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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신수(都愼修)
[본관] 성주(星州)
[생졸년] 1598년(선조 31)~1650년(효종 1)
[문과] 인조(仁祖) 4년(1626) 병인(丙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08/16)
[문과]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05/34)
[진사]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38위(68/100)
[거주지] 대구(大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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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영해 부사 지암 도공 묘갈명병서〔寧海府使止巖都公墓碣銘幷序〕
만력(萬曆) 무술년(戊戌年,1598, 선조 31)에 지암(止巖) 도공(都公)이 칠곡(漆谷) 팔거현(八莒縣)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나 10여 세에 경서와 역사서에 널리 통하였고 글을 잘 지어 재능과 명망이 도(道)에서 으뜸이었다.
계해년(癸亥年,1623, 인조 1)에 과장(科場)으로 달려가 삼장(三場)을 통과하고, 생원시에서 장원하여 마침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으나 곧바로 파방(罷榜)되었다. 갑자년(甲子年,1624, 인조 2)에 다시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정묘년(丁卯年,1627, 인조 5)에 명경과(明經科)에 올라 벼슬한 지 수십 년 동안 성균관의 학유(學諭)ㆍ학록(學錄)ㆍ학정(學正)을 거쳐 박사(博士)에 올랐다가 삼례도 찰방(參禮道察訪)에 전보되었다. 임기가 차서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형조 좌랑 겸 기사관(刑曹佐郞兼記事官)으로 옮겼다.
호조 좌랑(戶曹佐郞)ㆍ공청도 도사(公淸道都事)에 제수되었다가강진 현감(康津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호조 정랑ㆍ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옮겼다가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제수되어 나갔다.임기가 끝나자에 다시 호조 정랑 겸 기주관(記注官)에 제수되었다.
서흥 부사(瑞興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본조(本曹,호조)에서 공이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자 그대로 본래의 벼슬에 머물게 하였다. 다시 호조 정랑에 배수되었다가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었다. 기축년(己丑年,1649, 효종 즉위년) 인조(仁祖)의 국상(國喪)에 나아갔다가 직강(直講)에 배수되었다.
이듬해에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나갔다가 11월에 병에 걸려 임소에서 임종하였다. 방술가(方術家)의 말을 따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갑진년(甲辰年,1664, 현종 5)에 외곡(外谷)의 선영 옆으로 이장할 때 아내 숙인(淑人)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아, 공은 날 때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4세 때 손바닥 위에 팔괘(八卦)를 그리자 낙재(樂齋)서사원(徐思遠)이 보고서 기특하게 여겼다. 낙재에게《주역》을 배울 때〈건괘(乾卦)〉와〈곤괘(坤卦)〉이하는 스스로 통달하여 깨우쳤다. 조금 성장하여 한강(寒岡)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한강이 매우 장려하고 허여하였다.
삼례도 찰방(參禮道察訪)으로 있을 때에 사재를 출연하여 말 값에 보태고 곡식을 교역하여 조적(糶糴)을 시행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을 구휼하였다. 그래서 아홉 역(驛)의 아전과 역졸(驛卒)들이 모두 공이 덕이 있다고 하였다. 함흥(咸興)은 나라에서 정무가 복잡하고 번거로운 곳이다.
부임한 날에 문서가 구름 같이 쌓였으나 공이 잠깐 사이에 결재를 마쳤다. 날마다 오시(午時)가 되지 않아 공무를 마치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런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함흥부의 아전이 떠돌다 들어온 여인을 숨겨 계집종으로 삼고 그녀의 어머니와 오라비를 죽여 입을 막은 일이 있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나 공이 간악한 실상을 자세히 살피고 땅을 파서 죽은 모자(母子)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이날 구름이 없는데도 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원통함이 풀려서 내리는 비이다.’라고 여겼다. 함흥부에포흠(逋欠)이 많았기 때문에 공이 녹봉의 일부를 떼고 비용을 절약하여 보충하자 백성들이 혜택을 입었다.
그리고 더욱 학문을 일으키는 데 뜻을 두어 재주에 따라서 권과(勸課)를 게을리하지 않아 6년 안에 인재가 융성하였고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한 사람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올 때 고을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수레를 붙잡고 울부짖으며 차마 떠나지 못하게 하였고,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부임하여 치적이 더욱 드러났고 방백(方伯)이 아뢰자, 임금이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돌아올 때에 아전과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흠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공이 경진년(庚辰年,1640, 인조 18)에부친상을 당하여 삼 년 동안 여묘(廬墓)살이 할 때 슬퍼함이 법도보다 지나쳐서 몸이 야위고 기운이 소진되었다.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나갈 때에 병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죽어 구원할 수 없었다. 하늘 위에 부친이 계셨으니, 이것이 공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풀지 못할 원통함이었다. 아, 하늘이 이미 걸출한 자질을 주어 재주와 덕이 남들보다 뛰어남이 이와 같았는데도 낮은 벼슬에 침체되어 주군(州郡)을 오가느라 온축한 기량을 펼치지도 못하였고 하늘이 또 빨리 목숨을 빼앗아 갔으니 애석하다.
공은 칠곡(七谷) 사람으로 성이 도씨(都氏), 이름이 신수(愼修), 자가 영숙(永叔), 호가 지암(止巖)이다. 비조 도진(都陳)은 칠곡부원군(七谷府院君)이고, 이로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증조 도흠조(都欽祖)는 경상 좌우후(慶尙左虞侯)를 지냈고, 조부 도원결(都元結)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부친 도여유(都汝兪)는 무공랑(務功郞)을 지냈고, 모친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판서(判書) 경헌공(敬獻公) 이건손(李健孫)의 손녀이자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된 이석겸(李石謙)의 따님이다. 아내 숙인(淑人)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산화(山花)선생 이견간(李堅幹)과 경은(耕隱)선생 이맹전(李孟專)의 후손이자 판관(判官) 이상백(李尙白)의 따님이다. 맑은 행실이 있어 종족들이 칭송하였다.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장남 이직(爾稷)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이 시천(是天)이고 차남은 어리다. 차남 이설(爾卨)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이 시척(是脊)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삼남 이석(爾奭)은 딸 하나를 낳았다. 딸 셋은 사인(士人) 이철주(李鐵柱)ㆍ여원화(呂元和)ㆍ정시운(丁時運)에게 시집갔다.
숙인(淑人)은 무술년(戊戌年,1658, 효종 9) 11월에 죽었고, 장지(葬地)는 바로 공과 합장한 무덤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뛰어난 인물을 낳아 / 天生偉姿
큰일을 할 듯했건만 / 若有以爲
남들이 그대를 저지하여 / 人有沮君
당시에 뜻을 펴지 못하였네 / 抹摋于時
난대와 옥서에 / 蘭臺玉署
발붙일 곳이 없어서 / 無地寄足
남북의 변방에서 / 北塞南陲
가시나무에 깃든 난새 같았네/ 鸞棲于棘
백성들이은혜를 그리워하고 / 民懷惠鮮
풍속이 문명으로 교화되었으나 / 俗化文明
오로지 두루 하지 못했으니 / 專而不咸
하늘의 이치가 아득하게 되었네 / 此理冥冥
외곡의 산기슭은 / 外谷之山
기운이 매우 맑으니 / 其氣淸淑
반드시 남은 경사가 / 必有餘慶
자손만대에 전하리라 / 子孫千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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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강진 …… 않았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지암 도공 행장(止巖都公行狀)〉에 “강진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모님이 늙으신 데다 거리가 멀
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체직되었다.[除康津縣監, 以親老道遠辭遞.]”라고 되어 있다.
[주02] 임기가 끝나자:
원문의 ‘급과(及瓜)’는 오이가 익을 때라는 말로, 임기(任期)가 끝나 교체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 양공(齊襄公)이 연
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를 규구(葵丘)로 보내 1년 동안 다스리게 할 때에, 마침 오이가 익을 무렵이므로 “이듬해 오이가 익을
때에 후임자를 보내어 교체시켜 주겠다.[及瓜而代]”라고 약속했는데, 1년이 지나도 교체해 주지 않고 교대를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
자, 마침내 그들이 분개하여 난리를 일으킨 고사가 전한다.《春秋左氏傳 莊公8年》
[주03] 서사원(徐思遠):
1550~1615.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ㆍ낙재이다. 전교 서흡(徐洽)의 아들로 큰아버지 서형(徐
浻)에게 입양되었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청안 현감(淸安縣監)을 지냈다. 이황(李滉)의 글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에는 후
진을 가르쳤다. 문집으로《낙재집》이 전한다.
[주04] 포흠(逋欠):
포는 조세의 포탈이고, 흠은 관청의 재화를 사사로이 소비하여 부족을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주05] 부친상:
원문에는 모친상[內艱]으로 되어 있으나 판각의 오류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도신수의 부친은 도여유(都汝兪, 1574~1640)
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중(諧仲), 호는 서재(鋤齋)이다. 정구(鄭逑)ㆍ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주06] 이견간(李堅幹):
원문에는 ‘화산선생(花山先生)’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기 때문에 산화선생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견간(?~1330)의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정란(廷蘭), 자는 여직(汝直)ㆍ직경(直卿), 호는 국헌(菊軒)ㆍ산화(山花)이다.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을 섬
기며, 민부전서(民部典書)ㆍ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ㆍ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ㆍ홍문관사(弘文館事) 등을 역임하였다.
[주07] 이맹전(李孟專):
1392~1480.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이다. 1427년(세종9) 문과에 급제하여 거창 현감을 지냈다. 세
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간 뒤로 30여 년을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주08] 난대(蘭臺)와 옥서(玉署):
난대는 한(漢)나라 때 궁중(宮中)의 전적(典籍)들을 간직하여 두던 곳으로 중승(中丞)이 그 일을 맡아보았으며, 또한 이곳에서 직무
를 수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문서(文書)를 다스리고 문장을 관장하는 곳으로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킨다. 옥서는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주09] 가시나무에 …… 같았네:
큰 인재가 역량에 걸맞지 않은 직책을 맡은 것을 의미한다. 후한(後漢)의 왕환(王奐)이 “탱자와 가시나무는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
이 아니니, 백 리쯤 되는 작은 고을이 어찌 큰 현인이 있을 고을이겠는가?[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106 仇覽傳》
[주10] 은혜:
원문의 ‘혜선(惠鮮)’은 혜선환과(惠鮮鰥寡)의 준말로 홀아버지와 홀어머니를 은혜로 덮어 주는 것을 말한다.《서경》〈무일(無
逸)〉에 “아름답게 부드럽고 공손히 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홀아비와 과부를 아껴 한낮과 저녁이 되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민을
화하게 하였다.[徽柔懿恭, 懷保小民, 惠鮮鰥寡, 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和萬民.]”라고 하였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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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寧海府使止巖都公墓碣銘幷序。
萬曆戊戌年。止巖都公。生于漆谷八莒縣之里第。幼而有雋才。十餘歲時。博通經史。善屬文。才名冠一道。癸亥。赴擧貫三場。而生員試則居魁焉。遂中司馬。旋罷。甲子。復中司馬。丁卯。登明經科。立朝數十年。歷成均學諭學錄學正。博士。轉參禮察訪。秩滿。拜典籍。移刑曹佐郞兼記事官,戶曹佐郞,公淸道都事,康津縣監。不赴。遷戶曹正郞成均直講。出爲咸興判官。及瓜。復爲戶曹正郞兼記注官。拜瑞興府使。本曹惜其去入啓。仍原任。再爲戶曹正郞。除蔚山府使。己丑。赴仁廟喪。拜直講。翌年。拜寧海府使。十一月。感疾卒于任所。用術家言權厝。甲辰。遷窆于外谷先塋之側。與淑人李氏合窆焉。嗚呼。公生而有異質。四歲。畫八卦于掌上。徐樂齋思遠。見而奇之。及受易于樂齋。乾坤卦以下。自能通曉。稍長。遊寒岡先生門下。甚見奬許。其在參禮。出私藏爲馬價。貿穀爲糶糴。以賑貧乏。九驛吏卒。咸德焉。咸興。爲國中劇邑。到任日。簿牒,雲委。公裁決須臾而盡。日未午。罷衙。邑人皆曰古未有也。有府吏容匿流來女人爲婢。殺其母與娚以滅口。年歲已久。公按察其奸狀。掘得母子尸。是日無雲而雨。人以爲雪冤雨。府多逋欠。公割淸俸節縮補塡。民蒙其惠。尤留意於興學。隨才勸課不怠。六期之內。人才蔚興。明經決科者。踵相續焉。及瓜。闔境攀轅累日。號呼不忍去。相與立石頌德。逮莅蔚山。政績益著。方伯以聞。自上賜內廏馬以奬之。及歸。吏民立碑以寓慕。公於庚辰。遭內艱。廬墓三年。哀毀逾制。瘦削而氣悴。及赴寧海。疾益甚。遂不救。上有慈天。此公終天之痛也。噫。天旣鍾偉姿。才德出人。如此而沈冥於下僚。棲遲於州郡。不克展布所蘊。而天又奪之速。惜哉。公七谷人。姓都。名愼修。字永叔。號止巖。鼻祖諱陳。七谷府院君。自是以降。世襲冠冕。曾祖諱欽祖。慶尙左虞侯。祖諱元結。贈漢城右尹。考諱汝兪。務功郞。妣驪興李氏。判書敬獻公諱健孫之孫。贈判決事諱石謙之女。配淑人星山李氏。花山先生諱堅幹。耕隱先生諱孟專之後。判官諱尙白。其考也。有淑行。宗黨稱之。男三。曰爾稷。有二男。長是天。次幼。曰爾卨。有三男。長是脊。餘幼。曰爾奭。生一女。女三。士人李鐵柱,呂元和,丁時運。其壻也。淑人以戊戌十一月卒。葬卽公合窆之穴也。銘曰。
天生偉姿。若有以爲。人有沮君。抹摋于時。籣臺玉署。無地寄足。北塞南陲。鸞棲于棘。民懷惠鮮。俗化文明。專而不咸。
此理冥冥。外谷之山。其氣淸淑。必有餘慶。子孫千億。<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