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 왼쪽부터) 김혁 공원, 김혁, 북로군정서 졸업식 |
김혁의 본명은 김학소로 1875년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구한말 법부 참서관을 지낸 아버지 김태식과 어머니 윤현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혁은 경주김씨 갈천공 김원립의 11대 손으로 집안은 대대로 지방의 양반가문이었다. 용인지방의 양반 집안에서 출생한
김혁은 향리에서 전통 한문수업을 받다가 나이가 좀 들어서는 용인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동전 맹보순의 문하에 들어갔다.
맹보순은 당시 한강 이남에서 명성이 높았던 대학자로서 구국계몽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는데 1908년 설립된 기호흥학회에서 활동했고 비밀결사 신민회 인사였던 이동녕 등과도 교유했다.
그는 1906년 용인향교에서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와 함께 명륜학교를 설립해 신구학문 교육에 힘썼으며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 만주 ‘성신태’ 상회 설립해 독립운동가 연락 거점 마련
그 후 그는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만주 안동현에서는 성신태라는 상회를 설립하고 겉으로는 장사를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나온 수익금으로는 은밀히 신흥무관학교의 재정을 후원하기도 했다. 또한 1913년 일제의 형사대가 만주 유하현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장도순, 김형선 등 다섯 사람을 암살 또는 체포하기 위해 남만주로 출발할 계획이니 신속히 피신하라는 긴급 연락을 보내기도 했다.
후에는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 용인 능골의 정몽주 사당인 충렬사를 다시 세우기도 했던
애국지사였다.
따라서 김혁은 이러한 스승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의 무관학교
입학도 스승의 권유에 따라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
||
■ 육군무관학교 1기생으로 문무를 겸한 최고 엘리트가 되다
향리에서 스승 맹보순으로부터 한학과
민족의식을 교육받았던 김혁은 1898년 6월 22일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육군무관학교는 지난 1896년(고종32년) 1월 육군무관학교
관제 공포에 따라 서울에 설치된 초급 무관양성학교였다.
그러나 정치적 소용돌이로 인해 1898년 4월3일 정식으로 개교해 2년제 학교로서 수업을 시작했다. 육군무관학교는 지금의 삼청동 언덕
빼기에 있었는데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부국강병의 시대적 요청과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조건 때문이었다. 김혁은 이
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육군무관학교에서 배운 군사학과 신학문은 김혁의 항일운동 노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무관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과목은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등의 군사학과 아울러 불어, 독일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의 등의 외국어학이 포함돼 있었다.
무관학교가 군사교육기관이기 때문에 군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외국어학이 중요시됐던 까닭은 무관학교에서 배우는 군사교범의 대부분이 외국서적이고 또 당시 대한제국의 군제가 이들 강대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향리에서 대학자 맹보순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교육받은 김혁은 육군무관학교를 통해 군사학과 외국어학 등 신학문을
교육받음으로서 신구학문과 문무겸전의 학문을 익힌 최고의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혁은 1900년 1월7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1월19일 육군 참위로 임관됐다. 그는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된 것이다. 졸업식은 고종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덕수궁 함녕전에서 개최된 졸업식에는 고종 황제가 대원수의 자격으로 참석했고 이들에게 직접 졸업장을
수여했다.
김혁의 본격적인 군대생활은 지난 1900년 7월 23일 친위 제1연대 제1대대에 부임됨으로서
시작됐다.
■ 3.1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만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서다
김혁은 1907년
군대해산으로 군대에서 해직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로의 망명은 스승인 맹보순과 일가친척인 김학조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14년 만주의 관문인 안동현으로 건너간 후 곳곳을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했다. 만주에서 귀국한 김혁은 군대시절의 옛 동지들에게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권유하기도 했다. 후일 동기생인 황학수가 만주로 망명하게 된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됐다.
▲ 강남대 인근 김혁 독립운동기념비 |
1919년 서울을 중심으로 3.1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용인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월28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일대에서 안종옥을
중심으로 1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을 전개했고 이웃 마을인 동천리 주민 100여명이 여기에 합세했다. 그날 오후 2시께는 수지면사무소 광장에서
면민 600여 명인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기도 했다.
이때 기흥면에 거주하던 김구식이 김혁을 찾아왔다. 그는 일제에
항거하다가 징역 4년을 받았던 애국지사였다. 그는 일경이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기를 난사하는데 대해 격분하면서 반드시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리고 김혁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주기를 요청했다.
3월30일 오전 10시 주민 300여명이 탑안골 강변에 모였다. 약속대로 김혁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3창을 부른 후 시위에
들어갔다. 그후 김혁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다시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단신으로 1919년 5월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했다.
당시 유하현에는 삼원포를 중심으로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대종교를 신앙하고 있던 김혁은 자연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단체로 들어갔다. 1919년 8월 김혁은 흥업단에 가입해 부단장으로서 단장 김호, 총무 윤세복, 재무 이원일, 경호 오제동, 교섭 이현익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들 모두는 대종교인들이었다. 흥업단은 봉천성 무송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무송현은 백두산 줄기 아래에 있어 산악이 중첩하고 있는 요새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본격적인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김혁은 1920년 8월 흥업단을 떠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게 된다.
북로군정서에서는 국내로 요원을 밀파해 대한제국 시기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김규식, 홍충희, 김찬수, 박형식 등을 동반해 오면서 김혁에게도
북로군정서의 입단을 권고한 것이다.
그는 북로군정서에서 군사 고문으로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9월9일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 때에는 조성환과 함께
축사를 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1920년 10월 김혁을 포함한 북로군정서 군인들은 저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치르게
된다. 김혁이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다는 구체적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당시 그의 위치나 입장으로 보아 어떤 방법으로든 전투에 참여해 승리로 이끄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산리전투 후 밀산으로 이동한 김혁은 그곳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러시아로
이동했으나 1921년 6월 이른바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됐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만주로 재이동해 1921년부터 조직을 정비하고 재기에 힘썼다. 김혁은 북로군정서를 재건하기 위해 1924년 3월 북만주
동빈현을 근거로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다. 당시 총재로는 현천묵, 군사부장 조성환, 서무부장 나중소, 재무부장 계화 등이었는데 김혁은 김규식,
이장녕, 김필, 권녕준 등과 함께 군사 참모로서 활동했다.
▲ 김혁의 묘 |
■ 북만주 신민부의 최고 지도자로 항일 무장투쟁 선도
남만주지역에서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와
정의부가 성립되자 북만주에서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5년 1월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한 결과 그 해 3월10일 영안현 영안현성 내에서
신민부를 조직했다.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흔히 만주의 삼부(三府)라 칭한다.
신민부 창립총회에서 김혁은 대한독립군정서 대표의 1인으로 참석했다.
신민부의 조직은 행정, 사법, 입법의 3권 분립 체제로 돼 있지만 그 핵심기관은 중앙집행위원회이다. 김혁은 바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신민부의 최고 책임자가 됐던 것이다.
그 하부 조직으로 민사부위원장에 최호, 군사부위원장에 김좌진 등이 임명됐다. 그가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나이(50세), 항일
경력, 인품, 통솔력 등이 다양하게 검토됐을 것이다.
신민부에서는 군인들의 모집과 훈련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지역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했는데 김혁은 교장으로 임명돼 부교장 김좌진, 교관
박두희ㆍ오상세ㆍ백종열 등과 함께 군대양성에 힘썼다. 성동사관학교에서는 모두 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독립군 간부의 핵심 세력이
됐다.
이처럼 김혁은 북만주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로 무장투쟁에 앞장섰으며 직책상으로 보면 김좌진 장군보다 높은 직책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경기도 용인시 구갈동 강남대학교 인근에 김혁장군기념비가 1985년 8월15일 세워진
것이 고작이다.
앞으로 김혁 장군의 항일투쟁에 대한 자료 발굴과 연구가 경기도와 용인시, 그리고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경기도가 낳은 독립운동사 최고의 지도자였던 김혁 장군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이다.
박환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