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빛바랜 논길, 새로 찍은 듯 ‘밀착본 복원’
한국 최초 사진예술가 정해창의 100년 묵은 사진첩
1920년대 북한산 기슭 경성 교외의 목가적 풍경을 포착한 정해창의 밀착본 사진. 지금의 성북 일대로 추정되는 이 사진은 정해창의 수작으로 꼽힌다. 아직 사대문 밖으로 본격적인 시가지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던 20세기초 서울 강북 교외의 아름다운 옛 정경을 한폭의 산수화처럼 담아냈다. 노형석 기자
“잊혀져가던 할아버지 사진들을 주목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자, 이걸 봐주십시오.”
한국 최초의 사진예술가였던 정해창(1907~1968)의 손자 정연준(54)씨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가져온 보따리를 탁자 앞에 놓고 풀기 시작했다. 마주한 채 앉은 서민규 디자이너와 출판 프린팅전문가 유화씨, 박명래 사진가의 눈에 불이 켜졌다. 정씨가 올이 고운 청록색 비단으로 짠 보자기 천을 풀자 나무상자가 나타났고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새까만 표지의 스크랩북 다섯권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개별 책당 50쪽 정도의 분량에 300장 남짓한 작가의 풍경, 인물, 정물 사진 등이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정씨가 차분하게 말했다.“할아버지가 100년 전부터 90년 전까지 찍은 비장의 사진첩입니다. 이 첩 속의 사진들을 마음껏 활용하십시오. 좋은 사진집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정해창의 스크랩북 밀착본 사진의 원본중 일부. ‘논길의 처녀’란 가제가 붙어있다. 노형석 기자
‘논길의 처녀’란 밀착본 원본을 디지털 복원한 사진. 누르스름하게 바랜 색감을 없애고 최근 찍은 것처럼 이미지를 보정했다. 노형석 기자
2021년 6월10일 오후, 초여름의 녹음이 번져가던 경기 파주 출판단지의 유화컴퍼니(대표 유화) 사무실에서는 정해창을 흠모하는 후대의 사진 전문가들과 그들을 찾아온 유족 사이에 한국사진사에 기록될 새로운 인연이 맺어졌다. 1929년 3월 경성 광화문빌딩에서 조선 최초의 예술사진 개인전을 열었던 무허 정해창이 1920~1930년대 찍어 나중에 사진집을 발간할 요량으로 미리 가제본 형식으로 생전 만들었던 이른바 ‘더미북’의 사진들을 발굴한 것이다. 첨단 디지털 기술로 새로운 시대 감각을 입혀 21세기의 사진집으로 복원하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현장에서 작품들을 실견한 서 디자이너와 유 대표는 사진들의 섬세한 감수성에 놀랐다. 이른바 ‘밀착본’이라고 줄여 부르는 정해창 스크랩북 속의 사진들은 100년 묵은 것이라 누렇게 변색된 황변 현상이 나타났지만 현대 작품 못지않게 시각적 감성과 상상력이 출중한 수작들이었다. 경성 사대문 밖 북한산 기슭 성북동 정릉동의 교외 풍경과 농가와 논밭,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풍경과 꽃·풀을 담은 사진들은 지금은 완전히 사멸해버린 과거의 고즈넉하고 싱그러운 풍광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1920~1930년대 예술로서의 사진을 주목하고 다채로운 인화기법을 연구하고 전통 문인화의 구도부터 당대 서구의 사진사적 흐름까지 두루 주시해 담았던 대가의 작업을 재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두 전문가는 전율하고 또 전율했지만, 유족과 작별한 뒤 고민에 빠졌다. 사진첩을 넘겨받았으나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사진들은 배경지와 떡이 될 정도로 밀착돼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유족은 이 사진들의 필름이나 유리건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진집 표면에 사진이 붙어있는 그대로 상태에서 다시 밀착해 사진을 찍고 그 화상 데이터로 원화의 상태를 최대한 되살려 양호한 화질을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무와 다리’란 가제가 붙은 정해창의 스크랩북 밀착본 사진 원본. 노형석 기자
‘나무와 다리’란 밀착본 원본을 디지털 복원한 사진. 누르스름하게 바랜 색감을 없애고 최근 찍은 것처럼 이미지를 보정했다. 노형석 기자
지난달 6일부터 서울 청운동 사진전문공간 류가헌 1, 2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회고전 ‘살롱픽춰’(7월16일까지)는 2년 전 시작된 대장정의 결실을 선보이는 자리란 점에서 뜻깊다. 100여년 전 사진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고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연된 무허의 ‘풍경사진’과 ‘정물사진’ 70여 점이 영문 출간된 사진집과 함께 내걸렸다. “정해창의 이미지에 친숙해지고 온전한 이미지를 얻는 희열이 오기까지 1년 이상 밀착해 찍고 검토하고 새 화상을 다시 뽑는 지루한 인고의 과정이 이어졌다”는 박명래 사진가의 회고처럼 출품된 작품들은 세 전문가가 수시로 외국 사진 복원 사례 등을 참고하면서 새 방법론을 개발해 내는 과정을 거쳐 나올 수 있었다.박명래 사진가가 밀착본을 고해상 디지털카메라로 복사 촬영한 뒤 미세한 농도의 결들을 짚어가며 과거 100년 전의 풍경 속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지난한 작업이 이어진 끝에 우선 1차로 복원된 70여 점의 풍경 사진들을 얻게 됐다. 단적인 일례로 전시의 수작 중 하나인 논길을 수줍은 듯 뛰어가는 소녀의 모습과 밀착본 원본을 비교한 화상을 보면 누르스름하게 바랜 색감을 없애고 최근 찍은 것처럼 이미지를 보정한 것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6월17일 류가헌에서 정해창 밀착본 사진 복원 과정을 돌이켜보는 집담회가 열렸다. 이날 자리에 나온 복원의 주역들. 왼쪽부터 밀착본 사진 원본을 제공한 유족 대표 정형식(정해창의 네째 아들)씨와 복원을 주도한 박명래 사진가, 프린트마스터 유화씨. 노형석 기자
1920년대 북한산 기슭 경성 교외의 목가적 풍경이나 도봉산 바라다보이는 노원 들녘을 걸어가는 아낙의 모습을 담은 밀착본 재현 사진은 아직 사대문밖으로 본격적인 시가지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던 20세기 초 서울 강북 교외의 아름다운 옛 정경을 한폭의 산수화처럼 담아냈다. 서민규 디자이너는 “동시대를 살며 파리의 도시 공간을 찍은 프랑스 거장 으젠느 앗제의 사진 못지않은 서정적 감성과 정교한 구도를 지닌 작업들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며 “복원 과정에서 시간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단순한 사진 기록으로서의 가치에 주목하기보다 최초의 사진예술가로서 정해창의 이미지를 동시대적으로 살려내는 과정이었다는 말이다.실제로 지난 17일 열린 복원 전문가들의 집담회에 유족 대표로 나온 정해창의 넷째 아들 정형식(84)씨는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보는 듯 타임머신을 타고 아버지의 100년 전 작품들이 지금 현재의 사진으로 환생한 듯했다”고 털어놓았다.사진계에서 고인의 원화 사진에 디지털적 터치를 가해 복원하는 데 대해 원화의 훼손이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지만, 사진사적 작업들을 21세기적인 시각에서 다시금 살려낸 것은 사진사의 지층을 넓히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화 대표는 전시와 함께 출간된 사진집을 오는 11월 열리는 프랑스 파리 포토페스티벌에 출품할 계획이어서 앞으로 어떤 후속 성과가 나올지도 기대를 모은다.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꽃과 풀을 근접 촬영한 정해창의 스크랩북 정물사진 원본. 노형석 기자
꽃과 풀을 근접촬영한 정해창의 스크랩북 원본 밀착본을 복사촬영해 디지털 복원한 사진. 노형석 기자
도봉산이 바라다보이는 노원 들녘을 걸어가는 아낙의 모습을 담은 정해창의 밀착본 사진. 노형석 기자
웃통을 벗고 찍은 정해창의 사진 자화상.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