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통, 비 예보가 있었지만 믿을 수 없다. go go 유수암마을은 나즈막한 극락오름, 거믄데기오름 안오름 사이에 있는 산간에 가까운 마을이다. 평화로에서 바다쪽으로 느린 경사를 이루며 설계된 마을. 돌과 고목, 물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평화로 가까이 있는 거문데기는 가장 먼저 설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네이고 그 동쪽 개척단지는 1960년대 말 농가소득증대를 위해 조성된 축산양잠단지로 출발한 곳이다. 그리고 유수암천이 있는 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문데기 큰당(하르방당)에서 우리를 기다린 모기한테 몇 방울의 제물을 헌납하고 개척단지(유수암상동)로 이동했다. 50년전부터 터를 잡아 꿋꿋이 사는 스레트지붕들과 이주민(훠얼씬 많음)들의 예쁜마당이 한데 어우러지는 삶을 보았다. 폐교(분교)에서 그 시대의 추억을 소환하고, 중국산 실크에 밀려 소득은 커녕 빚쟁이가 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꿈낭에서 1만원 뷔페를 먹고 유수암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콸콸 솟는 산물에 문안 올리고 절동산에 올라 한눈에 마을을 담았다. 동산집, 굴렁집, 돌집... 신으로 사는 팽나무, 무환자나무, 소나무, 감나무(200년은 쪽도 못씀)에
뒤늦게 찾아간 하르방에 들렸을 때 일행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금폭낭을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대여섯 걸음앞에 비스듬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올커니, 제대로 찾아왔나 싶어서 걸음을 옮겼다. 표지판은 더러웠고 우리 일행이 다녀갔던 흔적이 당안쪽으로 풀섶이 누운 흔적을 따라갔다.
소낭을 칭칭 휘감은 볼레낭은 신목이 아니었고 부신목이었다. 그제 제주도서관에서 1973년도 하계방학을 맞아 내려온 재경 서울대 제주학생들의 신당조사 보고서를 봤던 게 기억이 났다. 그. 보고서는 가리방으로 긁어 인쇄물을 책자로 묶은 형태였다. 서부지역 신당 조사를 유심히 봤는데 신목을 죽은디 혹은 조로기낭 식으로 사투리로 표기했던 게 이채로웠다. 팽나무는 드물었으며 오늘처럼 볼래낭도 신목인 당도 있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게 되면 미친다라는 보복 항목을 보면서 이제 팔순을 눈앞에 둔 당시 학생들의 천진성이 느껴지는 보고서를 보면서 큭큭거리기도 했다.
유수암천에 들려 졸졸 흐르는 차가운 물에 손을 적시면서 내 고향 묵골의 선조들을 생각했다. 내 조부도 고모들도 여럿이 위암으로 세상을 뜨
첫댓글 김정숙
산수화 같은 유수암마을
장마통, 비 예보가 있었지만 믿을 수 없다. go go
유수암마을은 나즈막한 극락오름, 거믄데기오름 안오름 사이에 있는 산간에 가까운 마을이다. 평화로에서 바다쪽으로 느린 경사를 이루며 설계된 마을. 돌과 고목, 물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평화로 가까이 있는 거문데기는 가장 먼저 설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네이고 그 동쪽 개척단지는 1960년대 말 농가소득증대를 위해 조성된 축산양잠단지로 출발한 곳이다. 그리고 유수암천이 있는 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문데기 큰당(하르방당)에서 우리를 기다린 모기한테 몇 방울의 제물을 헌납하고 개척단지(유수암상동)로 이동했다. 50년전부터 터를 잡아 꿋꿋이 사는 스레트지붕들과 이주민(훠얼씬 많음)들의 예쁜마당이 한데 어우러지는 삶을 보았다. 폐교(분교)에서 그 시대의 추억을 소환하고, 중국산 실크에 밀려 소득은 커녕 빚쟁이가 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꿈낭에서 1만원 뷔페를 먹고 유수암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콸콸 솟는 산물에 문안 올리고 절동산에 올라 한눈에 마을을 담았다. 동산집, 굴렁집, 돌집... 신으로 사는 팽나무, 무환자나무, 소나무, 감나무(200년은 쪽도 못씀)에
김세홍 유수암 일대 신당기행
뒤늦게 찾아간 하르방에 들렸을 때 일행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금폭낭을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대여섯 걸음앞에 비스듬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올커니, 제대로 찾아왔나 싶어서 걸음을 옮겼다. 표지판은 더러웠고 우리 일행이 다녀갔던 흔적이 당안쪽으로 풀섶이 누운 흔적을 따라갔다.
소낭을 칭칭 휘감은 볼레낭은 신목이 아니었고 부신목이었다. 그제 제주도서관에서 1973년도 하계방학을 맞아 내려온 재경 서울대 제주학생들의 신당조사 보고서를 봤던 게 기억이 났다.
그. 보고서는 가리방으로 긁어 인쇄물을 책자로 묶은 형태였다. 서부지역 신당 조사를 유심히 봤는데 신목을 죽은디 혹은 조로기낭 식으로 사투리로 표기했던 게 이채로웠다.
팽나무는 드물었으며 오늘처럼 볼래낭도 신목인 당도 있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게 되면 미친다라는 보복 항목을 보면서 이제 팔순을 눈앞에 둔 당시 학생들의 천진성이 느껴지는 보고서를 보면서 큭큭거리기도 했다.
유수암천에 들려 졸졸 흐르는 차가운 물에 손을 적시면서 내 고향 묵골의 선조들을 생각했다. 내 조부도 고모들도 여럿이 위암으로 세상을 뜨
김순국
사진도 명품이고 후기들도 물흐르 듯 기억을 소환해주네요. 계속 이런 후기를 릴레이해주시면 입력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꿀덕 떡하나 얻어먹 듯 이해를 더해가겠네요. 즐거운 글과 길을 함께 나들이해서 행복했습니다~~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