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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과상황 |
“너는 많은 것을 보게 될 거야”
레이첼과 사무엘을 배웅하면서, 다니엘(알렉산더 고드노프)은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대도시에 가면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요. 다니엘은 레이첼을 각별히 대하는 아미시 이웃 남성입니다. 다니엘의 이 말은 사무엘에게 복선이었죠.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사무엘은 너무 많은 것을 본, 목격자가 되었으니까요. 이 장면에는 복선이 하나 더 있어요. 이번엔 레이첼을 위한 것인데요. 시아버지가 레이첼에게 한 말입니다. “‘잉글리시’를 조심해라.” 여기서 ‘잉글리시’는 ‘영국인’이든 ‘양키(미국인)’든, 아미시 공동체 바깥 사람들을 말해요. 20세기 한복판에서 17세기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펜실베이니아 아미시 사람들은 미국의 한복판에서 독일어 방언을 사용합니다. 레이첼은 시아버지의 말대로라면 ‘조심해야’ 했을 외부인 존을 공동체에 끌어들여 심지어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겁니다.
존과 레이첼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이첼의 아미시 공동체는 전기와 자동차와 전화 같은 기계 문명, 국가의 개입은 물론 일체의 폭력과 강제, 그리고 경쟁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입니다. 마차를 타고 다니며 검은색 계열의 단정한 옷을 입되 “거만하고 헛된” 장식인 단추 따위는 달지 않습니다. “좋은 농부였어”라고 아미시 사람들은 죽은 레이첼의 남편 제이콥을 추모했죠. 존에게는 아미시 옷을 입혀놓고 “좋아, 평범해”라고 말하며 흐뭇해 합니다. 아미시인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은 그거면 충분한 거였겠지요.
반면, 존이 속한 세계는 폭력이 지배적인 사회입니다. 경찰인 그가 주도하는 종류의 폭력은 특히 정당하고도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세계였어요. 아미시 공동체에 그가 총상을 입은 몸으로 권총을 들고 들어오자, 레이첼의 시아버지는 사무엘에게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옳지 않으며,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평화를 가르칩니다. 후에 존을 사랑하는 건 가족과 공동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거라고 그가 레이첼을 다그치는 장면에서 영화는 폴이 존의 동료인 카터(브렌트 제닝스)를 협박하는 장면을 나란히 붙여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도 아미시와 같아. 우리도 종파야.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법이 있어”라고 했어요. 물론 여기서 그들만의 ‘법’이란, 국가의 법과도 다른 자신들만의 규칙일 겁니다. 레이첼이 아미시의 ‘법’에 균열을 냈다면, 존은 경찰 조직의 규칙에 순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둘 다 위험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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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두 세계, 두 종파의 균열
〈위트니스〉는 결국 ‘최대한 폭력을 피해 온 세계’와 ‘폭력이 불가피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일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사무엘이 살인사건을 ‘보는’ 거지요. 그런데 그보다 앞서 사무엘이 ‘보여지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역에서 사무엘이 만난 시선들이 바로 그것인데요. 양복을 차려입은 꼬마 신사를 사람들은 귀엽다고 쳐다보았어요. 증언을 하러 간 경찰서에서도 사무엘은 ‘신기한 볼거리’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시선은 아미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이기도 했을 겁니다. 마을에는 시도 때도 없이 관광객들이 방문해서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어요. 그들의 비폭력성을 악용해서 조롱하고 놀리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시 마을에 외지인으로 들어간 존은 아미시의 옷을 입은 채 그들을 폭력으로 ‘응징’합니다. ‘잉글리시’(아미시 밖의 사람)들에게 아미시가 낯설고 이상한 것처럼, 아미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권총도 살인도 암투도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그야말로 ‘종파’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존도 우리도 깨달아가게 되는 거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존이 마을 사람들과 섞여 헛간을 짓는 모습은 영화 〈위트니스〉에서 가장 평화롭고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어요. 그것은 소위 ‘문명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무척 낯선 모습일 텐데요. 나무로 골격을 세운 헛간 구조물 위에 다닥다닥 붙어 일을 하고 있는 수십 명의 남자를 멀찍이서 보여줍니다. 흔한 기중기, 포클레인, 트럭 하나 없는 공사현장이라고나 할까요. 그곳에서 함께 땀을 흘리며 나무를 자르고, 함께 나눌 음식을 준비하는 이 사람들의 일은 막 가정을 이룬 부부를 위해 나선 마을 공동체의 수고였습니다. 책임지는 일이 두려워 가정을 이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존에게는 그처럼 낯선 풍경도 없었을 겁니다.
시선이 증인을 낳고 증인은 증인들을 부르고
영화 말미에 사무엘은 다시 ‘목격자’가 될 순간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그가 세상에 나가 보게 된 폭력이 아니라 아미시 공동체에 들어온 외부의 폭력이었어요. 낯설고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사무엘은 이제 숨거나 멀리 도망가는 대신 종을 울립니다. 그것은 마을 공동체 전체를 증인으로 초대하는 일이자, 물리적 폭력에 대한 시선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혹시 폭력과 평화가 함께 갈 수 있다고, 응시와 시선이 폭력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존은 차(문명세계)를 타고 아미시 마을을 떠나죠. 동시에 다니엘은 걸어서(자연) 레이첼의 집으로 오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 레이첼의 집으로부터 난 길 위에 마주쳐 지나가는 두 남자의 모습이 여운으로 남습니다. 같은 길에 있지만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데요. 두 세계는 결국 한 데 섞이지는 못할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비포장도로를 터덜터덜 달리며 존은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폭력과 응징을 당연한 ‘규칙’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