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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연씨의 그림이 한층 밝고 명랑해졌다. 산뜻하고 경쾌해졌다. 어떤 부담감도 지우지 않으려는 듯 화면은 봄바람이 불 듯 고운 색상들이 나붓거리고 나비가 꽃에 날아와 앉은 듯 가뿐하다. 김씨는 근작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감으로부터 느껴지는 감동을 표현했다. 싱그러우면서도 어여쁜 자연의 자태를 주목하고 거기에 깃든 생명의 소중함을 묘출한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잔잔한 선율과 흥겨움으로 수놓아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 광선을 흠뻑 들이마신 것처럼 건강미가 넘치고 생동감이 넘친다. 자연물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눈길을 받을 때 그 모습을 더 환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예술가가 살아 있는 것들을 주시하며 작품으로 옮기는 것은 대상과의 사귐에서 비롯되는 희열, 그 희열의 불씨를 꺼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렇듯 자연 경험에서 오는 은밀한 감정들을 화면에 담고 있다. 일종의 '시각적인 자연여행'이랄 수 있으며 이 과제를 천착해오고 있다. 자연과 교감하고 호흡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싱그럽게 자연의 숨결을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영적 감각이라는 수분을 섭취하며 충만한 은혜라는 햇빛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의 화면에 등장된 이미지들 역시 식물의 잎사귀, 줄기, 나뭇가지 등에서 착안되었다. 막대기 모양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나뭇가지를, 푸른 바탕은 창공을, 반짝이는 색상은 무성한 숲 혹은 햇빛에 산란하는 잎사귀를 연상시킨다. 가만히 있으면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새의 지저귐, 수액을 들이마시는 나무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수풀을 헤집고 나온 새싹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추상화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풍경화에 더 가깝다.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 풍경을 추상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것이 약간 다를 뿐이다. 그의 그림은 표토에서 지하로 스며들어 식물의 뿌리를 적시는 물과 같이 축복의 근원에 잇대어져 있다. 축복의 비를 맞아 푸르른 잎새와 풍성한 열매를 맺듯 그의 그림은 소망스런 정서의 열매를 맺는다. 속삭임, 쉼, 느긋함, 호젓함, 자유로움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동산에서 뛰놀며 노래하는 데서 얻어진 것이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그의 그림은 눈으로 부르는 찬양에 다름 아니다. |
- 평론가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
감수성 있는 화가라면 멋진 경관을 접했을 때 벅찬 희열을 느낀다. 풍경을 보고 ‘내가 찾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듯한 찌릿함을 체험한다. 그는 심호흡을 몇 번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비로소 작품구상에 착수할 수 있다.
이 화가는 대상과의 긴밀하고 달콤한 사귐을 보여준다.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서 이런 벅찬 희열은 나올 수가 없다. 그런 절정의 희열이 온 몸을 휘어잡을 때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게 된다.
비단 예술가만 이런 희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저명한 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은 훗날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을 “일종의 논리학 기계”로 비교하면서 “인생의 아름다움같은 것은 전혀 음미할 줄 모른다”고 고백하였다. 캠브리지 출신의 명문 귀족층의 자녀였으며 지적 탁월성을 자랑한 그였지만 그의 친구는 각박한 러셀을 가리켜 익살스럽게 ‘최후의 심판’이라고 불렀다.
내가 보기에는 해박한 철학자보다 순진한 풍경화가가 훨씬 나아 보인다. 아주 작은 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큰 것도 사랑하지 못하며 불빛없는 세상을 헤매고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인들은 종종 이점을 착각한다.
생명체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눈길이 있을 때 그 모습을 더 환하게 드러낸다. 그 진가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생명체는 그 사람을 기쁘게 환영하며 자신의 모든 것까지 내어준다. 눈길을 주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환호하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가들이 생명체에 주시하며 작품으로 옮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대상과의 사귐에서 비롯되는 벅찬 희열, 그 희열의 불씨를 꺼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자연여행
자연과 교감하는 자아의 감성을 표현해오고 있는 김자연씨도 그런 사람이다. 근사한 것을 보면 두근거리는 마음을 참을 수 없듯이 그의 그림도 자연경험에서 오는 설렘을 화면에 담고 있다. 일종의 ‘시각적인 자연여행’이랄 수 있으며 이 과제를 묵묵히 천착해오고 있다.
그의 화면에 등장된 이미지들 역시 식물의 잎사귀, 줄기, 나뭇가지에서 착안되었다. 줄기가 화면 중앙이나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공간의 균형을 잡아주거나 나무의 자태를, 흰 바탕은 창공을, 크고 작은 이미지들과 색상은 무성한 숲 혹은 햇빛에 산란하는 잎사귀를 연상시킨다. 그밖에도 달과 산,창공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그의 그림은 풍경화를 닮아 있다.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 풍경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용하고 있다는 것이 약간 다를 뿐이다.
왜 이런 변용절차를 거쳤을까? 대상을 묘사하다 보면 대상 자체에 집중해 식물에 대해 갖는 작가의 감성을 담아내지 못하기 쉽다. 구상적일수록 주관적 감성을 담기 어렵고 반대로 추상적일수록 객관적 실재감을 담기 어렵다. 대상의 이미지가 눈에 보이냐 안보이냐를 떠나 이처럼 구상과 추상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도사린다. 작가는 대상 자체보다도 자신의 감관에 자연물이 어떻게 작용하고 효과를 미치는지를 중시한다. 바깥 대상이 내면에 들어와 크고 작은 파장을 일으키는 상태를 응시하고 또 나타내고 싶은 것이다.
그가 날카로운 관찰자가 되기를 원했다면 추상적 이미지를 포기하고 진작에 묘사와 재현으로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사물을 볼때의 벅찬 희열과 감응이 그만큼 강열하다는 표시다. 그의 그림을 시에 비유하면 서정시, 음악에 비유하면 녹턴에 가깝다.
생명의 소리
그의 그림이 한층 밝고 명랑해졌다. 산뜻해졌고 경쾌해졌다. 뿐만 아니라 장식성도 풍부해졌고 표정이 발랄, 상큼해졌다. 대게는 연륜이 들면 작품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김자연씨는 되려 정반대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듯 젊은 작가의 작품처럼 생기가 돌고 순수하다. 어떤 부담감도 그림에 지우지 않으려는 듯 화면은 봄바람이 불 듯 고운 색상들이 나붓거리고 나비가 꽃에 날아와 앉은 듯 가뿐하다.
김자연씨는 근작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감으로부터 느껴지는 감동을 표현”하였다. 물성(materiality) 위주의 점잖은 분위기에서 벗어나 싱그러우면서도 어여쁜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출하고 거기에 깃든 생명의 소중함을 주시한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리듬과 환희로 물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 광선을 듬뿍 들이마신 것처럼 건강미가 넘치고 생동감이 흐른다.
기본적으로 그의 그림은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생명의 소리란 침묵을 깨우는 소리이고, 어둠에다 빛을 주며, 자연계의 온갖 아름다움과 호흡하고 교감하는 상태를 말한다. 소리는 활력을 주며 소망을 주며 우리에게 밝고 힘 찬 빛을 안겨준다. 맑은 햇빛, 청정한 숲, 신선한 공기, 넓은 하늘, 푸른 들판, 바람 소리, 봄날 아지랑이, 시냇물, 뭉게구름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자연과 교감하고 호흡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싱그럽게 자연의 숨결을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생명의 울림을 이처럼 함축적으로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생명의 소리를 보관한 음반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섬세한 감관에 뿌리를 두고 정서와 경험이라는 수분을 섭취하며 은혜와 감사라는 햇빛을 맞으며 자라난 예술이다.
최소한의 손길로 최대한의 의미를
김자연씨는 최소한의 손길로 최대한의 의미를 수확한다. 냉랭하거나 건조하거나 난해한 작업이 아니다. 삶의 생기가 사라진 기계적이며, 무표정한 작업도 아니다. 추상이더라도 그의 그림은 삭막함과 건조함, 그리고 냉랭함과는 무관하다. 논리의 지배를 받기보다 생명 자체에서 얻어진 것을 묘출할 따름이다.
표토에서 지하로 스며들어 식물의 뿌리를 적시는 물과 같이 뿌리에 비를 내리는 샘, 그 축복의 근원에 잇대어져 있다. 축복의 비를 맞아 푸르른 잎새와 눈부신 꽃, 달디 단 열매를 맺듯이 그의 그림은 소망스런 열매를 맺는다. 속삭임, 쉼, 느긋함, 호젓함, 자유로움이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그가 소망하는 창조의 동산을 꿈꾸고 보존하려는 데서 얻어진 것들이다. 더 흡족히 축복의 비를 맞을수록 더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의 그림이 흥겹고 즐거운 것은 ‘물댄 동산같은 영혼’(watering the soul)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에서 우리는 멋진 풍경 앞에서 벅찬 희열을 느끼는 미술가를 살펴보았다. 미술가가 자연에서 환희와 기쁨을 만끽하였다면,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부담스럽지가 않고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뀔 것이다. 김자연씨는 지친 사람들을 맞이해줄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을 제시한다. 감상자를 위한 수용의 공간이며 배려의 공간이다.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넉넉함이 있어서 좋다.
그의 그림처럼,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서성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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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방색이 엿보이는 풍요로운 자연 과 생명의 소리와 날개짖이 피부로 느껴지던 작품 어제도 잘 감상하고 왔습니다.
음악에 비유 한다면 녹턴에 가깝고 시로 비유한다면 서정시에 가깝다굽쇼~
이미지를 따라 시각적인 자연여행을 나름 해봅니다.
교수님의 내면을 엿 보았습니다.간결하고 화려함...감상할수있어 즐겁습니다.
무슨 의미로 그림을 그린것지 전혀 이해 할 수 없습니다.물론 그림을 읽을 수 없는 무지가 원이이 되겠습니다만 평론가의 평론 역시 무슨 말을 할 려는지 진정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을 해야하고 작가의 의도을 알아야 하고 뭐 그런 방법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단순한 작가의 생각을 색갈로 뭔가의 흔적을 남기고 남긴 흔적안에서 관람자는 그런 작가의 의도을 눈치채야 하고 그런것이 부족하면 이해 할수없는 평론가의 평에 귀을 기울이고 부단한 인내와 노력을 다했을때 아주 조금 그림을 이해할 척 그런 표정을 남기면 아 ~그사람 그림을 볼줄 아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는 억지...인정을 받고...
그림을 하나의 언어로 그것도 작가의 특별한 언어로 그래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열정같은거 보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끄집어 낼 수있는 ...그런것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런 열정도 관심도 그리고 감수성 독자성 예술성 등등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관객에게 전해 줄수 없는 작업이라면 도저히 작품이라고 할 수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