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 한국인의 국적이 어디인가, 최근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된 사람이 일제 하 우리 나라 사람은 일본인이었다고 하고, 노동부 장관 김문수는 일제 하 한국인이 일본 국적이라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광복회장 이종찬 그리고 그 아들 연세대 이철우 교수는 해방 이후 계속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을 얘기하며 일제 강점은 무효이며 따라서 당시 한국인은 여전히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국민이며 단지 일제에 통치권을 빼앗겼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그리고 1910년 합병조약은 우리 국민의 의지에 반하고 또 당시 조정을 협박하여 체결한 것이라고 할 때, 그 국제법적 효력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일본은 러일전쟁 전 한일의정서에서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으므로(1904년 韓日議定書 제3조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일본의 강제 병합은 그에도 반하는 위법 무효의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실효적 지배는 계속되었고,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사실상 승인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일본은 한일 병합이 유효하며 주장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제국주의 국제질서에서 통용되던 논리라고 할 것이며, 이제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민족자결주의와 만국평등의 국제질서를 지향한다고 할 때, 현재 일본의 강제 병합의 정당화 논리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으로 믿습니다.
다만, 그와 별도로 설사 한일 강제병합이 합법적이며 유효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우리 조선인이 일본의 정식 국적에 편입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국적법에 따른 일본인이 아니라 단지 일본이 지배 관리하는 식민지 백성일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일본 국적의 이중적 의미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국적의 본래적 의미는 일본 국적법에 따라 일본 국적을 인정받거나 취득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일본 국적법은 일본 호적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 위하여는 일본 호적에 등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의 국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고, 또 일본 호적과 다른 별도의 조선 호적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정식의 일본 국적은 취득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일본 국적의 또 다른 의미, 즉 일본의 관할권이 미치는 인적 범위라는 차원에서의 국적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적을 본다면 일본은 조선인들에 대하여 일본 국적을 주장하였고 국내적으로 그것을 실효적으로 강제할 수 있었고, 국제적으로 통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당시 일본 대표 선발전에 출전을 하고 또 일장기를 달고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번째 의미의 국적이란 단지 일본 정부의 통제와 관리의 대상을 의미할 뿐 일본인과 동등한 자격이라는 국적의 의미는 전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곧 민족적 차별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이제 당시 한국인이 본래 의미의 일본 국적에 오를 수 없었던 근거에 대하여 조금 살펴 보겠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본의 국적법은 일본 호적법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전통 민족주의의 산물입니다. 메이지 민법 시행 이후 호적에 기재된 것은 일본인뿐이고, 그리고 반드시 하나의 이에(家)에 속하고 하나의 씨(氏)를 갖고 하나의 호적에 등록된다는 일가일씨일적(一家一氏一籍)이 일본인의 생활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체도 하나의 이에(家)로 이해되고, 이를 통솔하는 것이 일본 민족의 가장인 천황입니다. 이것이 일본의 국체의 이데올로기이고, 일본인 개개인은 호적에 등록됨으로써 천황의 적자로 포섭된 것입니다.(엔도 마사타카, "호적을 통해서 본 국적: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일본비평 제29호, 2023, 60쪽)
1899년 메이지 시대 일본 국적법은 일본의 가통 사상에 따라서 부계 혈통주의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동 국적법 제4조는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일본인인 자를 국적의 요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 국적법은 외국인이 일본 호적에 등재될 수 있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제한하였습니다. 일본 국적법 제5조 1)일본인의 처가 되는 경우, 2) 호주(戶主)인 본 여성과 결혼하여 일본인의 남편이 되는 경우, 3) 일본인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인지(認知)하는 경우, 4) 일본인의 양자가 되는 경우, 5) 귀화할 경우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호적이 아니라 그와 별도의 조선 호적에 편제되었습니다. 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취득할 길은 혼인을 통하여 일본 호적에 편입되거나 신생아의 경우 출생과 인지를 통하여 호적에 입적되어야 했습니다. 그 외에 조선인이 일본의 호적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조선인만이 아니라 대만인 그리고 사할린 원주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은 본국의 내지적(內地籍)과 외지의 조선적, 대만적, 사할린적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지와 외지 사이의 본적의 이동을 금지하였습니다. 1916년 1월 18일 사법성법무국장은 “조선인 그 밖에 호적에 새로 등록된 민족은 내지로 전적(轉籍) 분가(分家) 또는 일가(一家)를 창립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엔도 마사타카, 앞의 글, 69쪽).
일본 국적법이 적용되지 않은 까닭에 조선인은 일본의 정식 국민이 아니어서 참정권, 병역 의무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전력이 고갈되면서 조선과 대만에서도 병역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일본 호적으로의 전적(轉籍)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는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1945년 4월 병역 복무의 댓가로 참정권도 부여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는 실시되지 못하였습니다.
끝으로 대만과 사할린에서는 일본 국적법이 적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만인 등은 귀화를 통하여 일본 호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또 반대로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중국 등 다른 나라의 국적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만은 국적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조선인은 설사 일본으로의 귀화가 승인된다고 하여도 다른 외국의 국적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하였습니다. 이는 예컨대 당시 만주 등의 조선인들이 중국의 국적을 취득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는 경우 그 통제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습니다(엔도 마사타카, 앞의 글, 65쪽).
요컨대 일제 강점은 불법적 강점이었으며, 그 병합조약은 무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인은 의연히 대한제국의 국민이었던 것입니다.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으로 국체를 변경하였고, 이제 조선인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일본은 한일 병합조약을 합법적인 것으로 보고,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으로 바뀐 것으로 간주합니다. 당시 조선인들 가운데에서도 대한민국의 국민을 부인하고 일본제국의 '국민'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당시 조선인은 결코 본래적 의미에서 '일본 국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인은 대외적으로 일본 국적으로 간주되었지만, 실제는 그저 일제가 관할하는 조선인이었습니다. 다만 일본이 조선인의 국적을 관리하였을 뿐입니다. 일본의 국적 관리는 일본의 이익과 안전을 위하여 조선인을 이용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대외적으로는 일본인으로 취급하여 통제 관리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일본 민족과 엄연히 다른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조선인은 일본 제국 내의 '조센징'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서도 그러한 '조센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도, 한국 정부에도 그러한 '조센징' 취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