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파스칼 - 《팡세》
《팡세》 의 구성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 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39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파스칼 그의 임종 후, 곳곳에서발견된 그의 단장들을 그러모으니 책 한 권의 분량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팡세》다. 그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기독교 호교론(護敎論)'을 바탕으로 《팡세》를 구상했다. 파스칼의 호교론은 종교가 결코 이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반이성적이라는 이유로 종교를 도외시하기도 하지만, 실은 종교야말로 인간을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존경스러운 것이며, 또한 인간이 바라는 최고선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사랑할 만한 것이라는 주장.
파스칼의 호교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인간본성이 타락하였음을 보여 주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고, 제2부는 그러한 인간을 구원해 줄 구속자가 있음을 말하는 <신 있는 인간의 복됨>이다. 인간 본연에 대한 인간학적 고찰을 이야기하는 전반부를 거쳐, 인류를 구원하는 존재에 대한 성서학적 고찰로 이어진다.
신 없는 인간의 비참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항상 행복하지 않음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란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시선은 오로지 영예나재물, 타인의 존경 같은 '자신의 밖'을 향해 있을 뿐이다. 그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시, 자괴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덕이게 된다.
일시적인 쾌락은 거짓이며 그것이 남기고 가는 공허함과 비참함까지 아울러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파스칼의 입장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 헤맬 뿐만 아니라, 그 엄한 격자 위에서 진리의 좌표를 확인하길 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견되는 것이라곤 불확실과 비참 그리고 죽음뿐이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욕망을 아예 떨쳐 버리고 살아갈 수도 없는 현실,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욕망의 사막에서 인간이 찾은 유일한 대안이 바로 '위락(慰樂)'이다.
위락이 절망을 위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락이야말로 인간이짊어진 비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위락은 술이 선사하는 잠깐의 취기 같은 것이다. 현재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 순간의 괴로움을 잊기 위함이다. 비참한 인간이찾은 진통제, 그 마취 속에서 더욱 비참해지는 인간, 위락은 도취되어있는 동안 인간의 불행을 일시나마 잊게 할 뿐, 본질적인 문제로부터는더욱 멀어지게 한다.
이 세상의 헛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참으로 헛되다. 이들에게서 위락을 빼앗아 보라. 그들이 권태로 시들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자신의 허무를 느낄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고 또 자신을 망각할수도 없게 되자마자 견딜 수 없는 비애 속에 빠져드는 것은 정녕 불행한 일이니까 말이다.
신 있는 인간의 복됨
진리에 대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낳는 것은 허위와 오류뿐, 신 없는 인간의 삶은 어둡고 절망적이다. 파스칼은 전반부의 인간학적 고찰을 통해 기독교가 인간에 관한 납득할 만한 이론을 제공하고 실천적으로는 최고의 선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이제 이론에 대한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 후반부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성서에 입각한 역사적 증명이다.
인간이 원죄의 대가로 짊어진 천형은, 끝없는 진리와 행복에 대한 열망이다. 그러나 답이 없는 열망이다. 파스칼은 그 답을 신앙 안에서 찾으려 했다. 신은 우리 앞에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숨은 신'으로서 우리 안에 거할 뿐이다. 그러나 또한 성서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표징이다. 성서에서 다루고 있는 신의 역사는, '숨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교제 방식이다.
《팡세》는 인간 실존에 대한 파스칼의 영적 기록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현장 속에서 쾌락과 절망, 환상과 비참을 지켜보았던 파스칼은 《팡세》 안에서 소망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공허'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로의 겸허한 자기 고백은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망에 응하는 신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신과의 만남은 인간적 성찰의 연장선상에 있는 복됨이다.