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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졸기(卒記)가 기록된 안씨(安氏) 인물들
태조3년(1394) 3월 24일 판문하부사 안종원의 졸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이 졸(卒)하였다. 종원(宗源)의 자(字)는 사청(嗣淸)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아들이다. 젊은 나이에 과거(科擧)에 올라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관직의 임기가 차서 천직(遷職)하게 되었는데, 동료(同僚) 심동로(沈東老)가 나이 많은 이유로써 그에게 사양하여, 그로 하여금 먼저 천직하게 하니 문정공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사양은 덕의 첫째이니 우리 집안이 더욱 번창하겠구나!” 하더니, 그 후 1년 만에 곧 천직(遷職)되었다. 여러 번 옮겨 전법 정랑(典法正郞)이 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경상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신축년에 시어사(侍御史)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양광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매,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여 죽주(竹州)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원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능히 접대하지 못하니, 공민왕이 노하여 그를 목 베고자 하였으나, 임금에 가까이 있는 신하 유숙(柳淑)이 변명하여 구원해 줌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갑진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임명되었으나,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맡으매, 자기에게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밖으로 내보내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삼았는데, 은덕(恩德)을 베푼 정사가 있었으므로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 525) 을 세워 제사지내었다. 신해년에 신돈(辛旽)이 실패되매 일으켜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하고, 좌사의(左司議)와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서 제학(提學)이 되고,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되었으며, 또 대사헌을 겸직하게 되었다. 임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양(柳亮) 등 33인을 뽑았으며, 벼슬이 문하 찬성사 판삼사사(門下贊成事判三司事)까지 이르렀다. 종원은 성품이 자상(慈詳)하고 말이 적었으며, 거처하는 정자(亭子)를 칭호하여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기를 공손하게 하고, 세상의 형편대로 따라 하여 그 몸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일을 감당하는 데 서툴러 이르는 곳마다 한 일이 없었다. 건국 초기에 이르러 임금께서 고려조의 기로(耆老)인 이유로 발탁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을 보내어 빈궁(殯宮)에 제사지내고 장사(葬事)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리었다. 아들 안중온(安仲溫)·안경량(安景良)·안경공(安景恭)은 모두 과거에 올라, 중온과 경량은 벼슬이 중추(中樞)에 이르고, 경공은 개국 공신에 참여하여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안경검(安景儉)은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안종원(安宗源, 1325∼1394)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축(軸)이다. 17세 때 과거에 급제,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輔)되었다. 임기가 차서 승진, 전보될 즈음에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았으므로 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안축은 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인물이 났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1년 뒤에 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공민왕초에 전법정랑이 되었다. 이때 많은 소송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陰竹)으로 옮기니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하여 왕이 접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그 책임을 물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승진되었다. 그무렵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서 참소를 당하여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지냈다. 한거하여 있기를 7∼8년, 신돈이 주살된 뒤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우왕초에 좌사의대부 유순(柳珣)외에 다섯 사람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의 폐단을 논하였으나, 재상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였다가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뒤, 흥녕군(興寧君)에 피봉되었다. 이무렵 공민왕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김현(金玄)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하여, 김현은 회덕현에 유배되었으며, 또한 환관의 수를 10명내로 줄여서 그들에 의하여 국정이 문란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화로 금·은·말 또는 포목들을 밀반출하여 장사를 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년(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되고 다시 공신호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최영(崔瑩)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그를 청렴근직하다고 하여 문하찬성사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뒤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고, 조선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태조3년(1394) 7월 3일 전 지밀직사사 안숙로의 졸기
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안숙로(安叔老)가 졸(卒)하였다. 숙로는 순흥 사람으로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정하고 근신하며, 약간 글을 읽어 사업과 공훈에 뜻이 있었으나 병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있으니 안망지(安望之)와 안경지(安敬之)이다.
안숙로(安叔老, 미상∼1394) 본관은 죽산(竹山). 다른 이름은 안숙로(安淑老)이다. 조부는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 안사경(安社卿)이고, 아버지는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이다. 공양왕(恭讓王) 때 관직이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누이는 공민왕의 비(妃)인 정비(定妃)이다. 1388년(고려 우왕 14)에 그의 딸이 신우(辛禑)의 비인 현비(賢妃)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 벼슬은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냈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에 이르렀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의 자격으로 연왕(燕王: 명 태조의 작은 아들 체(棣))을 방문하였다. 안숙로는 천성이 유순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문(文)의 이치에도 밝았고, 사업과 공훈에도 뜻이 있었다. 병으로 졸하였다. 아들이 두 명 있으니 안망지(安望之)와 안경지(安敬之)이다.
태조 13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4월 29일(을사) 1번째기사 예문춘추관 학사 안경량의 졸기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안경량(安景良)이 졸(卒)하였다. 경량(景良)은 순흥(順興) 사람인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의 둘째 아들이다. 온량(溫良)하고 독실(篤實)하며, 처사(處事)하는 것이 정(精)하고 자세하여 충청도(忠淸道)를 관찰(觀察)하고 서북면(西北面)을 순문(巡問)하였는데, 백성들이 사랑하여 그의 죽음을 듣고 식소(食素)를 행한 자도 있었다. 첩의 아들이 있는데 안민수(安民秀)이다.
안경량(安景良, 미상∼1398)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판문하부사 종원(宗源)의 아들로, 집현전대제학을 지낸 안경공(安景恭)의 형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91년(공양왕 3) 양광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왜구가 남양지방에 쳐들어오니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충청도관찰사·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를 역임하면서 민폐를 시정함에 적극 힘썼고, 백성들을 긍휼히 보살폈다. 그뒤 내직으로 옮겨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가 되었다.
태종10년(1410) 12월 7일 검교 의정부 찬성사 안익의 졸기
검교 의정부 찬성사(檢校議政府贊成事) 안익(安翊)이 졸(卒)하였다. 안익은 젊어서부터 관리의 일[吏事]을 익히고, 마음을 가지는 바가 강직하여, 역임한 여러 고을에서 모두 성적(聲績)이 있었다. 임금이 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안익은 비록 당대(當代)에 쓰인 인물은 아니나, 기구(耆舊)의 공로가 있다.”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빈소(殯所)에 제사하게 하고, 철조(輟朝)하기를 3일동안 하였다.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다.
안익(安翊, 미상∼1410)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공산(公山). 선조가 향리(鄕吏)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이무(吏務)에 밝아, 공민왕 때에는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역임하며, 그 공적이 뛰어났다. 우왕 때에는 밀직부사·문하평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권문세가들에게 이성계(李成桂)를 적극 옹호하여 뒤에 이성계로부터 크게 신임을 얻었다. 1386년(우왕 1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수완을 보이고 돌아왔다. 이어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조선왕조가 창업하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1393년(태조 2) 개국공신이 되었다. 1397년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당시 불편하였던 양국관계를 해소시키는 데 힘쓰고 돌아왔다. 그뒤 의정부찬성사를 역임하였는데, 성품이 강직하여 공무집행에 철저하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태종11년(1411) 11월 13일 전 개성 유후 안원의 졸기
전 개성 유후(開城留後) 안원(安瑗)이 졸(卒)하였다. 안원은 순흥(順興) 사람이고 예전 이름은 정(定)인데, 정당 문학(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의 손자였다. 홍무(洪武) 갑인(甲寅)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사람 됨이 온화하고 누그러지고 부지런하고 근신하고 용의(容儀)가 장엄하고 진중하여, 비록 창졸(倉卒)한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 거색(遽色)이 없었다. 병이 있으매, 자부(子婦)가 기도하기를 청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천명이 있다.’ 하였다.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조회를 3일 동안을 정지하고, 사제(賜祭)하고, 부의로 종이 1백 50권, 촉(燭) 10정(丁)을 주고,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아들은 6인인데, 안종약(安從約)·안종례(安從禮)·안종의(安從義)·안종렴(安從廉)·안종신(安從信)·안종검(安從儉)이다.
안원(安瑗, 1346∼1411)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정(定). 고려말의 유학자 향(珦)의 5대손이며, 정당문학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學衍義》·《통감집람 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개성유후를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위인이 근면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태종17년(1417) 10월 3일 전 형조 판서 안등의 졸기
전 형조 판서(刑曹判書) 안등(安騰)이 졸(卒)하였다. 안등은 죽산(竹山) 사람인데, 정당(政堂) 안극인(安克仁)의 손자이었다. 마음가짐이 질실하고 곧고 일에 임하여 의(義)를 좋아하고 이재(吏才)가 있었다. 지신사(知申事)를 거치어 두 번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가 되었는데, 모두 성적(聲績)이 있었다. 졸(卒)하자,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시호를 정경(貞景)이라 하였으며, 아들이 없었다.
안등(安騰,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1400년(정종 2)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 정4품직, 뒤의 掌令),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었다. 이때 사헌부감찰들간의 싸움에 상관으로서 그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화해하도록 종용한 대사헌 김희선(金希善)과 집의 김자지(金自知)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1407년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서 해안방어의 성실유무를 감찰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파견되었고, 1410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을 거쳐 1415년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의 노모가 상주에 있고 또한 경상도관찰사 이지강(李之剛)의 처부모가 평택에 있었으므로 양자의 관직을 맞바꿔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윤으로 전근되어 돌아와, 경상도 김해근처의 산록에 말을 방목하기 적합한 곳이 있으므로, 주위 7, 8리(里)에 담을 쌓고 양마(良馬)를 기른다면 1만여필을 방축할 수 있음을 건의하여 실시하였다. 1416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세종3년(1421) 1월 10일 흥녕 부원군 안경공의 졸기
흥녕 부원군(興寧府院君) 안경공(安景恭)이 졸(卒)하였다. 경공은 자는 손보(遜甫)이며, 경상도 순흥부(順興府) 사람이었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原)의 아들로 사람됨이 단정하고 근엄하며, 고려의 병진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우리 태조께서 개국할 때에 여러 장상(將相)과 같이 추대하여 좌대언으로 승진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에 책정되었다가 관제(官制)가 시행되면서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承旨)에 임명되고, 사헌부 대사헌에 승진하여 흥녕군(興寧君)을 봉하였고, 공안부(恭安府)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부원군으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경상·전라·황해도의 안찰사가 되어 너그럽고 간명(簡明)하여 까다롭게 굴지 아니하였다. 죽던 해에 나이가 75세이다. 조정 일을 3일간 정지하여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양도(良度)라 하였다. 온순하고 착하고 좋아하고 즐겨하는 것이 양(良)이고, 마음이 능히 의로운 일을 좇는 것이 도(度)이었다. 아들은 안순(安純)이다.
안경공(安景恭, 1347∼1421) 여말선초의 관인.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손보(遜甫). 할아버지는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축(軸)이고, 아버지는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종원(宗源)이다. 1365년(공민왕 14)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산원(散員)·낭장 겸 사헌규정(郞將兼司憲糾正)을 거친 뒤 1376년(우왕 2)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속해서 전리좌랑(典理佐郞)·전법좌랑(典法佐郞)·사헌지평(司憲持平)·예의정랑(禮儀正郞)을 역임하였으며, 1382년에는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으면서 합주(陜州)에서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劍大將軍)·초군장군(抄軍將軍)·산군장군(散軍將軍) 등을 칭하고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判典校寺事知制敎禮儀判書)를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고, 1390년(공양왕 2) 정몽주(鄭夢周) 가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하였다 하여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제학에 보임되고, 1392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좌대언에 올랐다. 이해에 조선건국에 참여하였으며, 곧 중추원도승지에 제수되고 개국공신이 책봉될 때 3등공신이 되었다. 1393년(태조 2)에는 사헌부대사헌 겸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司憲府大司憲兼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에 올랐고, 같은해에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1406년(태종 6)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으며,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정탁(鄭擢)·유창(劉敞)·조견(趙狷)·한상경(韓尙敬)·조온(趙溫) 등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1398년(태조 7)의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의 죄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 집현전대제학(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에 특수(特授)되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진작(進爵)되었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세종3년(1421) 7월 16일 전 개성 유후사 안성이 죽으니 시호를 내리다
전 개성 유후사 유후(留後) 안성(安省)이 졸하니,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종이 70권을 부의로 내리고, 시호를 사간(思簡)이라고 내렸으니, 그전 과실을 뉘우치는 것을 사(思)라 하고, 평이(平易)하여 남을 헐뜯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하였다.
안성(安省, 1344∼1421)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고려 우왕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야박하게 지었다고 태조가 노엽게 여겨 축산(丑山)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세종 6년(1424) 2월 5일 전 관찰사 안망지의 졸기
전 관찰사(觀察使) 안망지(安望之)가 졸(卒)하였다.
안망지(安望之, 미상∼1424) 본관은 죽산(竹山). 조부는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이고, 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안숙로(安叔老)이다. 태종 때 한성소윤(漢城少尹)으로서 민생을 살폈으며, 이후 사헌집의(司憲執義),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안부윤(恭安府尹),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함흥부윤(咸興府尹)을 지냈고, 사후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은 1428년(세종 10)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따님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어 죽성군(竹城君)에 책봉되었고, 1432년(세종 14)에 연창군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에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세종7년(1425) 2월 16일 영돈녕부사로 치사한 안천보의 졸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한 안천보(安天保)가 졸하였다. 천보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순성군(順城君) 안천선(安千善)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비로소 벼슬하여 별장(別將)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군기 윤(軍器尹)·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의덕부 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고,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해면되자 거문고와 서적으로 혼자 소일하였다. 벼슬길이 막힌 지 16년 만인 영락(永樂) 무자년에 태종(太宗)이 불러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에 임명하니, 대개 그의 순진(純眞)함을 가상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지금의〉 우리 중궁(中宮)은 천보의 외손녀(外孫女)로 천보의 집에서 자랐는데, 임금이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태종이 선택하여 배필로 삼은 것이다. 기축년에 천보를 검교 참찬(檢校參贊)에 승진 임명하고 바로 검교 찬성(檢校贊成)으로 다시 승진시켰다. 임금이 즉위하매,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치사하고 영돈녕부사로 옮겼다가 연로함으로 말미암아 치사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나이 87세였다. 마음 가짐이 본래 충직(忠直)하였고, 왕실의 지친(至親)이 됨에 미쳐서는 더욱 근신하여 교만한 빛이 없었다. 병이 위급하매, 아들 안수산(安壽山)이 약을 올리니, 천보가 말하기를,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느냐.” 하고, 소연(翛然)히 죽었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시호를 소의(昭懿)라 하니,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이르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이르렀다. 아들은 수산이었다.
안천보(安天保, 1339∼142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순흥안씨의 시조인 보승별장 자미(子美)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대제학 문개(文凱)이고, 아버지는 순흥군(順興君) 천선(天善)이다.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가 된다. 소헌왕후는 어려서부터 외가인 그의 집에서 자라 왕비가 되었다. 그는 1362년(공민왕 11)에 별장에 이어 전객부령(典客副令)·군기윤(軍器尹)·판사복시사·의덕부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사(判宗簿事)를 역임하였다. 그뒤 공부전서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면직당하고 가야금과 책을 벗삼아 16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1408년(태종 8) 검교한성윤에 등용되었다. 1409년 검교참찬(檢校參贊)이 되고 곧이어 검교찬성(檢校贊成)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치사하고, 뒤에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그는 마음이 충직하였으며 의친(懿親: 소헌왕후의 외조부)이 되어서는 더욱 행실을 삼가고 신중히 하여 교만함이 없었다 한다. 세종이 예관(禮官)을 보내 제문과 제전 20결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세종10년(1428) 5월 14일 의화 궁주 안씨의 졸기
의화 궁주(義和宮主) 안씨(安氏)가 졸하니, 부의로 쌀과 콩 각 1백 석을 하사하였다. 안씨는 즉 고려 공민왕의 정비(定妃)이었다.
정비안씨(定妃安氏, ?∼1428) 고려 공민왕의 비. 본관은 죽주(竹州). 죽성군(竹城君) 극인(克人)의 딸이다. 1366년(공민왕 15)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극인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시중 유탁(柳濯) 등과 더불어 상서하여 마암역(馬巖役: 魯國公主의 影殿을 옮겨 짓는 일)을 중지하도록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났는데, 이때 비도 함께 집으로 보냈다가 얼마 뒤에 소환되었다. 왕이 후사가 없어서 자제위(子弟衛)의 청년들과 관계를 맺게 하여 아들을 얻고자 하였으나 비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1387년(우왕 13) 비를 위하여 부(府)를 세우고 자혜(慈惠)라 칭하였다. 또, 관속을 두어 사무를 보도록 하였다. 이듬해 우왕이 퇴위되고 창왕이 등극할 때 대비의 자격으로 옥새를 넘겨주었다. 창왕 즉위 후 대신(臺臣)들이 비와 혜비(惠妃)·신비(愼妃)는 다같이 정적(正嫡)이 아니므로, 다만 세록(歲祿)만 주기를 청하였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일파는 비의 교(敎)를 받드는 형식으로 공양왕을 세우고, 비를 높여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로 삼고 책문(册文)을 내렸다. 1392년 조선 태조의 즉위 때도 대비자격으로 태조에게 옥새를 넘겨주었다.
세종16년(1434) 8월 20일 판중추원사 안수산의 졸기
판중추원사 안수산(安壽山)이 졸하였다. 수산은 경상도 순흥(順興) 사람이니, 중궁(中宮)의 외삼촌이다. 감찰·지평(持平)으로 여러 번 옮겨 판통례문사에 제수되고, 기해년에 첨총제(僉摠制)에 임명되어 동지돈녕부사에 나아갔으며, 공조·형조의 참판을 거쳐 정미년에 지돈녕부사가 되고, 갑인년에는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수산은 관후근신(寬厚謹愼)하였으나 정처(正妻)를 소박하고 기첩(妓妾)의 사랑에 빠져서 집을 다스리기에 법이 없으니, 시대의 논의가 그르게 여겼다. 죽음에 미쳐 2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관에서 장사를 다스리며, 특별히 후한 치조(致弔)와 치부(致賻)를 행하였다. 시호는 소간(昭簡)이니, 용모와 행동이 공순하고 아름다움이 소(昭)이요, 마음이 평이(平易)하여 남을 훼방하지 아니함이 간(簡)이다. 아들이 하나이니, 안구경(安九經)이다. 중궁이 외조부 천보(天保)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산이 가장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수산이 종기(瘇氣)가 나서 장차 죽게 될 때에, 양전(兩殿)이 연달아 중관(中官)을 보내어 문병함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고, 위하여 품계를 올리고 특이한 은총을 더하였다. 의원 박거(朴居)는 종기에 뜸질을 잘못한 까닭으로 사는 고향에 안치(安置)되었다.
세16년(1434) 10월 18일 죽은 판중추원사 안수산에게 치제하다
죽은 판중추원사 안수산(安壽山)에게 치제(致祭)하였으니, 그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이수(理數)의 떳떳함을 피하기 어렵고, 은혜와 의리가 겸하여 융성하였으니 어찌 애영(哀榮)의 예전(禮典)을 거행하지 않으리오. 오직 경(卿)은 타고난 바탕이 온후하고, 기국(器局)과 도량이 너그럽고 컸도다. 청렴하고 조용하여 부화(浮華)함이 없으며, 겸양하고 공손하여 지킴이 있었도다. 명문의 빛나는 자손으로 척리(戚里)의 의표(儀表)가 되었도다. 맑고 빛나는 벼슬을 역임하여 중외(中外)에 공로를 나타내었도다. 예(禮)를 합문(閤門)에서 도와 주선(周旋)함이 절도에 맞았고, 형벌을 추부(秋部)에서 맡아 결송(決訟)이 원통함이 없었도다. 근년 이래로 한가한 벼슬에 있게 하여 편안히 섭양(攝養)하기를 바라, 길이 수고(壽考, 오래 삶)하여 함께 편안하고 영화함을 누리려 하였도다. 화기(和氣)를 잃었다는 말을 듣고 의원을 보내어 조섭하고 치료하게 하여, 약물의 효력에 의지하여 원기(元氣)의 화(和)함을 회복하기 바랐더니, 어찌하여 부음(訃音)이 갑자기 들리어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가. 곧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시호(諡號)를 내리어 이름을 바꾸게 하고, 또 예관(禮官)을 명하여 박전(薄奠)을 베풀게 하노라. 슬프다. 인친(姻親)이 이미 갔으니 구덕(舊德)을 잊기 어려운 것이 슬프고, 애휼(哀恤)의 은전(恩典)을 이에 더하니 영령(英靈)의 어둡지 않음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안수산(安壽山, 미상∼143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인 천보(天保)의 아들이다. 왕후가 처음에 외조부의 집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외숙부인 그는 왕후로부터 깊은 총애를 받았다. 공조참판·형조참판·지돈령부사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성품이 관후근신(寬厚謹愼)하였으나 정처(正妻)를 멀리하고 애기(愛妓)를 깊이 사랑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법도가 없었다고 한다. 1462년에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으로 추록되었다. 시호는 소간(昭簡)이다.
세종22년(1440) 11월 28일 판중추원사 안순의 졸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한 안순(安純)이 졸(卒)하였다. 순(純)의 자(字)는 현지(顯之)요, 안경공(安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좌습유(司諫院左拾遺)에 등용되고, 무인년 가을에 사헌 잡단(司憲雜端)에 배수되었다. 이때에 조박(趙璞)이 대사헌이 되었는데, 어느날 궁녀가 죄가 있어 임금이 직접 조박에게 명하여 죽이게 하니, 조박이 안순에게 고하였다. 안순이 말하기를, ‘헌부(憲府)는 법을 잡고 있는 사(司)이요, 사람을 형벌하는 관청은 아닙니다. 또 그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조박이 말하기를, ‘성상의 어명이오’ 하매, 안순이 말하기를,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알지 못하고 극형에 두는 것은 의(義)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마땅히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히십시오.’ 하니, 조박이 노하여 안순의 말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임금도 옳게 여겨 형조에 내려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특별히 승정원의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배수되었다가 예에 따라 우대언(右代言)에 옮겼고, 이조 우참의(吏曹右參議)에 제수되었다. 기축년 가을에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고, 가을에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다. 신묘년에 동지총제에 배수되고 기해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발탁되었고, 계묘년에 아버지의 상[父憂]을 만났었다. 이때에 함길도에 굶주린 백성이 많이 떠돌아다니었으므로, 기복 출사(起復出仕)시켜 본도의 관찰사가 되었다가, 들어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갑진년에 호조 판서로 옮겼다가 경술년 겨울에 특별히 숭정(崇政)을 더하고 본직(本職)에 그대로 있었다. 임자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되고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하였다. 을묘년에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옮기고, 병진년 여름에 임기가 차서 하직하니 판중추원사로 옮겼다. 이 해에 충청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어 죽게 되자, 특별히 명하여 안순을 도순문 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삼았는데, 다방면으로 잘 수습하여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그대로 본직에 두었다. 안순은 참찬(參贊)으로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판호조사를 겸하였고, 전곡(錢穀)을 관장하였으며, 의금부 제조(提調)로 전후하여 8년이나 있었다. 일찍이 자손에게 말하기를, “대저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은데, 나의 죽음으로 산 사람을 근심시키지는 않겠다. 그러니 선영(先塋)의 근처에 나아가 죽음으로서 상사(喪事)의 폐단을 덜고자 한다.” 하고, 드디어 금천(衿川)의 별서(別墅)로 이사하였다. 병이 걸렸을 때부터 임금이 연달아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묻게 하고, 음식물과 의약(醫藥)의 하사가 답지(遝至)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0이었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이를 슬퍼하여 2일간 조회를 정지하게 하고, 치조(致弔)와 치부(致賻)하며, 시호(諡號)를 정숙(靖肅)이라 하니, 몸을 공순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이 정(靖)이요, 마음을 잡아 결단함이 숙(肅)이다. 예(禮)로써 장사를 지냈다. 안순은 사람의 기한(飢寒)과 질병(疾病)·상사(喪事)를 보게 되면 반드시 주급(周急)하여 주고, 관부(官府)에 처할 때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들로는 안숭직(安崇直)·안숭선(安崇善)·안숭신(安崇信)·안숭효(安崇孝)가 있었다.
안순(安純, 1371∼144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현지(顯之). 증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한 축(軸), 할아버지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역임한 종원(宗源), 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경공(景恭)이며, 어머니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이고, 부인은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이다. 1380년(우왕 6)에 10세의 나이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음보되었으며, 1383년 진사시에, 138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성균학유가 되었으며, 1392년(태조 1)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사재주부(司宰注簿)로 발탁되었다. 1393년에 사헌감찰, 이듬해에는 좌습유 겸지제교(左拾遺兼知製敎)로 승진하였다. 1396년에 김해판관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1397년에 예조좌랑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으로서 중앙관에 복귀되었다. 1398년 여름에 강원도도사가 되었다가 이해 가을에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다시 중앙에 복귀되었다. 그가 사헌잡단으로 재직하던 때에 궁녀 한명이 죄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태조는 당시 대사헌이던 조박(趙璞)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박은 안순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박은 명령대로 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으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니 우선 유사(有司)에 명하여 먼저 심문부터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러한 일화가 암시하듯이 그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1401년(태종 1) 병조정랑 겸형조도관, 1403년 겸사평부경력(兼司平府經歷)·사헌부장령을 거쳐, 1407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고, 1409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경상도관찰사, 1411년 좌군총제(左軍摠制)·집현전제학, 1414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19년(세종 1) 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420년에는 공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423년 함길도도관찰사에 이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호조판서가 되었고, 1432년에 판중추원사 겸판호조사(判中樞院事兼判戶曹事), 1435년에 의정부찬성사, 1437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로 임명되어 그 임무를 잘 수습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호조판서 또는 판호조사를 겸하면서 국가의 전곡(錢穀)을 관장하였는데, 그 경비출납의 제문제가 추호도 틀림 없이 정확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수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특히 국가의 재정을 책임맡은 직에서 가장 공로를 쌓았던 것이다. 1439년에 신병으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은퇴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죽었다. 저술로는 《근재집 謹齋集》 부록에 유고가 실려 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세종26년(1444) 11월 24일 삼한 국대부인 안씨가 졸하니 중궁의 친상에 대해 의논하게 하다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안씨(安氏)가 졸(卒)하니, 의정부·육조·중추원·승정원에서 조위(弔慰)하였다. 영의정 황희·우의정 신개·좌찬성 하연·우찬성 황보인·좌참찬 권제·우참찬 이숙치·예조 판서 김종서·도승지 이승손·우승지 유의손(柳義孫)·첨지중추원사 변효문(卞孝文) 등을 명하여 중궁(中宮)의 친상에 거둥한 일과 성복(成服)할 일에 관한 의식(儀式)들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고, 이어서 염습(斂襲)에 관한 제구(諸具)를 전부 관(官)에서 갖추어 공급하도록 명하고, 또 부의(賻儀)로 쌀과 콩 각각 1백 석, 종이 2백 권, 흰 무명 10필, 흰 모시 10필, 굵은 삼베[麤布] 1백 필을 주었다.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조선 제4대왕 세종의 비. 성은 심씨(沈氏). 본관은 청송(靑松).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며, 어머니는 영돈령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 도(祹)와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이듬해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해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그러나 1432년(세종 14)에 중궁(中宮)에게 미칭(美稱)을 올리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여 1432년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청(泟)이 군국대사를 상왕(上王: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일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되었다. 1446년에 52세로 죽자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다. 《영릉지 英陵誌》를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제술하였다. 휘호는 선인제성(宣仁齊聖), 시호는 소헌(昭憲)이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 출처 : 청송심씨부사공파종회 http://cafe.daum.net/busagongfa/Q1Ar/19
안효공(安孝公)의 배위(配位)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서 소의공(昭懿公:이름은 安天保이며 領敦寧府事를 역임)의 따님이시다. 조부(祖父)인 순성군(順城君)양정공(良定公:이름은 安千善)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증조부(曾祖父)인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문의공(文懿公:이름은 安文凱)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분으로서 고려말엽의 명문대가였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께서는 안효공(安孝公)과 결혼하시어 삼남육여(三男六女)를 낳아 기르셨는데 맏따님(후의 소헌왕후)이 1408년(太宗8年 戊子) 2월16일 충녕대군(忠寧大君:후의 세종대왕)에게 출가하시자 순흥군부인(順興郡夫人)의 직첩을 받으셨다. 1418년(태종18년 戊戌)8월8일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卽位)하자 안효공께서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의 봉호를 받으시고,순흥군부인께서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職牒)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해 안효공께서 무술옥사(戊戌獄事)에 연루되시어 억울하게도 화를 입게 되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께서는 직첩을 삭탈당하시고 천안(賤案)에 등록되시어 천민(賤民)으로서 나이어린 자녀들과 함께 허다한 수모를 겪으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안(天安)고을의 관비(官婢)로 되셨다가 의정부(議政府)다모(茶母)로 옮겨졌는데 사실상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8년후인 1426년(世宗8年 丙午)에 우의정(右議政)이직(李稷)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왕비의 어머니가 천안(賤案)에 올라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니 직첩(職牒)을 돌려드려야 옳다.」고 상계(上啓:왕에게 건의하는 일)하였다. 이때 세종대왕께서는 「돌아가신 상왕께서도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며 도승지(都承旨)곽존중(郭存中)에게 영(令)을 내려 그해 5월17일에 면천(免賤)되는 동시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을 돌려 받으시어 명예를 회복 하셨다. 또한 세종대왕의 배려로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친정에 가셔서 8년만에 모녀간의 눈물겨운 상봉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삼한국대부인께서 궁중에 자유로이 출입하며 소헌왕후와 자주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었다. 1444년(世宗26年 甲子) 삼한국대부인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소헌왕후께서는 문병(問病)하시고 전의(典醫:궁중의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케하고, 한편으로는 승려(僧侶)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도록 하는등 지극한 효성(孝誠)을 다하였다고 전한다. 그러함에도 삼한국대부인께서는 그해 11월24일에 별세하셨는데 이때에도 소헌왕후께서는 왕세자(王世子)들과 함께 거동하시어 치제(治祭) 하셨으며, 조정에서는 예조판서(禮曹判書)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예장도감(禮葬都監)으로 임명하여 다음해 2월28일에 水原市 二儀洞 산의실의 안효공 묘역에 예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삼한국대부인께서는 44세에 세상을 뜨신 안효공보다 26년을 더 오래 사셨으니 70세이상 장수 하신 것으로 판단할수 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467년(世祖13年 丁亥)5월3일에 세조의 왕명에 의해 삼한국대부인의 묘소는 산의실에서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安城郡 金光面 五興里)능말에 천장(遷葬)모시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성의 삼한국대부인 묘소는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로 지정되어 관청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안효공종회(安孝公 宗會)주관아래 1988년에 현대식 건물로 재실(齋室)경모재(敬慕齋)를 건립하였고, 1992년에는 둘레석을 설치하고 사초를 드리며 묘역주변을 석축하고 성묘로(省墓路)를 단장하는등 대대적인 묘역정화 공사를 완성하였다. 매년 묘제(墓祭)는 음 3월14일과 9월14일에 후손들이 모여 절사(節祀)를 받들고, 기제(忌祭)는 음 11월24일에 산의실의 사당에서 봉행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른 세조(世祖)의 영(令)에 의해 매년 한식과 추석에 조정에서 향(香)과 축문(祝文)이 내려지고 안성군수(安城郡守)로 하여금 관청에서 마련한 제물로 제향을 받들도록 한 제도가 지켜져 왔었다.
세종17년(1435) 3월 20일 전 도승지 안숭선의 어머니에게 종이와 관곽을 부의로 하사하다
전 도승지 안숭선(安崇善)의 어머니에게 종이 1백 권과 관곽(棺槨)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
문종2년(1452) 4월 14일 좌참찬 안숭선의 졸기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졸(卒)하였다. 안숭선의 자(字)는 중지(仲止)이니, 고려(高麗)의 찬성사(贊成事)인 안축(安軸)의 5세손(五世孫)이다. 집안이 대대로 귀현(貴顯)하여 거실(巨室)이 되었는데, 안숭선은 본디부터 매우 총명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훨씬 뛰어났다. 처음에 문음(門蔭)으로써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경자년(1420)에 문과 장원(文科壯元)에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일을 당하면 빨리 처리하는 것이 손바람이 날 정도였다.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전직(轉職)되어 이간(吏幹)으로써 한 시대에 이름이 나타났다. 사헌부 장령(掌令)에 발탁되었으나 나라 일에 관한 말을 했던 이유로써 좌천(左遷)되었다. 여러 번 승진되어 집의(執義)에 이르렀으나, 또 나라 일에 관한 말을 했던 이유로써 파직(罷職)되었다. 세종(世宗)께서 공녕군(恭寧君)을 보내어 북경(北京)에 조회할 때에 안숭선으로써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었다.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마침내 지신사(知申事)로 발탁되어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함이 공명(公明)하고 진실하였다. 매우 총우(寵遇)를 받아서 여러 번 밀지(密旨)를 받았으나 동료(同僚)들은 참여해 듣지 못하였다. 또 요우(僚友)들을 속박하여 억제하고,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한 데에 결점이 있었으므로 동렬(同列)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였다. 계축년(1443)에 북방을 정벌한 적에 조정의 의논이 어떤 이는 옳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르다고 하니, 세종(世宗)께서 뜻을 결정하지 못하여 계획을 안숭선에게 물으니, 안숭선이 대답하기를, “개주(介胄)의 무사(武士)는 정벌하기를 말하고 진신(縉紳)의 유자(儒者)는 화친(和親)하기를 말하고 있지마는, 신(臣)의 헤아린 바로써는 이만주(李滿住)는 죄악이 매우 크니 역적을 치는 군대[問罪之師]는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세종(世宗)께서 뜻을 결정하여 이를 정벌하였는데, 그 군법(軍法)과 정모(征謀)는 모두 그로 하여금 주간(主幹)하도록 하였다. 김예몽(金禮蒙)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말을 듣고는 물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의 은우(恩遇)를 입고서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였다. 어미 상(喪)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벗고 나니,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옮겨졌으며,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로 전직(轉職)되고, 여러 번 전직(轉職)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평안도(平安道)에서 백성이 굶주리니 안숭선을 천거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삼았는데, 임지(任地)에 간지 두서너 달 만에 병으로써 사직(辭職)하였다. 조금 후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임명되었는데, 이종원(李宗元)의 사건이 일어나서 고성현(固城縣)으로 귀양갔으나, 스스로 사실이 없었으므로 슬퍼하고 통분하여 병이 되니, 세종(世宗)께서 그가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서 직산(稷山)으로 양이(量移)했다가 조금 후에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임금께서 즉위(卽位)하시니 중추원 사(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가 조금 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발탁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사무와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무하게 하였다. 전일에 사람을 임용한 것이 잘못된 일로써 글을 올려 굳이 사양했으나, 임금은 이종원(李宗元)의 사건이 고의(故意)로 범한 것이 아니라 하여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했다. 중죄(重罪)를 얻은 후로는 일에 임하여 두려워함이 많았으며 또 병으로써 항상 집에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불사(佛事)를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르게 유명(遺命)하였다. 조정과 민간에서 그의 사람된 품을 애석하게 여겼다. 안숭선은 지조와 절개가 있으며, 총명하고 예민하여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시비(是非)를 판단함이 흐르는 물처럼 신속히 처리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名聲)이 있었다. 남이 재간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사랑하여 마지 않았으며, 사람된 품이 단정하고 아담(雅澹)하며 온화하고 엄숙하니 사람들이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과단성이 지나쳐서 좋아하고 미워함이 치우침이 있게 되어 그에게 붙좇는 사람은 반드시 비호(庇護)하려고 하여 추천 발탁함이 여가가 없을 정도였는데, 이런 일로써 마침내 이종원(李宗元)의 화(禍)를 취하게 되었다. 집이 넉넉하여 음식을 매우 정교(精巧)하게 만들므로, 관직에 있을 적엔 비록 성찬(盛饌)이라도 잘 먹지 못하였다.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마음을 집중(集中)시켜 결단하는 것이 숙(肅)이다. 두 아들은 안훈(安訓)과 안의(安誼)이다.
안숭선(安崇善, 1392∼145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고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서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한 축(軸), 증조부는 판문하부사를 역임한 종원(宗源), 할아버지는 선의 개국공신에 오른 경공(景恭), 아버지는 판중추원사를 지낸 순(純)이다. 부인은 송씨(宋氏)로 판전농시사 천우(千祐)의 딸이다. 그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5년에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에는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년(세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조전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426년 장령이 되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수차에 걸쳐 탄핵하였는데 그가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으며 곧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고, 1429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여 함녕군(諴寧君) 인(裀: 세종의 동생으로 처음 받은 봉군호는 景寧君)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사행은 명나라가 요구한 금은(金銀)의 양이 과다하여 이를 감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에 귀국하자 그는 곧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었고, 1433년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그뒤 1437년 3월 대사헌으로 승진될 때까지 승지로 있었다. 1433년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 이로 인하여 세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뒤 그는 조정의 인사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사관의 평에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맹사성(孟思誠)은 착하기는 하지만 결단성이 없고 이조판서 신개(申槩)는 그저 남의 의견을 따르기만 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사행정을 안숭선이 좌우하였다.”고 한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하여주고 있다. 이와같이 승지의 법제외적 권한이 인사행정에 크게 작용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히 안숭선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나아가 승지의 인사행정과 관계되는 업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결국 1437년 3월에 안숭선은 대사헌으로 전보되고, 5개월 후에는 승지들의 전주권(銓注權)을 크게 제약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1443년에 형조판서, 1444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집현전대제학, 1445년에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에는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이때 정실인사가 문제되어 진천현에 부처되었다가 풀려나왔다. 1450년(문종 즉위)에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근재집 謹齋集》에 부록으로 유고가 전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세조6년(1460) 3월 11일 졸한 충청도 관찰사 안숭효에게 부의하다
졸(卒)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안숭효(安崇孝)에게 쌀·콩 아울러 30석(石)과 종이 60권(卷)을 부의(賻儀)하고, 아울러 관곽(棺槨)을 하사(下賜)하였다.
안숭효(安崇孝, 미상∼146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충(季忠), 호는 한백당(寒栢堂). 판중추원사를 지낸 순(純)의 아들이며, 좌참찬 숭선(崇善)의 동생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호조참의를 지내고, 1454년(단종 2)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덕녕부윤(德寧府尹)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집권에 협조하여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대사헌에 제수되어 관기의 확립에 힘쓰고, 이어서 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을 지내면서 행정실무를 주관하였다. 그뒤 중추원부사로서 한직에 머물러 있었는데, 충청도지역에 재변이 심각하여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 요청되자 이에 선발되어 1459년(세조 5) 동지중추원사 겸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유망민에 대한 진휼사업을 폄으로써 그 효과가 컸으나, 이듬해 과로로 임지에서 죽었다. 성실하여 행정실무에 빈틈이 없었고, 민정에 관심이 많았다. 세조8년(1462) 12월 25일 연창위 안맹담이 죽자 2일간 철조하고 시호를 양효(良孝)라 하다. 그의 졸기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이 졸(卒)하니, 이틀을 철조(輟朝)하고 쌀·콩 아울러 90석, 정포(正布) 70필, 종이 2백 권을 부의(傅儀)하였다. 시호(諡號)는 양효(良孝)라 하였으니, 온량(溫良)하고 즐기기를 좋아한 것을 양(良)이라 하고 자혜(慈惠)하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긴 것을 효(孝)라 한다. 안맹담은 세종(世宗)의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어 죽성군(竹城君)으로 봉하였고 뒤에 연창군(延昌君)으로 고쳤다. 술을 좋아하여 병이 되어 조알(朝謁)을 끊었다. 세종조(世宗朝)에 일찍이 음객(飮客)을 불러서, ‘연창군이 누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기를 숭상하느냐?’ 하고 물으니, 음객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 가지 아니하였다.
안맹담(安孟聃, 1415∼1462) 조선 전기의 사인.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 조부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里使)와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낸 봉익대부(奉翊大夫) 안숙로(安淑老)이고, 아버지는 함길도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使)와 함흥부윤(咸興府尹)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안망지(安望之)이다. 어머니는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허지신(虛之信)의 딸이다. 1428년(세종 10)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432년(세종 14)에는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444년(세종 26) 다시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성록대부(成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1457년(세조 3) 수록대부(綬祿大夫)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8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부친 안망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의 봉호를 받았다. 초서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였다. 약물(藥物)에도 해박하였고, 불법(佛法)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듬해 2월 25일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세조10년(1464) 8월 4일 영중추원사 안지의 졸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使) 안지(安止)가 졸(卒)하였다. 안지의 자(字)는 자행(子行)이고, 전라도(全羅道) 탐진(耽津) 사람이다. 문과(文科)에 제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겼다. 《고려사(高麗史)》사건으로 고신(告身)을 수탈(收奪)당하였다가 경태(景泰) 6년(1455)에 소환(召還)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으로 되었다. 남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는데, 글을 널리 많이 본 것은 문(文)이라하고, 온유(溫柔) 강직(剛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은 ‘정(靖)’이라 한다. 안지는 충후(忠厚)하고 문장을 읽어서 잘 짓고 해서(楷書)에 능하였는데, 무릇 시(詩)를 지을 때 이어(俚語)를 섞어서 붓을 잡으면 이루어졌고, 편간 척독(片簡尺牘)에 모두 시(詩)로써 뜻을 나타냈다. 마음가짐이 유연(悠然)하여 세정(世情)에 얽매이지 않았고, 집이 매우 가난하고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스스로 ‘고은(皐隱)’이라 불렀다. 임금이 즉위하여 불러서 벼슬을 주었는데, 그때 안지의 나이가 80세였으나, 기력(氣力)이 강건(强健)하니, 임금이 기뻐서 시(詩)를 지어서 내려 주었다. 안지가 평생 남의 선(善)한 것을 칭찬하고, 오로지 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안지는 본래 아들이 없었는데, 80세 이후에 첩(妾)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어서 시부(詩賦)의 절구(絶句)에다 절사(絶嗣)를 잇게 할 뜻을 보이었으므로, 안지가 졸(卒)하자 제주관(題主官, 신주(神主)에 글을 쓰는 관리) 유문통(柳文通)이 장차 봉사자(奉祀子)로 쓰려 하니, 적출(嫡出)의 사위 황맹수(黃孟粹)가 그 아이는 장인[婦翁]의 소출(所出)이 아니라고 하여 가로막았다. 안지의 시(詩)를 외우는 자가 있어서 황맹수의 말이 막히니, 유문통이 마침내 이를 썼다.
안지(安止, 1377∼146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탐진(耽津: 康津).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 찬성 사종(士宗)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중시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세조 즉위)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가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한 뒤 그를 불러 관작을 주니, 그때 그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을 때 속된 말을 섞어서 빨리 잘 짓고, 짧은 서간에까지도 거의 시로 말뜻을 이끌어갔다. 그는 또 해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을 베꼈다. 뒤에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세조14년(1468) 6월 17일 숙선 옹주 안씨의 졸기
숙선 옹주(淑善翁主) 안씨(安氏)가 졸(卒)하였다.
선빈안씨(善嬪安氏, 미상∼1468)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검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안의(安義)의 딸이다. 1421년(세종 3)에 숙선옹주(淑善翁主)로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와 소숙옹주(昭淑翁主), 경신옹주(敬愼翁主)가 있다. 경신옹주(敬愼翁主)가 노비(奴婢) 문제로 인해서 어머니인 숙선옹주와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묘는 양주(楊州)에 있다.
성종9년(1478) 10월 18일 지중추부사 안빈세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仲樞府事) 안빈세(安貧世)가 졸(卒)하였다. 안빈세의 자(字)는 낙도(樂道)이고, 본관이 죽산현(竹山縣)인데,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므로 세조(世祖)가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제수하여 승정원(承政院)의 공사(公事)를 출납(出納)하게 하였는데, 자못 뜻에 맞아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공조 참판(工曹參判)·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서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에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며, 나이는 34세이다. 시호(諡號)는 이평(夷平)인데, 마음을 편히 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것이 이(夷)이고, 다스리는 데에 허물이 없는 것이 평(平)이다. 사람됨이 부유[紈綺]한 집에서 생장하였으면서도 호사(豪奢)하는 버릇이 없었다.
안빈세(安貧世, 1445∼1478)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낙도(樂道). 조부는 관찰사(觀察使) 안망지(安望之)이고, 아버지는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이고, 어머니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차녀(次女) 정의공주(貞懿公主)이다. 성품이 총명하여 세조(世祖)가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제수하여 승정원(承政院)의 공사(公事)를 출납(出納)하게 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었는데, 어머니 정의공주의 병이 위급하여, 7계급을 뛰어 올려 제수한 것이다. 이후 1467년(세조 13)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도 공주가 병이 있었고 승지의 임무가 매우 바빴기 때문에 특별히 그 직(職)을 올린 것이었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仲樞府事)에 올라 졸(卒)하였으며, 나이 34세였다. 시호(諡號)는 이평(夷平)으로, 마음을 편히 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것이 이(夷)이고, 다스리는 데에 허물이 없는 것이 평(平)이다. 사람됨이 부유[紈綺]한 집에서 생장하였으면서도 호사(豪奢)하는 버릇이 없었다고 전한다.
성종10년(1479) 1월 29일 공산군 안경손의 졸기
공산군(公山君) 안경손(安慶孫)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의례와 같이 하였다. 안경손은 안산인(安山人)이다. 정통(正統) 정사년(1437) 에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가 경태(景泰) 계유년(1453) 에 세조(世祖)가 정난(靖難)할 때 안경손이 참여한 공(功)이 있으므로, 추충 정난 공신(推忠靖難功臣)의 호를 주어 내자시 윤(內資寺尹)에 승직시켰다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전직(轉職)되었다. 천순(天順) 계미년(1463)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공산군(公山君)에 오르고, 성화(成化) 을유년(1465)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으며, 임진년(1472)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공산군(公山君)에 올랐다가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5세이다. 시호[諡]를 양이(襄夷)라 하니, 일로 인하여 공(功)이 있음이 양(襄)이요, 마음을 편히 하고 고요함을 좋아함이 이(夷)이다. 안경손은 글자를 알지 못하고 기능(技能)이 없으며, 오직 술마시기만 즐겨하였다. 일찍이 홍윤성(洪允成)에게 아첨하여 섬기기를 종[奴]과 같이 하였다.
안경손(安慶孫, 1416∼1479)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안산(安山).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1437년(세종 19)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을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 3등에 책정되었다. 이어 내자시윤(內資寺尹)·삼군진무(三軍鎭撫)·대호군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었다. 1463년(세조 9)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고,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다. 이해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5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1472년(성종 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글자도 알지 못하고 기능도 없었으며 다만 술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홍윤성(洪允成)을 잘 섬겨서 관직을 유지하였다. 시호는 양이(襄夷)이다.
성종13년(1482) 11월 13일 강희맹의 아내 안씨에게 부의를 보내다
명하여 강희맹(姜希孟)의 아내 안씨(安氏)에게 쌀 10석, 누런 콩 5석, 정포(正布) 10필, 종이 80권, 유둔(油芚) 2, 송지(松脂) 3두와 관곽(棺槨)을 부의(賻儀)하였는데, 원자(元子)가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세종의 후궁 영빈강씨(令嬪姜氏)의 오빠 강희맹(姜希孟)은 안숭효(安崇孝)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와 혼인하게 되는데,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어려서 자주 피접을 나간 인연이 있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안씨(安氏) 출처 : http://cafe.naver.com/iahn/387
본관은 순흥(順興). 안숭효(安崇孝)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안씨(安氏)는 진양강씨(晋陽姜氏)인 강희맹(姜希孟)과 혼인(婚姻)하였는데 강희맹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고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로 서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다. 성종(成宗)은 호가 사숙재(私淑齋)인 공의 글을 모아 문집(사숙재집)을 발간하도록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였으며 그 문집에 여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여사(女師)로 불리었던 정경부인에 대한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 성종 8년 정유(丁酉, 1477)겨울에 원자(연산군)의 몸에 병이 들었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청하여 대신(大臣)의 집에서 요양하게하고 몇 집을 골라 아뢰니, 임금은 부인의 집에서(당시 이조판서 강희맹의 집 : 남대문 밖)요양하도록 명하였다. 부인(순흥안씨. 順興安氏)은 춥고 더운 것을 잘 조절하고 때를 맞추어 젖을 먹이게 하니 얼마 안되어(10여일) 건강해졌으며 부인은 매일 저녁 늦게까지 옷을 벗지 않고 우는 소리가 들리면 조용히 창밖에 가서 듣고 울음이 그쳐야 거처로 돌아 왔다. 성종대왕께서는(성종 9년 1478) 왕세자 양육의 공으로 말 한필을 하사(下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원자(元子)인 연산군이 어릴 때(4∼5세) 툭 하면 병이 나서 그때 마다 부인 댁(夫人宅)으로 피접(避接)을 나와 있었는데 어느 날은 노비(奴婢)가 울면서 달려와 하는 말이 “실꾸리를 삼켜 기도(氣道)가 막혀 숨을 못 쉰다고 했다.” 이에 부인께서 “아기를 눕히면 삼킨 실꾸리가 더 깊이 들어 강 것이니 아이를 일으키라”하고서 연산군의 발을 잡고 거꾸로 세워 어린 아이의 엉덩이를 힘껏 갈겼다. 이에 어린 아이는 너무도 아파 ‘으악’하고 울면서 실꾸리를 토해 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지(機智)는 솔로몬왕의 지혜(知慧)보다 더 훌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인 댁의 정원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어 연산군이 그 밑에서 자주 놀았으며 임금이 된 후에는 안씨 부인의 공(功)과 덕(德)을 흠모해 집안에 있는 소나무에 대부송[大夫松:정삼품(正三品)의 당상 품작]이란 작위를 내렸고 그 소나무가 금띠솔(금줄을 둘러주었다 하므로)로 불리어 졌다 한다. 슬하에는 6남5녀를 두었는데 우의정(右議政) 강귀손(姜龜孫) 같은 큰 인물을 길러 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강씨 집안에서는 가장 우러러 받드는 할머니로 추앙(推仰)받고 있다. 강희맹(姜希孟)이 52세 때인 성종 4년(1475)에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장인 안숭효(安崇孝)가 준 약 1만㎡의 땅에 별장을 짓고 금양(조선시대 시흥의 행정지명: 장인의 집 근처)에 와서 지내면서 『금양잡록』이라는 사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대한 필요사항을 기술한 중요한 농서(農書)를 썼다. 금양(현 시흥4동)에 있던 땅은 안숭효의 조부인 조선 개국공신 양도공 안경공(安景公)이 임금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사패지지(賜牌之地:70만평)의 일부이다.
성종23년(1492) 8월 20일 예빈시 부정 안팽명의 졸기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안팽명(安彭命)이 졸(卒)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안팽명은 강직하고 청렴하여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여겼고, 강개(慷慨)한 성격으로 과감하게 말하여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금년 정월(正月) 초하루에 원수진 집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길에 버렸는데, 몸체와 머리를 따로 버리게 하고 그 배에다 ‘안팽명(安彭命)의 시신(屍身)이다.’라고 썼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하였다.
안팽명(安彭命, 1447∼149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보(德甫).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 안성(安省)의 손자이고, 사헌부감찰 안종생(安從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뒤 1471년(성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5년에 예문관봉교를 거쳐 1488년 사헌부장령, 1490년 집의, 1491년에 사간원사간을 역임하며 주로 대성(臺省)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1492년 8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이 되어 왕명으로 평해(平海)에 다녀오다가 강릉에서 일생을 마쳤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중종10년(1515) 2월 1일 지돈녕부사 안침의 졸기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안침(安琛)이 졸(卒)하니, 향년이 72세였다. 안침은 젊어서 재주가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재물을 탐내고 의리를 가볍게 생각하였다. 연산주(燕山主) 때에 충청도 안찰사(忠淸道按察使)로 나갔는데, 연산주(燕山主)의 뜻에 영합하여 은밀히 적거(謫居)해 있는 사람을 은근히 박해하였다. 시호를 공평(恭平)이라 하였다.
중종12년(1517) 5월 14일 안침의 졸기
안침(安琛)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침은 성품이 민첩하고 문아(文雅)한 기풍이 있으며, 시문에 능하여 시짓기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다. 성종(成宗)이 자주 책(冊)을 내리고 그 제목을 쓰게 하였으며, 또 일찍이 금종이[金牋]를 내리고 글씨를 쓰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감상한 일도 있어서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총애받는다고 일컬었고, 청직(淸職)을 두루 지내어 당세에 명사가 되었다.
안침(安琛, 1445∼15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진(子珍), 호는 죽창(竹窓)·죽제(竹齊). 부윤 지귀(知歸)의 아들이다. 1462년(세조 8) 중형 선(璿)과 함께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466년 왕이 강원도에 행차하여 시행한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의정부사록·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1471년(성종 2)신설된 예문관에 당대의 명사로 뽑혀 등용되었다. 이어서 부수찬·정언·이조정랑·예문관교리·응교·장령 등을 거쳐, 1481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한때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폭로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임사홍이 물러난 뒤에 다시 등용되어 군기시정(軍器寺正)·부제학·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1487년 양주목사로 나아갔다가 1493년 이조참의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494년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고 이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한성부우윤·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00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1502년 호조참판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고, 1506년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14년(중종 9) 특별히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가 바로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에 뛰어났다. 영의정 유순(柳洵)·이손(李蓀) 등과 교우가 깊었다. 그의 필적으로는 광주의 〈밀성군침비 密城君琛碑〉·〈좌찬성한계희비 左贊成韓繼禧碑〉와 시흥의 〈월성군이철견비 月城君李鐵堅碑〉가 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중종30년(1535) 9월 25일 전 호조 판서 안윤덕의 졸기
전 호조 판서 안윤덕(安潤德)이 졸하였다. 익헌(翼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안윤덕(安潤德, 1457~15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경(善卿). 아버지는 안동판관 팽로(彭老)이며, 어머니는 복천군(福川君) 권개(權愷)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었다. 그뒤 성균관학유를 거쳐 박사가 되고, 1487년에 종부시주부, 1488년에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형조정랑이 되고, 1497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인·지제교 겸 사관(知製敎兼史官)이 되었다. 1498년에 사간이 되고, 이어 상례(相禮)·직제학을 거쳐 150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형조참판을 거쳐 1503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그해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김제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에 등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경상도 도순찰사 겸 부원수가 되어 왜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뒤 한성부윤·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515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 단군과 기자의 사당을 수축하여 경조정신(敬祖精神)과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한때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19년에 공조판서로 복직, 세자책립을 위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526년 기로소에 들고, 1527년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명종15년(1560) 3월 9일 좌의정 안현의 졸기
좌의정 안현(安玹)이 졸(卒)하였다. 안현은 성품이 공근(恭謹)하고 검소(儉素)하며, 국가를 위해 힘써 일하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항상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였고, 물건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취하지 않았으며, 편지를 써서 사사로운 일을 청한 적이 없었다. 집에서는 청빈(淸貧)하여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였으나 형을 섬김에는 예절을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가 없었고, 의약(醫藥)에도 정통하여 사람을 살리는데 힘쓰니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다. 병이 위급하자 정침(正寑)에 거처하여 부인의 손에 죽지 않았고, 관(棺)을 덮고 염습(斂襲)할 때에도 의복도 오히려 채울 수가 없었으니 그 말을 듣고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만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적체됨이 많아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부족하게 여겼다. 그리고 마음이 연약하고 물러서 권세에 부침(浮沈)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했다. 사신은 논한다. 안현은 겸손하고 청백하고 근신하여 재산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지위가 삼공(三公)에 오르고도 자제(子弟)를 위해 관작(官爵)을 구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병조에서 이런 것을 알고 비로소 그의 아들 한 사람에게 벼슬을 시켜 주었다. 사람들이 더러 칭송하기도 하였으나 권간(權奸)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오로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고 조금도 어기어 달리하지 못했으니 시론(時論)이 비루하게 여겼다.
안현(安玹, 1501∼156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진(仲珍), 호는 설강(雪江). 아버지는 순필(舜弼), 어머니는 군수 조용문(趙庸門)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승정원주서·병조정랑을 거쳐, 1533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로부터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민정을 순행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의 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사필(史筆)을 공정히 할 것과 사료보관의 신중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당시의 사치풍조를 엄히 단속하고 경비의 절감을 꾀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1541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승지가 되고 중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서 의약에 밝아 항상 시종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항시 검약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아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났다. 그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을사사화 때는 윤원형(尹元衡) 등에 협조하여 그의 추천으로 1548년(명종 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곧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어 의정부우참찬·호조판서를 거쳐 1553년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였는데, 인사청탁을 들어주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서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이어 좌찬성·판돈령부사를 지내고, 윤원형의 추천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판중추부사를 거쳐 1558년에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하여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여러 차례 당상문신정시(堂上文臣庭試)에서 문명을 떨쳤고, 경연(經筵)에서의 강설은 세밀하고도 분명하였다. 중후하고 단정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일을 맡으면 성심껏 수행하였다. 특히,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 의국(醫局)을 관리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명종18년(1563) 12월 8일 지중추부사 안위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안위(安瑋)가 졸하였다
안위(安瑋, 1491∼156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진(伯珍). 순필(順弼)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현(玹)의 형이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동생과 함께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벼슬이 올라서 예조좌랑·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539년 사헌부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윤임(尹任)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에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근검절약하며 당시 기근으로 어려워진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고자 구황에 힘써 그 실적이 뛰어났다. 명종이 즉위하여 윤임 일파가 몰려나면서 발탁되어 1554년(명종 9) 청홍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내직으로 옮겨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서 승정원으로 옮겨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였으며, 1558년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주관하였다. 그뒤 형조참판을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특채되어 이후 오랫동안 국방을 주관하면서 병학(兵學)의 재능을 보였다. 양계(兩界)에 대한 국방을 강화하고자 진보(鎭堡)의 설치를 장려하였고, 남방왜변에도 유의하여 대책을 수립하였다. 그뒤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가, 병사하였다. 사람됨이 근면성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선조21년(1588) 7월 20일(선조실록) 지돈령 안자유의 졸기
지돈령(知敦寧) 안자유(安自裕)가 죽었다.
선조21년(1588) 7월 1일(선조수정실록) 지돈녕부사 안자유의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안자유(安自裕)가 졸(卒)하였다. 자유는 을사 사화 때의 사류(士流)로서 안명세(安命世)와 가장 친하였다. 안명세가 화를 당하자 자유가 연루되어 중도에 폐기된 지 10년이었다. 금상(今上)의 조정에서 삼사(三司)의 직위에 오래도록 있었고 더러 전조(銓曹)와 좌랑(佐郞)에도 참여하였었다. 인품이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 다른 사람을 허여하는 것이 적었고 남과 농담이나 정에 넘친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꺼려서 어렵게 여겼다. 대간이 되어 서관(庶官)으로서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자를 탄핵 논박할 적에는 고려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친우나 자질로 아침저녁 친밀하게 지내는 자라도 일체 사적인 일로 감히 요구하지 못하였다. 조정에 벼슬한 지 50여 년 동안 한 번도 자제를 위해 벼슬을 구한 적이 없었다. 전관(銓官)이 물으면 말하기를, ‘우리 자질은 재능이 없어서 벼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 하고 끝내 거론하지 않았다. 조정에는 당원(黨援)이 없었고 자리에는 손님이 없었으며 늙어서는 다시 귀가 먹어서 벽을 면대하고 문을 닫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대각(臺閣)에 오르면 탄론(彈論)이 거듭 나오니, 사람들이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를 괴이하게 여겼다. 상이 그가 청렴한 절조가 있다 하여 권주(眷注)를 특별히 내려 품계를 승진시켜 포상하였다. 이때 와서 죽었는데 자식이 없었다.
안자유(安自裕, 1517∼158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홍(季弘). 좌참찬 숭선(崇善)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임(恁)이다. 가장 친하였던 교우 안명세(安命世)가 을사사화로 처형당하자, 10년 동안 은거, 절조를 지켰다.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주서가 되고, 1561년에 호조좌랑, 이듬해 병조좌랑·지평, 1563년에 세자시강원사서·경기도도사, 이듬해 병조정랑 등을 거쳐 헌납·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 집의가 되고, 1571년 홍문관직제학으로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知製敎兼經筵侍講官)이 되었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4년 좌부승지가 되고,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종계(宗系)개정을 약속받았음을 알리었다. 1576년 황해도관찰사, 1583년 대사헌, 이듬해 공조판서, 1588년 지돈령부사를 역임하였다. 공사를 분명히 하였고 청렴결백하여 주위의 친척들이 관직에 천거될 때마다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인조5년(1627) 11월 17일 성천 부사 안경심의 졸기
평안 감사가 성천 부사(成川府使) 안경심(安景深)이 죽었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성천 부사 안경심은 이번 변란에 공로가 많았는데 출륙(出陸)한 지 오래지 않아 불행히 병사했으니 매우 불쌍하다. 그의 상구(喪柩)가 나올 때에 연로(沿路)의 각 고을은 각별히 호송하도록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안경심(安景深, 1571∼1627)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자연(子淵). 증조부는 안방경(安邦烱), 조부는 안종전(安從㙉)이고, 부는 안언상(安彦鏛)이다. 외조부는 성단(成慱), 처부는 이준(李埈)이다. 1589년(선조 22) 기축(己丑)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9위로급제하였다.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1617년(광해 9)과 1618년(광해 10)에 비변사에 의해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으며, 1619년(광해 11)에 필선(弼善)이 된 후, 철산부사(鐵山府使), 성천부사(成川府使)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호조정랑(戶曹正郞) 등의 관직을 지냈다.
인조 20년(1642) 1월 14일 전 현감 안몽정의 졸기
전 현감 안몽정(安夢正)은 갑자년의 역변(逆變) 때 이괄(李适)에게 붙었다가 역적이 패하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사로잡아 복주(伏誅)시켰다. 사로잡은 자는 상으로 은 백 냥을 주고 숨겨준 자는 정배(定配)하였다.
안몽정(安夢正, 미상∼1642) 생년 미상의 조선 중기 관료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현감(縣監)으로 역모(逆謀)에 가담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관군을 피해 죽은 것으로 위장했으나 도피 생활 중 잡혀 국문(鞠問)을 치르던 중에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당시 기록에는 나이가 70이 넘었으므로 고문을 하지 않고 신문해야 한다는 논의가 보인다. 그러나 또 정강이를 때리는 형벌을 세 차례 가하였으나 불복하고 끝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의 체포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에 따르면 사로잡은 자에게는 상으로 은 백 냥을 주었고 숨겨준 자는 정배(定配)하였다고 한다.
효종5년(1654) 11월 13일 전 공조 참의 안방준의 졸기
전 공조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졸하였다. 방준은 성품이 꿋꿋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평생토록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와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사모하여 은봉(隱峰)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비록 시골에 물러나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으나 여러 차례의 항소(抗疏)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름을 받았으나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나이 82세였다. 저술로는 《혼정록(混定錄)》·《항의신편(抗義新編)》 등의 책이 세상에 전한다.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의 아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처는 경주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하였으나 거절,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장령·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초 지방의 유일(遺逸)을 초치 등용하려 하였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조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하에서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에 의하여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는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 李大源傳》·《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삼원기사 三寃記事》·《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