교의 대표적인 포구로 두각을 드러냈으며, 매년 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과 장꾼들이 몰려
와 인천의 소중한 관광 꿀단지가 되었다. 포구의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젓갈과 새우, 꽃게,
소
라 등이 있다.
비록 포구는 작지만 10톤 미만의 어선 20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어시장에는 300개 정도
의 점포와 식당, 선술집이 들어서 있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싱싱한 회와 생선찌개, 각종 어패류와 건어류, 생선튀김, 젓갈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생선을
취급하는 점포에서는 즉석에서 회를 쳐주는데, 어시장 남쪽 포구 쪽에 그런 집이 많다.
소래란 이름은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냇가에 숲이 많은 솔내에서 비
롯되었다는 설, 지형이 좁아서 생겼다는 설이 있으며, 660년에 신라와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군을 이끌고 온 소정방(蘇定方)이 산동 내주(來州)를 출발해 이곳에 상륙하여 머물렀다
고 해서 소래(蘇來)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답은 아니다. |

▲ 댕구산에서 바라본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래 지역은 소래포구와 어시장이 전부인 인천의 변두리 어촌이었다.
그러다가 개발의 칼춤이 포구 주변을 싹 뒤엎으면서 어시장과 포구, 말쑥하게 솟은 고층 아파
트와 온갖 빌딩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 되었다. |

▲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내부
우리는 어시장을 간단히 둘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장도포대지로 이동했다. |
첫댓글 오후 2시에 만나도 이런 답사와 글이 나오니,, 문화유적이 그득한 우리지역, 한국입니다../ 소래새우젓은 정말 늘 그곳이었죠,, 요즘은 새우젓넣은 음식이 맛있습니다. 어렸을때는 싫었는데.../ 19C말 개항기때 거부감을 느꼈던 보수파들이 이해됩니다..우리끼리 오손도손 살고 싶어도,,, 그놈의 호기심때문에 군사적이든, 상업적이든 개방이 강요되니 말입니다...ㅡㅡ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고 소래포구나 철교, 어시장, 댕구산, 소래역사관 등이 거의 한 곳에 있다보니 적은 시간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논현포대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