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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자락 백성 / 강요배 그림 |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을
금악벌판으로 몰고가 집단학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한 무리의 정치깡패집단이 열 일곱도 안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
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 이산하의 '한라산' 서시 일부
이산하의 장시 '한라산'을 읽으면서 잠시 기억을 19년 전으로 되돌려봤다. 서울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으로 온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전국으로 번지던 때다. 그 당시 제주 4.3을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지됐던 1987년 3월 사회과학무크지인 <녹두서평> 창간호에 그의 시가 발표되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 꽃비 / 강요배 그림 |
제주 섬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숨죽여 왔던 4.3의 적나라한 실체를 세상에 드러내도 탈이 없는지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제주 4.3이 이토록 끔찍했던가 하는 놀라움으로 부르르 떨었다. 폭동 정도로만 알았던 국민들에게 끼쳤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시로 이산하(본명 이상백) 시인은 8개월 도피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덩달아 제주 4.3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은 4.3의 광풍 만큼이나 거세고 집요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필화사건을 계기로 4.3진상규명운동은 지하에서 서서히 지상으로 햇빛을 보기 시작했다. 87년 6월민중항쟁의 힘도 적지않게 작용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노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는 글귀가 유난히 가슴 자락에 매달린다.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피의 섬
제주 4.3의 초토화 시기는 1948년 11월 부터 이듬해인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간을 일컫는다. 진압군의 강경진압작전은 이 시기에 대규모로 진행됐다. 제주도민들이 가장 많이 집단할살 된 시기도 이 때다. 중산간마을 거주자에게 통행금지를 포고하면서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이유 여하를 가리지 않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순박한 양민들을 닥치대로 학살했다.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다. 그야말로 '초토화' 됐다.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려 해변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혹은 채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없이 집단희생을 당했다. 이 때 집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진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해변마을로 내려오지 못한 채 산간지역에 은신하다가 뒤늦게 진압군에게 붙잡혀 죽기도 했다. 이 기간에는 중산간마을 뿐만 아니라 일부 해변마을에서도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의한 집단살상이 벌어졌다.
군경에 의한 주민 집단희생의 실상은 대부분 살아남은 자의 증언에서 일치된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미군 비밀보고서에는 "9연대가 마을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거나 "2연대는 신분과 무기소지 여부에 관계없이 폭도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9연대나 2연대의 작전일지 등을 찾는 것은 미궁에 빠져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이번에 소개되는 증언은 애월 소길리 원동마을 사례다. 이 마을의 피해사례는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을 정도로 4.3진상조사의 중요한 증언이 되고 있다. 이 글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와 신문자료, <제주4.3연구소> 조사자료를 기본 추적자료로 삼았다.
잃어버린 원동마을의 울음소리
▲ 잃어버린 마을의 흔적 |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은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던 1948년 11월 13일 이후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원동마을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과거 원동 마을은 제주목과 대정현을 걸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가다가 쉬면서 술과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주막거리가 있던 곳으로 이러한 주막들을 중심으로 화전과 목축을 하면서 15가구에 60여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왔다.
현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원지(院址)'라 쓰인 비석만이 한때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무장대로 활동할 만한 청년들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마을에 온 경찰도 "폭도들에게 협조하지 말라"는 경고만 하고 내려갔을 뿐 주민을 구타하거나 총살하는 일은 없었다. 무장대 역시 이따금 내려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 적은 있지만 소출이 적은 이 마을에 식량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합시킬 때까지만 해도 큰 위험을 느끼지 않고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 소개령이 내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날 군인들이 원동에 온 까닭은 부근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군인들은 원동에 도착하기 전 이미 하가리에서 무모한 총살을 벌인 자들이었다. 군인들이 온 마을을 뒤졌지만 무장대는 없었다.
학살 현장에서 총에 맞았으나 살아난 장병기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서 사방으로 포위하고 주막 번데기로 사람들을 전부 집합시켜 놓은 거라. 그러다가 나중에 어디로 데려갈 듯 하더니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앉혀 놓고 총으로 와작착 와작착.... 난 그때 총부리가 겨드랑이로 들어가 젖가슴으로 나왔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애기 안은 채 죽은 사람들 사이에 누워져 있습디다. 죽은 사람들 위로 기름을 부어 불이 막 타고 있었어. 난 겨우 기어서....
다음은 고남보(74세, 북제주 애월)씨가 열일곱살 때 겪은 참혹했던 상황을 증언한 내용이다. 그는 이날 졸지에 아버지(고병규)와 어린 두 동생(고남옥, 고남주)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군인들이 후레쉬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을 집합시켰으니까 아직 어두웠던 새벽 5시께였을 겁니다. 군인들은 주민들 손을 뒤로 돌려 결박시킨 후 마치 굴비 엮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밧줄로 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한바퀴 도니까 주민 모두가 묶이게 됐습니다. 이틀 전에도 경찰과 해변마을 대동청년단이 마을에 온 적이 있지만 아무 일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폭도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했지만 누가 그걸 알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는 결박당한 채 폭도를 찾아 마을 주변을 이리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새벽부터 굶은 채 하루종일 그 짓을 하다 오후 5시경에야 다시 주막집 앞으로 돌아왔지요. 군인들도 처음엔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한때 결박을 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또 "사람을 일렬로 세워놓고 쏘면 9명까지 죽는다"거나, "어른은 끽소리 없이 죽는데, 애들은 두세번 앙앙 울다 죽는다"는 등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더군요. 그러다 다시 결박당했는데 나는 손을 앞으로 하여 묶였습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어디론가 무전을 치더니 "너흰 10분내로 총살된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연대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모양입니다. 곧 애월리 쪽에서 군인 차가 올라왔지요.
난 급히 결박을 풀어 준비하고 있다가 그들이 서로 경례하는 사이에 숲으로 뛰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식량과 이불을 덮어놓고 불을 지른 후에야 가 버렸습니다.
- 고남보(高南普, 67세, 제주시 용담1동) 1999. 1. 22 제민일보 증언 보도
결박을 풀고 도망을 친 고남보 할아버지는 계속 된 총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2005년 3월 28일 '항쟁의 역사 고난의 기억'을 주제로 열린 '4.3증언 본풀이 마당'(제주4.3연구소 주최) 현장에서 그는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토벌대가 마을 사람들에게 연발 사격을 계속하는 동안 산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치다가 나중엔 울음을 터뜨렸어. 죽은 사람은 조용한 데 죽지 못해 산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총소리가 멎을 때마다 통곡하는 소리를 냈어..."
▲ 이승과 저승 사이 / 강요배 그림 |
살려달라...살려달라...왜 우리 제주 사람들이 이토록 마지막 생을 천형의 고통을 받아야 했던가. 군인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이날의 희생자는 중산간을 지나다 이 마을 주막에 잠시 머물던 사람까지 희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중 확인된 원동 주민은 이두익(64) 김기용(60) 김승홍(58) 현두병(50) 김길홍(49) 양이룡(48) 이무생(양이룡의 아내) 고병규(43) 양정생(여, 41) 강기송(40대) 김유홍(40) 허홍(여, 40대) 이달호(여, 36) 강창수(31) 강창권(29) 강창욱(28) 강창욱의 처(25) 김귀환(28) 양운용(28) 김성만(여, 24) 고임생(여, 22) 홍성규(22) 고태원(21) 김귀휴(21) 양춘희(여, 21) 강공부(20) 현창하(20) 장봉호(여, 19) 임세옥 고남옥(여, 16) 양춘생(여, 16) 현봉완(14) 고남주(7) 강창욱의 아들(4) 등 34명이다.
이렇게 해서 원동마을은 사라져 버렸다. 원동마을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원동마을 주민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아픔과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원동마을 주민들의 땅은 임자 없는 땅으로 버려졌다가 외지인에게 이전돼 버리거나, 헐값에 팔려 나갔다. 지금 마을터는 짙푸른 대나무 숲과 하늘을 가릴 정도의 빽빽이 자란 삼나무로 뒤덮여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제주에선 이 마을을 가리켜 '잃어버린 마을 - 원동'으로 불리우고 있다.
<미군보고서>에는 원동마을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월 13일 경비대의 작전으로 폭도들이 행원리에서 115명, 좌표 937-1133 지역에서 37명, 오등리 부근에서 4명 사살되었다. 사살된 폭도들 중 1명은 경비대에서 탈출했던 자로 밝혀졌다.(방첩대 보고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89, November 16, 1948.)
60대 노인에서부터 4살난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이 날의 무차별 총살이 '폭도들을 사살한 군대의 전과(戰果)'로 둔갑한 것이다. 제주4.3의 수많은 인명피해는 이와 다르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아픈 역사의 실상들이다.
초토화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 뒤에 너무나 당당하게 서 있는 미군과 통곡하는 여인의 상반된 모습, 이것이 한미관계의 진실이다. |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군은 사전에 초토화작전(대량살육작전 : A Program of Mass Slaughter)을 계획하였으며, 1948년 5월 9연대장 김익렬에게 그 시행을 지시한 바 있다. 미군 보고서는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successful actions)'으로 평가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 직전까지 '괴잠수함 출현설'등을 흘리며 초토화작전 실시의 당위성을 사전에 조작했으며,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정찰기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도 적극 지원했다. 또한 미군은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과 서북청년단 등의 국가폭력기구를 동원하여 좌익을 ‘청소(cleansing)'하는 작업을 지원했다.
왜 그랬는가. 미국이 한반도에 반공의 방벽을 튼튼히 쌓기 위한 냉전정책이 가져다 준 결과이다. 미국은 제주 4.3을 좌우익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몰아갔다. 미국을 떼어내고 제주 4.3의 진실을 가려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