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대교[鷺梁大橋]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과 동작동 사이의 한강 남안을 따라 건설된 다리.
개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원활히 치르기 위하여 한강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행주대교와 올림픽경기장 사이에 한강을 따라 올림픽대로상에 건설한 다리이다. 1987년에 구교가 완공되었고, 1993년에 신교가 추가로 완공되었다. 노량대교는 올림픽대로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을 동서로 횡단하는 교통량이 많으며, 김포국제공항이나 인천국제공항과의 접근성도 향상시켜주기 때문에 차량통행이 매우 많다.
형성 및 변천
1987년 일차적으로 상하행 4차로(10.5m×2열)를 개통하였고, 1993년 상하행선에 각각 신설교량을 준공(폭 11m×2열)하였다. 노량대교는 신교 개통 초기부터 2001년 10월까지 8차로로 이용되었다. 한강대교 남단을 통과하여 강변도로의 대안(對岸)을 잇는 총연장 2,070m, 폭 43m의 장대교량(長大橋梁)으로서, 한강대교 통과구간과 같이 홍수 때에 잠깐 동안 잠기는 720m 구간은 철근콘크리트 라멘교(Rahmen)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그 밖의 1,350m 구간은 PSC 박스거더교(PSC box girder)의 형식을 택하였다. 이 다리의 특징은 연속 PSC 박스거더를 건설할 때 국내 최초로 외국에서 MSS(movable scaffolding system) 공법을 도입하여 공사기간과 공사비를 줄였을 뿐만 아니라, 연속 PSC 박스거더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교량상에 신축이음장치가 적어서 주행하는 차량에 좋은 평탄감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량대교의 건설로 국내에 MSS공법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김포공항과 잠실종합경기장 및 올림픽촌 사이의 교통주행시간을 상당히 단축하였고,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많은 교통량을 흡수하여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중요한 동맥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황
노량대교의 차량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신·구교 사이의 종방향 신축이음부의 보수·보강 공사를 2000년에 시작하여, 2001년 11월부터는 차로가 기존의 4개 차로에서 5개 차로로 확장되어 왕복 10차로의 교량이 되었다. 또한 이수교차로에서 올림픽대로여의도방향으로 진입하는 차선도 2개 차로로 확대되었다. 1·2·3차로는 각각 승용차 및 승합차, 1.5톤 이하 화물차가 통행하고 4·5차로는 모든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올림픽대로여의도방향으로 진행하는 차량의 정체현상이 많이 완화되었다.
참고문헌
서울특별시(http://www.seoul.go.kr)
서울특별시 도시기반시설본부(http://smih.seooul.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노량해전[露梁海戰]
요약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이다.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났고, 이순신도 이때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 소식을 듣고 철군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함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하는 왜군에게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01-18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