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우한 짜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근심과 염려로 가득하다. 뉴스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전염상황을 보도하는데 할애하다보니 바이러스는 불안의 확산이라는 공격목표를 이미 이룬 셈이다. 하루 종일 중계방송 하듯 추가되는 확진자 수를 발표하고, 감별사처럼 양성과 음성 판정을 내리고, 감염자의 동선과 이동경로를 추적하면서 계속 일상을 따라다닌다.
재난예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보의 소통이라지만, 한술 더 뜬 가짜뉴스까지 판을 치며 공포감은 증폭되고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는 불안과 위험의 전염병이지만, 악성가짜뉴스는 혐오와 배제의 바이러스로 몸집을 더욱 키우고 있다. 악성바이러스의 슈퍼전파자는 그동안 가짜뉴스에 무감각했던 우리 사회 자신이고, 매개자 역할을 한 단톡방의 숙주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은 혐오와 배제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현재 우한 시민은 물론 불특정 중국인 모두가 잠재적 보균자처럼 인식되고 있고, 몇몇 나라는 중국인 입국과 중국여행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시중에 마스크는 어느새 동이 나고, 손세정제 값은 널뛰기를 한다. 일회용 마스크로 바이러스를 예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불안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며칠 전 우리 사회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우한 교민들의 한국 입국과 머물 지역 선정에 따른 시시비비는 대표적이다. 졸지에 바이러스 난민이 되어 전세비행기에 실려 온 700여명의 한인들은 죄인의 심정이 되어 몸을 사렸다. 다행히 아산과 진천 주민들이 조금씩 양해하면서 귀추를 주목하며 숨죽여 온 우리 사회는 한 숨을 돌리게 되었지만, 이 역시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이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제 누구라도 자신의 배제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혐오의 대상은 화장장이나, 쓰레기 소각장, 장애인 학교와 사회복지시설, 교도소, 노숙자 거주 공간, 폐기물 처리장 등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배제 대상이 될 수 있고, 자칫하면 내 가족이라도 ‘내 뒷 마당으로 들일 수 없는’ 혐오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제와 혐오의 바이어스는 아주 오래도록 우리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으나, 예방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기감이 더 크다.
전염병의 역사는 뿌리 깊다.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발달로 이전처럼 전염병에 대한 확산은 크게 줄었다지만, 불과 100년 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인류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을 서둘러 매듭지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1,500만 명인데 비해 독감 희생자가 5천만 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오(戊午)년 독감으로 불렸는데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공포는 그치지 않고 있다. 최근에만 해도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그리고 2020년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우한폐렴)가 잇따른다. 우한에 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올해 겨울 미 대륙을 강타한 미국독감은 벌써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프랑스 서남부 지역 꼴마에는 16세기 초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가 있다. 이 작품은 신학자 몰트만이 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표지에 사용한 그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은 사나운 가시더미를 쓰고, 무쇠 못에 인정사정없이 박힌 모습이다. 그리고 몸에는 창 자국 외에도 작은 가시못들이 수 없이 박혀있어 전율을 자아낸다. 마치 고난의 장면을 가장 극적으로 연출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온 몸에 가득한 검은 반점이다. 복음서의 고증에 따르더라도 검은 반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뤼네발트는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며 번져나가 결국 삼분의 일 이상의 목숨을 빼앗아갔던 흑사병의 검은 반점을 그린 것이다. 그 지방 사람들 역시 흑사병의 희생자였다. 마치 예수님을 흑사병 환자처럼 그림으로써 인류의 질고를 대신 짊어진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지금 우한은 텅 빈 도시가 되었다. 인구 천만 명이 사는 초대형 도시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도시를 빠져나갔거나, 몸을 웅크린 채 집을 지키고 있다. 높은 아파트 사이로 이런 함성이 간혹 들린다고 한다.
“우한 짜요~”
“우한 짜요~”
“우한 짜요~”
중국어로 ‘짜요’(加油)는 ‘힘내라!’라는 뜻이다. 이 외침이 고층 아파트 사이를 휘돌며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창문을 향해 격려한다. 비록 고립되었지만, 아직 탈출하지 못했지만 다시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하늘을 향해 희망의 숨을 들이 마실 때가 올 것을 믿는 것이다.
배제와 혐오의 바이러스로 사람의 불안을 고칠 수 없다. 지금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기에 앞서 서로 격려함으로써 인류가 겪는 21세기 흑사병을 이겨내야 한다.
이젠하임 제단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