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8.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창 18:12~15
*제목;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1.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약속”이란 국어사전적으로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이나 그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약속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두 당사자”입니다. 혼자서 하는 약속은 약속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두 당사자가 있어야 약속은 성립합니다.
둘째는 “약속의 내용”입니다. 내용이 없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셋째는 “신실성”입니다. 지키지 않는 약속은 약속으로서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 가지 중에 사람이 가장 약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실성”입니다. 약속할 당시에는 모두 신실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신실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참 약속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조석지변(朝夕之變)으로 변합니다. 결혼이 그렇고(세월이 속인다?), 사업이 그렇고(돈이 속인다?), 관계가 그렇습니다(상황이 변했다?). 그래서 사람과의 약속은 절대로 신뢰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도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 번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믿을 존재가 아니라, 사랑할 존재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만나십시오. 그러나 믿을 수 있다고 만나면 반드시 쓴맛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 하나님은 진정으로 신실하십니다. 한번 하신 약속은 결코 변개치 않으시고, 보좌를 버려서라도, 아들을 죽여서라도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왜 약속을 하십니까?
인간이 이토록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끊임없이 약속을 하십니까?
그것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반드시 하신 말씀을 지키시기에, 약속의 당사자인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만나시면 약속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셨는데, 인간이 그 약속을 파기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지키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으셔도 지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오래된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신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약속의 방법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수혜자’는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이행자’는 인간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소금 언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하나님의 약속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 성서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복음의 자녀되심을 믿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3. 오늘 본문의 이야기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느 날 집밖을 보다가 나그네 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 18:1~5)
아브라함은 왜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을 이토록 극진해 대접했을까요?
‘3절’에 보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이 분이 하나님임을 알아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보면 “부지중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 13:2’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여기까지 살아왔기에 성경의 정신처럼 모든 사람을 “주께 대하듯”(골 3:23)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을 주께 대하듯 하면, 하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알았든 몰랐든 간에 이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이를 주께 대하듯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지중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입구에서 “양”으로 구별된 자들이 예수님을 먹이고 입히고 했다고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지 모르고 섬긴 것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행하실 일을 알려주십니다. ‘20~21절’입니다.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 18:20~21)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들으시고, 이를 직접 확인하신 후에 벌하시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뜻은 결코 심판에 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들을 구원할 방법을 마련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아브라함은 이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의인10명을 찾으면 이 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을 받아 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에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 10명이 없어서 망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당신을 극진히 대접한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9~12절’입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 18:9~12)
모든 것이 풍족한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지금 바로 임신을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이 말씀을 비웃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이성으로 판단할 때,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노쇠하였고, 자신도 폐경이 된 상태이니 실제적으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아신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14절’입니다.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이성은 오직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세상을 법칙을 만드신 분이며, 이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사라는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알지만 믿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시요,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런 질문조차 어리석지만 그래도 확인해보려 합니다. ‘창 21:2’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1~2)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반드시” 말입니다.
이 시점에서 주님이 하신 약속의 부분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10절’입니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0)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바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 자, 나그네라도 사랑하고 아끼는 자”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도 이렇게 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약속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베푸시는 사람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모든 사람들을 주를 대하듯 섬기는 자"에게 이러한 약속을 베푸십니다. 이런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