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도 3학년에 진학한 봄에 4. 19 혁명이 있어났다. 4. 19의 직접적 동기는 부정 선거에 있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부정 선거 규탄 운동이 아닌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과 부패한 권력에 대한 국민 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운동이라 볼 수 있다.
전날 고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의 하수인들인 깡패들에게 피습된 사진이 도하 신문에 큼직하게 실렸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불의에 대한 항거에 동참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학교에서는 서둘러 일찍 귀가 시켰으나 우리 몇몇은 데모군중에 합류했다. 제일먼저 간곳이 학교 인근에 있던 서대문 경무대라 불렸던 당시의 권력자 이기붕의 자택 앞이다.
대학생들과 대치하던 경찰이 갑자기 발포를 하여 이기붕집 앞에 있던 동양극장 옥상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대학생이 총탄에 맞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걸 목격했다. 경찰들의 사격으로 뿔뿔이 헤어진 우리는 데모군중을 따라 덕수궁 앞과 조선호텔 앞까지 진출했다. 그때 내 앞에서 대학생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들것을 들고 후송하는 걸 보고 중학생인 우리들은 물론 주위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다음날인가 약수동에 있던 당시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된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집이 불타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 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낼 때까지 우리 몇은 매일 시내로 나가 데모에 참여했다. 4월 19일부터 대통령이 하야한 4월 26일까지 내내 시위에 참여했거나 먼발치에서 나마 응원을 했다.
나중에 들으니 덕균이는 시민들과 함께 경찰로부터 탈취한 불자동차를 직접 타고 데모군중들과 함께 대통령관저였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앞까지 진출했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길 했다.
당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초등(국민)학교와 중학교 동기동창인 박덕균이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해 보겠다.
"덕균이는 국민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고 그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6학년 때도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고 서울중학교에 나란히 합격했다. 중학교 3학년 때도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했다.
어릴 때부터 덕균이는 공부도 잘했고 우리또래보다 생각이 깊고 어른스런 면이 있었다. 그래서 늘 또래의 우두머리 격으로 행동했다. 후에 안일이지만 그는 우리또래 보다 두 살 많은 나이였으니 당연히 어린 우리들보다 조숙했고 우리 또래보다 더 성숙했던 게 당연했다.
그는 빈촌이나 다름없는 인현시장골목집에서 살았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형 둘과 남동생과 어렵게 살았다. 아버지는 6. 25때 반공청년단에서 활동하시다 전사를 했다고 하신다. 그래서인지 그는 장충동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고 내방에서 나와 침식을 자주했다.
그와 생각나는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당시 서울의 중요 대중교통수단은 전차였다. 전차 차고지는 지금의 종로 6가와 을지로 6가사이 동대문근처 청계천을 끼고 있었다. 나는 을지로 6가에서 그는 4가에서 매일 등굣길에 전차를 탔기에 전차운전을 눈으로 익혔다. 우리는 한번 운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래서 장충동 우리 집에서 밤새 작전을 짜고 새벽에 동대문 전차 차고지로 숨어들어갔다. 나와 그는 전차운전석에 올라 전차에 시동을 걸고 몰고 나왔다. 그러자 전차 차고지에서 느닷없이 전차가 움직이니 당직실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큰일을 저지른 우리는 겁도 나고 당황해서 전차를 청계천에 가로놓인 다리 중간에 세웠다. 간신히 후진해서 원위치로 돌아간 우리 둘은 당직어른들에게 잡혀 치도곤이 혼난 기억이 크다.
하여튼 덕균이는 조숙한 만큼 우리와는 남달랐다. 주위엔 불량기 있는 친구들이 많이 모였고 요즘 말로 일진에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런 덕균이와 국민학교는 물론 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자주 어울린 탓에 주위에서는 나도 일진의 한 패거리로 인식한 친구들이 많다.
그런 인연이 있던 덕균이는 중학교 3학년 때 폭력사건에 연류 되어 학교를 떠나 소년병으로 입대하여 하사관이 되더니 후에 장교로 임관하여 직업군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눈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자연스레 그와는 거리가 생겼고 인연도 멀어졌다.
세월이 한참 흘러 40년 만에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홍은동 언덕배기집에 찾아가서 한번 만났던 기억이 있고 이따금씩 전화로 안부를 전하다 작년에 또 한 번 만나 회포를 푼 적이 있다.
옛날과 다름없이 뻥도 큰 호탕한 노인이 되어 50년 이상 살던 홍은동 동네 노인대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정리하는 얼마 전에(2013년 6월 24일) 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천국이든 극락이든 편히 영면하길 바란다."
내 친한 친구가 내가
퇴임식날 촬영한 동영상 중에서
그날 연주한 김경남의 <님의 향기>에 맞춰
자신이 부른 노래를 살짝 취입하여 보내왔기에 소개합니다.
녹음상태가 고르지 않고요 ㅎ 그날 눈물이 앞을 가려 얼굴모습이 울상이네. ㅎㅎ
첫댓글 지금도 90세되신 어머님은 내 친구들 얘기가 나오면 덕균이를 제일 먼저 떠올리실 정도로 국민학교 시절엔 우리집서 한식구 마냥 살다싶이 했습니다. 그는 중학교1학년 때 홍은동 언덕에 불록집을 짓고 이사했습니다.그때 우리 친구들이 며칠씩가서 불록벽돌을 찍어 날랐던 기억도 납니다. ㅎ 그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다음편에서는 그와 전차운전했던 얘기와 밴드반에 얽힌 얘기를 학교동기회보에 언젠가 실었기에 그 부분을 정리해서 그 대로 올려 볼가 합니다.ㅎ
선배님의 퇴임식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혼신의 힘으로 연주함으로 뿜어져 나오는 섹소폰 소리가 서글프지만 인생의 한획을 마무리짓는 감회가
참으로 장하십니다.. 짝짝짝
4.19때 학생시위가 한창일때 저는 국민학교 5학년 이었요.
하교길에 학교 근처에서 부터 엉떨결에 동국대생들이 접수한 검은찦차 위에 올려 태워져 집 입구인 침례교회 앞 까지 동행했던 기억이있습니다..
이일을 자랑스레 떠부리다가 아버님께 혼쭐이 나도록 꾸지람도 들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겁없는 소년 혁명가의 일인이 였지요ㅋㅋ
그리고 늦게나마 절친이셨던 먼저 하늘니라로 떠나신 박덕균 선배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ㅢㆍ 맨날청춘 후배님은 그때 같은 언저리에 살았군요 침례교회도 당시는 우뚝 솟아있던 큰 건물 였지요 가끔 들어가서 구제품을 탓던 기억도 납니다 ㅎ 언제 만나면 할 얘기들이 많겠어요ㅡ늘 고맙습니다ㅎ
선배님! 저는 20회 이성웅입니다.. 선배님의 일대기(1회부터) 를 다 읽고 여기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노래때문에ㅎ자라온 세월은 달라도 1.4후퇴에 월남하신 아버님(함경도 북청)과 서울역근처에서 노점상하시던 부모님과 6살때 홍은동 뚝방(본적이서대문구 홍은동 48번지)에서 2살 터울이던 동생들과 필동 3가 62번지 산동네(판자촌)로 이사하면서 일신국민학교(20회) 두동생(22회,24회)과 함께 다녔습니다....그립던 동기들도 6명씩이나 만나보고 어제 포항에 내려 왔읍니다..
저도 6살짜리 손녀와 이곳에서 포스코 은퇴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그리운 그 시절이 선배님덕분에 되살아 납니다..
감사드리며 다음 이야기 기대합니
반갑습니다 후배님~ 우리네와 이북 고향이 같군요ㅎ 아마도 일신학교에 다닌 동문들 중에는 이북출신들이 많을겁니다 모교가 있던 중구가 이북피란민들이 많이 정착했지요 ㅎ 지나고 나면 다그 때가 그립지요 이 글은 이북 북청에서 태어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장면도 있는데 생락됐어요ㅡ 그때 일들를 함께 공유하는 동문들이 제법 있는 걸 알았으면 처음부터 기술할 걸 그랬습니다 ㅎ 포항제철에 일신동기인 신영길이가 정년까지 근무했을텐데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ㅎ암튼 무척 반갑고 댓글까지 달아주시어 감사합니다 ㅎ계속 성원부탁~ ㅎ
선배님~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으셨을 선배님 모습이 선~하네요
전 아기때라 전혀 기억은 없지만
소설로 많이 접했던 얘기들이라
영화처럼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좀 더 빨리 선배님을 뵜으면
박덕균 선배님도 뵐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네요 글구 요번 정모때
선배님을 뵐수 없는건 더 아쉽구요
선배님~ 기상천외한 소년들이
저지른 만행(ㅋㅋ) 또 기대됩니다^^
선배님과 친구분 배짱에 이후배
깜~딱 놀랐답니다ㅎㅎ
안녕~ 우리 45년 해방둥이들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건들 6살때 6.25전쟁 15살에 4.19혁명 16살에 5.16정변 대학시절에 한일국교수립 계엄령 군입대후 월남전 참전 김신조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공비침투 제대후 중동노동자 독일광부 간호원 파견 박대통령서거 12.12 군사반란 광주사태 등등 역사의 한가운데는 아니드라도 보고겪으며 살아온 건 사실입니다 운명이고 팔자지요 ㅎ작년에 쓴 이글을 다시 정리하면서 그시절이 다시 떠올라요ㅡ 먼저간 덕균이 자식도 보고싶네 다음 13편엔 전차만행(?)ㅎ 밴드반생활 버드나무사건(?)을 요약해서 올리고 14편에서 마무리 할까 합니다ㅎ 저도 후배님들과 만남이 불발되어 아쉽기만 합니다ㅎ
데모....!!
어려서는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지만...4.19 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최류탄 냄새....그리고 우왕좌앙하는 사람들...골목길에는 돌에 맞았다고 가마니를 덮어 놓은 시신......
하여간 저도 어려서의 기억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만...선배님 글에서
늘 당시를 그려 볼 수 있는 아련함이 있습니다...
오늘도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선배님...!!
그래요 후배님~ 순수 민주화데모는 4.19가 처음 일겁니다 18회시면 66년도에 졸업하셨네요 그해는 내가 대학 1,2학년때인데 그 때도 데모가 심했지요 6.3사태 한일회담반대 등등 제대하고 복학하니 여전히 유신반대 ^데모데모데모의 연속이이었어요 지금도 데모 파업 농성이 끝이지 않는군요ㅡ그래도 18회와 20회 이후는 데모에 대한 느낌이 다를것 같아요 애독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ㅎ
선배님 오늘 또한분의 독자가 답글을 올리 셨네요.(눈팅만 하시다가)
제가 그시절 데모는 한일수교 반대 데모가 어렴푸시 기억이 납니다.(^&^)
한일수교 반대데모의 주역들은 우리였어요ㅎ나도 동대문 경찰서에 실려가서 하룻밤 자고 열손까락 지문찍고 나왔어요ㅎ그 덕분에 군대가서 좋은보직을 못받고 죽을똥 살똥을 여러번 쌋지요 ㅎㅎ 답글 써주는 분들이 제법되면 동문카페 는 그만치 활성화 되는거지요ㅎ
제거 태여나기전이네요 선배님의섹스폰 불고계시는 모습이 너무 멋지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
오유~쌔까만 후배가 등장하셨네ㅎ 반갑습니다 그래도 지천명의 나이 중반이실 텐데 ㅎㅎ 여기에 등장하는 4.19나 6.25가 3.1운동이나 임진왜란처럼 역사의 한장으로 느껴지실꺼 같해요ㅎㅎ 어쨌든 댓글 달이주시어 다시 감사드립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