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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론>
본관은 문헌에 대략 200여 본이 전하나, 몇 본이 현존하는지는 미상이다. 그 중에서 풍양(豊壤)·한양(漢陽)·양주(楊州)·임천(林川)·배천(白川)·함안(咸安)·순창(淳昌)·횡성(橫城)·평양(平壤)·김제(金堤)·직산(稷山) 등 10여 본이 대본(大本)으로, 이들이 전체 조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씨의 상계(上系)는 일정하지 않다. 이들은 다른 성씨와는 달리 동성(同姓)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 조씨들끼리는 전통적으로 타본(他本)이라도 통혼(通婚)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조씨 중에서 양주·평양·임천·배천 등은 송대(宋代)의 귀화족으로 알려져 있다. 양주조씨의 세보(世譜)에 의하면 송태조(宋太祖:趙代)의 7대손에 익(翼)·기(冀)·이(裏)·광(廣)의 4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셋째와 넷째가 고려에 귀화, 각각 평양과 임천조씨의 원조(遠祖)가 되었다 하고, 또 익(翼)의 아들 4형제 지린(之璘)·지수(之壽)·지청(之淸)·지말(之末)이 고려 의종 때 고려에 건너와 각각 배천·한양·풍양·양주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조선 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는 배천조씨가 송(宋) 태조의 장자(長子)의 후예(一說에는 趙子龍의 후예), 임천조씨는 차자(次子)의 후예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평양조씨의 시조 춘(椿)은 남송(南宋)의 상장군(上將軍)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풍양·한양측에서는 양주세보의 기록을 부인하고 있다. 풍양조씨 화수회에 의하면, 풍양의 시조 조맹(趙孟)은 본래 성이 없었고 이름을 '바우[巖]'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왕건)를 도와 고려의 건국에 공을 세워 조성(趙姓)을 사성(賜姓)받고 이름도 맹(孟)으로 고쳤으므로, 한국 조씨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깊다고 한다. 고려 태조의 사성에 의하여 고려 혁명 4공신인 홍술(弘述)·백옥삼(白玉衫)·삼능산(三能山)·사귀(沙貴) 등이 각각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으로 창씨(創氏)를 한 사실로 미루어 풍양조씨측의 주장은 사실(史實)에 충실한 고증으로 보인다.
조씨는 조선 개국공신 40여 명 가운데 8명으로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602명, 상신 19명, 문형(양관대제학) 10명, 왕비 3명, 청백리 6명과 판서급 수십 명을 배출하였다.
1975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가구수 15만 1999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2.3%로 249성 중 제7위였고, 1985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87만 7050명에 가구수 20만 7895가구로 274성 중 제7위로 나타났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98만 4913명, 가구수 30만 6022가구, 286성 중 제7위로 전체인구의 2.1%를 차지한다.
(1) 풍양 조씨(豊壤 趙氏)
시조 맹(孟)의 후대에서 지린(之藺)을 중조(中祖)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신혁(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대별된다. 이 2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회양공파(淮陽公派)·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 아래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벼슬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 파는 후에 한평군파(漢平君派:이른바 老論집)와 청교파(靑橋派:이른바 少論집)로 대별되는데, 회양공파에서는 상신 6명, 문형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한편, 남원공파 역시 '소론집'으로 상신 1명, 문형 1명을 배출하였다.
주요 인물을 보면, 숙종 때의 우의정 상우(相愚), 영조 때의 좌의정 문명(文命), 영조 때의 영의정 현명(顯命), 영조 때의 우의정 재호(載浩) 등이 회양공파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이고 효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익(翼),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복양(復陽)은 남원공파이다. 또,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엄(曮)을 들 수 있는데, 회양공파의분파인 한평군파이다. 이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를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엄의 손자 만영(萬永)이 문조(익종)의 국구(國舅)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만영의 외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에는 병현(秉鉉)이 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11만 3798명, 가구수 3만 5009가구로, 조씨의 11.6%를 차지한다.
(2)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는 고려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 지수(之壽)이다. 한양조씨에서는 조선 개국공신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옥(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를 지낸 온(溫)이다. 대표적 인물은 광조(光祖)인데, 그는 개국공신 온의 현손으로 당대의 이름난 도덕가요 성리학자였다. 이이(李珥)는 김굉필(金宏弼)·조광조·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을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한양조씨의 인물은 그 중에서도 판도판서 인벽(仁璧)의 아들 4형제(溫·涓·侯·師)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원기(元紀), 중추부판사를 지낸 혜(惠), 인조 때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일본기행(日本紀行)》을 지은 경(絅), 현종·숙종 때 명필로 이름 있던 위명(威明) 등이 그들이다. 그 밖에 헌종 때 문장과 시(詩)의 천재로 알려진 수삼(秀三)과 그의 손자로 초상화에 뛰어난 화가 중묵(重默)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30만 7746명, 가구수 9만 5206가구로, 조씨의 31.2%를 차지한다.
(3) 양주 조씨(楊洲 趙氏)
세도 가문은 아니나 조선 중기 이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시조 조잠(趙岑)의 증손대(조선 전기)에서 정평공파(靖平公派:啓生)·문강공파(文剛公派:末生)·제학공파(提學公派:從生)·강화공파(江華公派:惟中)의 4형제로 대별된다. 그러나 정평공파와 제학공파는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김종서(金宗瑞) 일파로 몰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현재 그 후손이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양주조씨의 숱한 인물들은 문강공 말생의 후손으로서 오늘날 문강공은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고 한다.
양주조씨 일문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말생의 손자인 정(挺)이 1619년(광해군 11)에 우의정에 오름으로써 시작된다. 인조의 국구(國舅)가 된 창원(昌遠), 현종 때의 형조판서 계원(啓遠)에 이어, 계원의 아들 7형제에 이르러서는 숙종·정조 시대에 걸쳐 그 세력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에는 같은 집안이면서도 노·소론(老少論) 양파로 갈라져 당쟁의 극렬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7형제 중 둘째 구석(龜錫), 셋째 희석(禧錫), 넷째 사석(師錫), 다섯째 가석(嘉錫) 등 4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였는데, 희석의 후대는 노론(老論)으로, 사석과 가석의 후대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져 집안끼리 당쟁을 벌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을사조약 때 기울어지는 국운(國運) 앞에 충의를 다하다 자결한 병세(秉世)를 들 수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2만 3942명, 가구수 7,437가구로, 조씨의 2.4%를 차지한다.
(4) 평양조씨(平壤 趙氏)
시조는 고려 때의 추밀부사 춘(椿)이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준(浚)을 들 수 있는데, 태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토지제도의 권위로서 하륜(河崙) 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또, 명종 때의 성(晟)·욱(昱) 형제를 들 수 있는데, 성은 의약·산수·천문·지리와 성리학에 밝았고, 욱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여 '용문선생(龍門先生)'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태종의 부마인 평양부원군 대임(大臨), 정종의 부마인 효산(孝山), 숙종 때 역학자로 이름 있던 관국(觀國), 고종 때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군무대신을 지낸 희연(羲淵) 등을 들 수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4만 1047명, 가구수 1만 2720가구로, 조씨의 4.2%를 차지한다.
(5) 배천 조씨(白川 趙氏)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좌복야를 지낸 조지린(趙之遴)이다. 반(胖)·기(琦) 등 2명의 개국공신을 배출한 외에 '임란사충신(壬亂四忠臣)'의 한 사람인 헌(憲)을 낳아 유명하다. 헌은 당대의 뛰어난 석학이었으며, 곽재우·고경명·김천일과 더불어 '임란사충신'으로 일컬어지는데, 특히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이이(李珥)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밖에 정호(廷虎)·석윤(錫胤) 부자(父子)가 있는데, 정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대사간을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석윤은 1650년(효종 1)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6만 6155명, 가구수 2만 734가구로, 조씨의 6.7%를 차지한다
(6) 임천 조씨(林川 趙氏)
시조는 고려 때의 천혁(天赫)이다. 조선시대의 주요 인물로는 시조의 10대손인 지서(之瑞)를 들 수 있다. 또, 3대가 모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친 원(瑗)·희일(希逸)·석형(錫馨)이 있다. 원은 선조 때 정언(正言)이 되어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였으며, 뒤에는 승지에 이르렀는데, 《독서강의(讀書講疑)》 등의 저서가 있다.
희일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화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죽음집(竹陰集)》 등을 남겼다. 석형은 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당시(唐詩)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한문소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저자로 알려진 성기(聖期), 흥선대원군의 사위로서 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일본정부가 준 남작(男爵)을 거절한 경호(慶鎬) 등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1만 1040명, 가구수 3,476가구로, 조씨의 1.1%를 차지한다
(7) 함안 조씨(咸安 趙氏)
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원윤(元尹)을 지낸 정(鼎)이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려(旅)로 그는 시조의 10대손이다. 려의 후손은 모두 현달하였는데, 현손 종도(宗道)와 임도(任道)가 유명하다. 종도는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임도는 전원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을 지냈다. 영조 때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난 영석(榮祏)가 있고, 조선 후기에는 화가로 산수·인물에 뛰어난 정규(廷奎)와 희룡(熙龍)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25만 9196명, 가구수 8만 1048가구로, 조씨의 26.3%를 차지한다.
(8) 순창 조씨(淳昌 趙氏)
순창(淳昌)의 옛 이름이 옥천(玉川)이므로 '옥천조씨'라고도 한다. 호서(湖西)·호남(湖南) 2파로 갈리는데, 호서파는 고려의 호장(戶長) 자장(子長)을, 호남파는 고려시대에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장(璋)을 각각 시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종친측에 따르면 상고세계(上古世系)에 대한 문헌이 부족하여 합보(合譜)는 못 보고 있으나 일조지손(一祖之孫)임은 틀림없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명종 때 목사 등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긴 유성(惟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사위로 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수익(壽益) 등이 호서파에 속한다.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정몽주(鄭夢周)·설장수(偰長壽)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절개를 지켜, 목은(牧隱)·포은(圃隱)·도은(陶隱)·야은(冶隱)과 함께 '오은(五隱)'으로 불린 농은(農隱) 원길(元吉), 세종 때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숭문(崇文) 등은 호남파에 속한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6만 7770명, 가구수 2만 1015가구이다.
(9) 횡성 조씨(橫城 趙氏)
시조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첨(瞻)이다. 주요 인물로는 명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충(沖)이 있으며, 조선에 와서는 이황(李晃)의 문인으로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월천집(月川集)》《곤지잡록(困知雜錄)》 등의 저서를 남긴 목(穆)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5,337명, 가구수 1,648가구로, 조씨의 0.5%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